[include(틀:경희궁)] [include(틀:조선 왕궁의 정전 정문)]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271호 경희궁}}}]]''' || ||<-3> {{{#ffd700 {{{+1 '''경희궁 숭정문'''}}}[br]{{{-1 慶熙宮 崇政門}}}}}}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경희궁 숭정문,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45 ([[신문로2가]]) || ||<-2> {{{#ffd700 '''건축시기'''}}} || [[1620년]] {{{-1 (창건)}}} / [[1991년]] {{{-1 (복원)}}}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숭정문.png|width=100%]]}}} || || {{{#gold ''' 숭정문[* [[https://www.kogl.or.kr/recommend/recommendDivView.do?atcUrl=keyword&recommendIdx=1551|사진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 [목차] [clearfix] == 개요 == [[경희궁]]의 [[정전#s-6|정전]]인 [[경희궁 숭정전|숭정전]]의 [[정문]]이다. 경희궁의 정문인 [[경희궁 흥화문|흥화문]]으로 들어와 금천교를 건넌 뒤 살짝 왼쪽으로 틀어 [[경희궁 건명문|건명문]]을 쭉 지나다 동북쪽으로 꺾은 뒤 경사를 따라 올라가면 보인다. 이는 [[경복궁 광화문|광화문]]에서 [[경복궁 근정문|근정문]]까지 일직선으로 연결되어있는 [[경복궁]]과 다르다. 경복궁은 예법에 따라 반듯하게 구획된 정궁인 반면, 경희궁은 이궁인데다 [[인왕산]] 자락에 들어서 산세에 맞게 지었기 때문이다. [[이름]]은 당연히 ‘숭정전의 문’이란 뜻이며 ‘숭정(崇政)’ 이름 자체는 ‘정사(政)를 드높인다(崇)’는 뜻이다. == 역사 == 1617년([[광해군]] 9년)에 [[경희궁]] 창건 당시에 착공하여 1620년 연간에 완공했다. 이후 여기서 [[왕]]과 [[신하]]가 함께 [[조회]]하는 조참, [[과거제도|과거]]합격자들의 시상, [[외국]] [[사신(외교)|사신]] 접견 등 많은 [[행사]]를 거행했다. 1829년([[순조]] 29년) 경희궁에 [[화재|대화재]]가 일어나 내전 주요 건물들이 불탔으나 숭정문은 [[경희궁 숭정전|숭정전]]과 함께 다행히 피해를 면했다. 1860년대 [[경복궁]] 중건 때 대부분의 [[경희궁]] [[건물]]이 철거되고 공사 자재로 쓰였다. 경희궁에는 건물 10여 채 정도만 남았는데 [[경희궁 숭정전|숭정전]]과 숭정문도 그 중 하나였다. 경희궁 영역에는 [[창고]]와 양잠소가 들어섰는데 이 때 세운 [[곡식]] [[창고]]를 숭정문 밖에 두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0912004_001|#]] 그나마도 1889년([[고종(대한제국)|고종]] 26년)에 숭정문의 일곽이 [[화재]]를 당해 곧 재건했는데[[http://sillok.history.go.kr/id/kza_12609014_001|#]], 1900년 경에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사진엔 숭정문과 [[행각]]이 없는 것을 보아 이마저도 그 사이에 철거한 듯 하다. [[일제강점기]]에는 [[경희궁 숭정전|숭정전]]과 숭정문 언저리에 [[일본인]] [[학교]]인 경성중학교(京城中學校)[* 현재 [[마포구]] [[연남동]]에 있는 경성중학교와는 전혀 다른 학교다. 거기는 '景'城.]가 들어섰다. [[8.15 광복]] 이후에도 경성중학교가 서울 중, 고등학교로 이름이 바뀌었을 뿐 [[학교]] 자체는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 그러다 1980년대 들어 [[서울특별시|서울시]]가 '경희궁지 복원과 시민 사적 공원 조성 계획'를 세워 [[서울고등학교]]를 지금의 [[서초구]] [[효령로]]로 이전시킨 뒤 1985년부터 발굴 조사를 시작하여 1991년 [[복원]]했고, 1993년과 1994년에는 행각 공사까지 완료하여 오늘에 이른다. == 구조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서궐도 숭정전.png|width=100%]]}}} || || {{{#gold ''' 〈서궐도안〉을 채색한 〈서궐도〉에서 묘사한 숭정문과 숭정전 '''}}} ||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총 6칸이며 [[처마|겹처마]] [[양식]]에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세운 1층짜리 [[문]]이다.[* [[한옥]]에서는 주로 ‘단층(單層)’으로 표현한다.] 지형이 높기 때문에 이에 맞추어 굉장히 넓은 월대를 두 단이나 쌓았으며 그래서 위압감 하나만큼은 다른 [[궁궐]]의 [[정전#s-6|정전]] [[정문]]들을 [[압살]]한다. 아래 월대의 [[계단]]은 9단이고 가운데 [[왕]]이 다니는 어칸(御間) 앞에 [[서수]]를 두 마리 놓았으나 답도는 놓지 않았다. 그러나 5단의 [[계단]]이 설치된 윗 월대에는 서수는 물론, [[쌍용]]이 그려진 [[답도]]를 설치했다. * 원형으로 된 주춧돌 위에 [[원(도형)|원]][[기둥]]을 올린 뒤 그 위에 창방과 평방을 놓아 [[공포]]를 받치게 했다. 공포는 [[공포|다포]] 양식으로 했고 어칸에는 [[기둥]]과 기둥 사이의 중간에 3개의 공포를 두었으며 이를 주간포라 부른다. 협칸에는 각각 2개의 주간포를 얹었으며, [[천장]]은 서까래와 구조들이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했고, 문 위는 풍형 홍살을 꾸며놓았다. [[단청]]은 단초머리의 모로단청[* 부재(部材)의 두 끝 부분에만 칠한 [[단청]].]으로 했으며 문짝은 [[나무]] [[판]]으로 중앙 열 3칸에 달았다. 그리고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를 양상바름한 뒤, 2개의 취두와 4개의 용두, 그리고 동, 서 양쪽의 추녀마루 위에 5개의 [[잡상]]과 각 [[처마]] 끝에 토수를 놓았다. * 숭정문의 좌우에는 각각 정면 8칸, 측면 2칸의 [[복도|행각]]이 뻗쳐 있고, 가장자리 쪽 2칸은 다른 칸보다 폭이 좁다. 행각은 직각으로 북으로 꺾여 [[경희궁 숭정전|숭정전]] 좌, 우의 행각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 원래는 [[방]]과 월랑이 혼합된 형태의 행각으로, 예문관 · 무예청 · 선전관청 ·향실 등의 관청과 숭정전을 지키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여러 개의 [[방]]이 있었으나 현재는 벽체없이 [[복도]]로만 뚫려있다. 그리고 행각 사방마다 [[문]]이 있어 통행을 자유롭게 했는데, 남행각엔 바로 이 숭정문, 동행각과 서행각엔 여춘문과 의추문, 그리고 북쪽 행각에는 [[편전]]인 [[자정전]]의 [[정문]] [[경희궁 자정문|자정문]]이 있다. == 여담 == * [[왕]]들의 [[대관식|즉위식]]장으로도 활용했다. [[정전]]이 아닌 정전의 [[정문]]에서 거행한 이유는 대부분 [[선왕]]의 [[장례|장례기간]]에 즉위식이 이뤄지는 것이라 화려함과 웅장함보다는 슬픈 분위기에서 했기 때문이다.[[https://clipbank.ebs.co.kr/clip/view?clipId=VOD_20121115_A0006|#]] 단, 이궁이기에 많이 열리진 않았다. 20대 [[경종(조선)|경종]]과 22대 [[정조(조선)|정조]], 그리고 24대 [[헌종(조선)|헌종]] 등 임금 3명이 이 곳에서 [[옥좌|왕위]]에 올랐다. * 이 곳에서 [[임금]]이 직접 [[죄인]]을 국문하는 친국을 몇 번 행했다. 사안의 중대함에 따라 [[장소]]가 달라졌는데 꽤 무거운 [[죄]]를 저지른 중죄인들을 주로 숭정문에서 심문했다.[* [[창덕궁]]에 [[왕]]이 머물 땐, [[창덕궁 인정문|인정문]]에서 했다.] 즉 여기까지 왔다는 건 사실상 끝장났단 얘기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0605003_002|#]][[http://sillok.history.go.kr/id/kua_10604023_002|#]] --[[사망 플래그]]--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경희궁, version=315, title2=경희궁 숭정전, version2=30)] [[분류:경희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