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경희궁)] [include(틀:조선 왕궁의 내정전)]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271호 경희궁}}}]]''' || ||<-3> {{{#ffd700 {{{+1 '''경희궁 융복전'''}}}[br]{{{-1 慶熙宮 隆福殿}}}}}}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경희궁 융복전,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55 ([[신문로2가]]) || ||<-2> {{{#ffd700 '''건축시기'''}}} || [[1620년]] {{{-1 (창건)}}} / [[1865년]] ~ [[1868년]] {{{-1 (철훼)}}}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희궁 융복전 CG.pn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희궁 융복전 CG 2.png|width=100%]]}}} || ||<-2> {{{#gold ''' CG로 재현한 융복전 정면의 서쪽과(왼쪽) 동쪽(오른쪽) '''}}} || [목차] [clearfix] == 개요 == [[경희궁]]의 침전으로, [[왕]]과 [[왕비]]가 거주하는 내전 구역에 있었다. 그들도 [[사람]]이니만큼 [[의식주|먹고, 자고, 입고,]] [[미팅#s-2|사람도 만나며]] 쉬면서 여러 활동을 하는 자신만의 [[생활]][[공간]]이 당연히 필요한데 이 곳이 바로 그 [[기능]]을 담당하는 곳이다. 같은 역할을 하는 건물로 융복전 서쪽에 위치한 [[경희궁 회상전|회상전(會祥殿)]]이 있다. 이 곳이 [[왕]]의 침전인지, 아니면 [[왕비]]가 머물렀는지 명확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이는 같은 기능의 [[경희궁 회상전|회상전]]도 마찬가지이다. [[정조(조선)|정조]]가 지은 《경희궁지(慶熙宮志)》에는 ‘[[경희궁 융복전|융복전]]이 [[경희궁]]의 정침(正寢)이며 [[경희궁 회상전|회상전]]은 임금이 거처하는 내전’이라 적혀있는데, 《궁궐지(宮闕志)》에는 '회상전이 궁궐의 [[정전]](正殿, 여기서는 내전의 정전을 의미한다.)이며 융복전은 단지 회상전 동쪽에 있는 [[건물]]' 정도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회상전보다 동쪽에 위치한 점,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등에 [[왕]]과 [[왕비]], [[태후|대비]] 등이 거처했단 [[기록]]이 전해지는 회상전과 달리, 융복전은 [[임금]] 외에 사용한 사람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왕]]의 침전’으로 추정된다. [[이름]]은 '[[복]](福)이 융성(隆)한다'는 뜻이다. == 역사 == 1620년([[광해군]] 12년) [[경희궁]] 창건 때 지어졌으며 침전으로 [[기능]]을 처음 시작한 것은 1624년([[인조]] 2년)부터이다. [[현종(조선)|현종]] 시기 승하한 [[인선왕후|인선왕후 장씨]]의 빈소로도 사용했으며, [[숙종(조선)|숙종]] 시기 1693년(숙종 19년)에 수리한 것 이외엔 별 일 없이 [[19세기]]까지 제 기능을 했다. 숙종은 이 곳에서 [[신하]]들을 만나 [[정사]]를 펼치기도 하는 등 가장 많이 활용했다.[[http://sjw.history.go.kr/id/SJW-D44110100-01100|#]] 1829년([[순조]] 29년) 10월에 [[회상전]]에서 일어난 [[화재]]로 [[경희궁]] [[내전]] 일곽 대부분이 불 탈 때, 함께 소실되어 1831년(순조 31년) 4월에 재건했다. 순조가 [[사망|승하]]한 이후 즉위한 [[왕]]들인 [[헌종(조선)|헌종]]과 [[철종(조선)|철종]]은 [[경희궁]]보다는 [[창덕궁]]에 오래 머물면서 융복전은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다. [[1860년대]] [[고종(대한제국)|고종]] 시기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대부분의 경희궁 [[건물]]들의 90%를 헐어다 경복궁 중건의 자재로 쓸 때, 철거되었다. > 서궐(경희궁) 내에는 [[경희궁 숭정전|숭정전]], [[경희궁 회상전|회상전]], 정심합(正心閤), 사현합(思賢閤), [[경희궁 흥정당|흥정당]]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헐었다.''' 목재를 가져오니 다수가 썩었다. 이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서 (경복궁의) 나인간(內人間)과 각사의 건조에 사용했다. >---- >《경복궁 중건일기》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gnews.naver.net/l_2016081501001812600150601_99_20160814220805.jpg|width=100%]]}}} || || {{{#gold ''' 융복전, 회상전 자리에 일제가 만든 방공호 '''}}} || 그리고 [[태평양 전쟁]] 당시 경성 중앙 전신국의 [[피폭]]에 [[대비]]하여, 중요 [[통신]] 유지를 위해 [[콘크리트]]로 만든 [[방공호]]를 옛 융복전과 회상전 [[자리]]에 만들었다. [[8.15 해방|독립]] 이후 2000년대에 철거하고 융복전과 회상전을 [[복원]]하려 했지만, [[화폐|비용]]이 만만치 않아서 그대로 냅둔 채 현재에 이른다. == 구조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서궐도 내전1.png|width=100%]]}}} || || {{{#gold ''' 〈서궐도안〉을 채색한 〈서궐도〉 내전 영역. 주황색 원이 융복전, 보라색 원이 회상전, 초록색 원이 집경당이다. '''}}} || 융복전의 옛 모습을 보려면 〈서궐도안〉과 《서궐영건도감의궤》(이후 편의상 의궤로 부름)를 보아야 하는데 서로 묘사한 외관이 약간 다르다. 〈서궐도안〉에는 정면 5칸에 측면 3칸으로 되어있지만, 《[[의궤]]》를 보면 정면이 6칸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경희궁]] 내전 [[건물]] 대부분이 1829년(순조 29년)에 소실되고 다시 지은 것으로, 〈서궐도안〉은 화재 이전, 《의궤》와 사진은 그 이후의 모습이 담겨있는 것이라 중건할 때 [[건물]]의 형태가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의궤》와 사진을 보면 정면 가운데 2칸은 [[마루|툇마루]]가 밖으로 돌출되게 하고 분합문을 달아 출입할 수 있게 했는데 〈서궐도안〉에는 돌출된 툇마루가 없고, 서쪽 가장자리 칸과 가운데 칸, 그리고 그 바로 동쪽 옆 칸으로 출입할 수 있게 만들었다. 〈서궐도안〉에 따르면 겉면의 [[창문|창]]은 (남쪽에서 바라볼 때) 왼쪽에서 2번째와 동쪽 면 제일 끝 칸에 두었고, 문선과 중방 사이에 [[창문]]을 내고 나머지 부분은 [[벽]]으로 막았으나 《의궤》에는 머름 위에 전면창호를 단 모습으로 나온다.[br][br]공통적인 부분은, 1층[* 보통 [[한옥]]의 경우 단층(單層)이라 표현한다.]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에다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각 기둥을 세운 뒤, 쇠서[* [[소]] [[혀]] 모양의 부재.] 2개를 둔 이익공 [[공포]]에 겹처마 [[양식]]으로 짓고, [[기둥]] 사이에는 장화반을 놓아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궁궐]] 침전 [[건물]]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또 [[건물]] 앞면엔 [[암석|돌]] [[기둥]]을 세운 뒤 그 위에 폭이 좁은 돌판을 얹어 마치 [[누각]]처럼 보이게 했다. 넓은 월대를 정면에서 약간 서쪽으로 틀은 다음 놓아 침전의 위엄을 살림과 동시에 [[행사]]가 있을 때, 보다 [[공간]]을 넓게 활용할 수 있게 했다. [[계단]]은 월대의 동, 서, 남쪽에 각각 1개씩, 그리고 건물 정면의 동쪽 끄트머리에 5단의 계단을 하나 놓았다. * 주변 행각과 [[담|담장]]에 다섯 개의 [[문]]을 달아 융복전 영역으로 출입할 수 있게 했다. 동쪽은 금명문(金明門), 서쪽은 연경문(延慶門), 연경문의 서쪽에 청상문(淸商門), 그리고 남쪽은 일영문(日永門), 북쪽은 개경문(開慶門)이라 했다. * 〈서궐도안〉 및 《서궐영건도감의궤》를 보면 [[지붕]]이 다른 [[건물]]과 다르다. 바로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無樑閣)’ 형태인데, 융복전 뿐 아니라 다른 [[궁궐]]의 [[왕]]과 [[왕비]]의 정식 침전은 다 이렇게 되어있다. 이유로 여러 가지 [[가설]]이 있으며, 가장 유명한 것은 [[왕]]과 [[왕비]]의 침전의 경우 [[왕자|새로운 용]]이 만들어지기에 한 건물에 두 용이 있어선 안 되어서 만들지 않았다는 [[이야기]]이고, 또 다른 설은 당시 [[동아시아]] [[선진국|최선진국]]이었던 [[중국]]의 [[건축]] [[양식]]을 모방했으나 [[조선]]에 익숙하지 않은 양식을 모든 건물에 적용하긴 어려웠기 때문에[* 실제로 전통 가옥을 용마루 없이 지으면, 서까래를 고정하기 어려워 굉장히 힘들다고 한다.] '''가장 존귀한 왕과 왕비의 집에만''' [[선진]] [[건축]] [[기술]]을 적용했다는 설이다. 사실 용마루와 용과 관련 된 [[전통]] [[기록]]은 하나도 없으며, 당장 [[중국]]만 가도 [[자금성]]의 [[황제]]와 [[황후]] 침전엔 용마루가 있고, 일반 [[서민]] [[집|가옥]]들에 용마루가 없는 집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후자의 설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중국]] 문물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떨어진 [[대한제국]]기에 지은 [[덕수궁|경운궁]]의 침전 [[덕수궁 함녕전|함녕전]]은 용마루가 있다.[* 사실 함녕전은 [[경복궁]]의 침전 중 하나였던 만화당(萬和堂)을 옮겨 지은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황제]]의 침전인데 용마루를 그대로 냅둔 것을 봐서는 무량각에 그렇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게 맞는 것 같다.] == 부속 건물 == === 회장각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희궁 회장각 3D.png|width=100%]]}}} || || {{{#gold ''' CG로 재현한 회장각 '''}}} || {{{+1 慶熙宮 會臧閣}}} 융복전의 서쪽에 있던 부속 [[전각]]이다. [[회상전]] 영역과 이어져 있었으며 평면은 ‘열 십(十)’ 자 형태였다. [[역사]]는 융복전과 같다. == 여담 == * 1720년([[숙종(조선)|숙종]] 46년)에 숙종이 이 곳에서 [[사망|승하]]했다. 숙종은 바로 옆 [[회상전]]에서 태어나 여기서 눈을 감았으니 [[경희궁]]에서 [[생애]]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 셈이다. * [[경종(조선)|경종]] 시절 《선원보략》[* [[조선]]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첩》을 간략하게 적은 [[책]].] 가운데 숙종의 어첩에서 '융복전'의 '전(殿)'이 '당(堂)'으로 잘못 적혔으므로 먼저 고치고 [[영조|세제궁]]에 올린 책자도 내려주면 함께 고쳐서 들일 것을 교정청이 청한 일이 있었다.[[http://sjw.history.go.kr/id/SJW-E03100220-01500|#]]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경희궁 회상전, version=10, title2=경희궁, version2=314)] [[분류:경희궁]] [[분류:조선 시대의 없어진 건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