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고려 서경 황성(皇城) 내에 있던 궁궐, rd1=장락궁)] ---- [include(틀:경희궁)]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271호 경희궁}}}]]''' || ||<-3> {{{#ffd700 {{{+1 '''경희궁 장락전'''}}}[br]{{{-1 慶熙宮 長樂殿}}}}}}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한국관광연구원,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희궁길 {{{-1 (추정)}}} || ||<-2> {{{#ffd700 '''건축시기'''}}} || 창건시기 미상 / 철훼시기 미상 {{{-1 ([[1867년]] 이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서궐도 장락전.png|width=100%]]}}} || || {{{#gold ''' 〈서궐도안〉을 채색한 〈서궐도〉에서 보이는 장락전 영역 '''}}} || [목차] [clearfix] == 개요 == [[경희궁]]의 대비전(大妃殿)이다. 대비전은 [[궁궐]]의 동북쪽 영역에 두는 관례에 따라 장락전 역시 경희궁의 동북쪽에 있었으며 [[지형]] 특성 상 [[언덕]]에 놓였다.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위치는 지금의 한국관광연구원 바로 위에 있었다. '장락(長樂)'이란 '오랜(長) 즐거움(樂)'을 뜻한다. [[중국]]의 [[한나라]] [[고제(전한)|고조]]가 [[어머니]]의 [[궁]]을, 오랫동안 즐거우시라는 뜻을 담아 '장락궁(長樂宮)'이라 했다. 이후 '장락'은 [[대비]], [[태후]]나 그 궁을 가리키는 단어가 되었다. == 역사 == 창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궁궐지》에는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지냈던 곳으로 나와있다. 1693년([[숙종(조선)|숙종]] 19년) [[경희궁]]을 [[수리]]한 [[기록]]인 《경덕궁수리소의궤(慶德宮修理所儀軌)》[* [[경희궁]]의 원래 이름은 경덕궁이며, 1760년([[영조]] 36년) 경희궁으로 고쳤다.]에는 나타나지 않는데, 인조가 지냈다는 그 전각이 나중에 장락전으로 이름이 바뀐 것인지, 아니면 그 이후에 새로 건립된 것인지는 모른다.[[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장락전(長樂殿)|#]] 그러나 《[[영조실록]]》의 [[http://sillok.history.go.kr/id/kua_14709030_001|이 기사]]에 1702년(숙종 28년)에 숙종의 세 번째 [[왕비]] [[인원왕후]]가 이 곳에서 가례를 올렸다고 언급할 것을 볼 때 1693년에서 1702년 사이에 장락전이란 이름의 건물이 생긴 것은 분명하다. [[영조]]는 [[인원왕후]]의 흔적이 서린 이곳에서 인원왕후를 많이 그리워했던 듯 하다. 비록 7살 밖에 차이나지 않는 [[계모]]이지만,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데에 큰 도움을 준 [[은인]]이기 때문이었다. 1762년(영조 38년)에는 [[꿈]]에서 이미 승하한 인원왕후[* 원문에는 ‘자성(慈聖)’으로 적혀있다. 자성은 [[대비]]를 일컫는 말이다.]를 뵈어 이를 기록해 장락전에 부쳤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3804030_002|#]] 또한 1767년(영조 43년) 9월에는 인원왕후의 [[생일]]을 맞아 인원왕후를 모셨던 [[상궁]]과 [[내시]]들에게 [[비단]]과 목면을 하사했으며 [[경종(조선)|경종]] 시절의 내시들에게는 [[쌀]]과 [[삼베|베]]를 지급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4309029_003|#]] 이후 [[간택]] [[장소]]로도 사용했다. 1819년(순조 19년)에는 [[효명세자]]의 [[태자비|세자빈]]을 여기서 간택했다. 이 때 간택된 세자빈이 바로 [[헌종(조선)|헌종]]의 어머니이자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양어머니인 [[신정왕후 조씨|신정왕후(조 대비)]]이다. 또한 1844년(헌종 10년)에 헌종의 계비 [[효정왕후]]도 이곳에서 간택했다. [[경희궁]] 주요 영역이 1829년([[순조]] 29년)에 대부분 불탔지만 곧 재건했는데 이 때 복구 내역을 기록한 《서궐영건도감의궤(西闕營建都監儀軌)》에 장락전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 무사했던 듯 하다. 1834년([[헌종(조선)|헌종]] 즉위년)에는 승하한 [[순조]]의 빈전이 되었고[[http://sillok.history.go.kr/id/kwa_13411013_014|#]], 1836년(헌종 2년) [[종묘]]를 넓혀지을 때 역대 [[임금]]과 [[왕비]]의 [[신주]]를 이 곳과 [[경희궁 광명전|광명전]]에 나누어 모셨다.[[http://sillok.history.go.kr/id/kxa_10201010_001|#]] [[고종(대한제국)|고종]] 시기 [[경복궁]]을 중건할 때 [[경희궁]]의 [[건물]]들을 헐어다 자재로 쓰면서 사라졌다. 다만 1867년(고종 4년)에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신정왕후]]의 60세 [[생일|탄신]] 기념 의식을 치루었다는 [[기록]]을 보아[[http://sillok.history.go.kr/id/kza_10401015_001|#]] 행사를 끝낸 직후에 철거한 듯 하다. 장락전을 고종 때 헐었다는 근거는 다음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 서궐(경희궁) 내에는 [[경희궁 숭정전|숭정전]], [[경희궁 회상전|회상전]], 정심합(正心閤), 사현합(思賢閤), [[경희궁 흥정당|흥정당]]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헐었다.''' 목재를 가져오니 다수가 썩었다. 이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서 (경복궁의) 나인간(內人間)과 각사의 건조에 사용했다. >---- >《경복궁 중건일기》 == 구조 == ※ 현재 없는 건물이기 때문에 〈서궐도안〉과 [[http://www.cgcm.go.kr/GHP_HOME/jsp/MM00/mainController.jsp|경희궁 홈페이지]]에서 재현한 [[이미지]]를 토대로 추정했다. ※ 사실 '''현재 이 건물의 형태에 관해서는 학자와 연구가들마다 의견이 조금씩 다르다.''' '''〈서궐도안〉에서는 지붕이 이어져있는 것처럼 그려놓았고, 복도와 행랑이 이어져있는 것 처럼 표현했기 때문.''' 정확한 조사는 발굴 조사와 사진이 남아있어야지 가능한데, 현재 장락전이 있던 자리는 주택과 아파트가 들어섰기 때문에 답이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후술할 건물 구조에 관한 문장은 간략한 설명을 위해 편의상 '~이다.'로 적혀있는 것일 뿐,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남은 자료를 토대로 한 추측 임을 감안해야 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서궐도 장락전.png|width=100%]]}}} || || {{{#gold ''' 〈서궐도안〉을 채색한 〈서궐도〉의 장락전 영역 '''}}} || * 평면이 ‘┏┓’ 자 형태이며 가운데 ‘一’자 형 1층 [[건물]]은 장락전 본채이고 본채 양 옆에 있는 건물이 장락전에 딸린 2층 [[누각]]이다. 좌측 누각의 2층은 용비루(龍飛樓)이며 1층은 경의헌(敬義軒)이다. 우측 누각의 2층은 봉상루(鳳翔樓)이며 1층은 백상헌(百祥軒)이다. 용비루와 봉상루 사이에 5칸 짜리 행각과 출입문 1칸을 두어 외부에서 장락전을 바로 볼 수 없게 했다. 마당에는 네모난 [[연못]]을 두어 운치있게 했다. * 장락전 영역, 즉, 장락전과 용비루, 봉상루는 모두 5단으로 높게 쌓은 [[기단]] 위에 올려 있다. 정면에 [[암석|돌]] [[계단]]이 3세트를 두었고, 양 측면에는 하나씩 놓았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희궁 장락전.png|width=100%]]}}} || || {{{#gold ''' CG로 재현한 장락전[[http://www.cgcm.go.kr/GHP_HOME/jsp/MM03/gh030302VIEW.jsp?ryno=25|#]] '''}}} || 장락전 본채는 정면 9칸, 측면 5칸의 총 45칸 규모로 동, 서, 남 쪽의 가장자리 칸의 외벽엔 [[창문]], [[벽]], [[문]]을 두지 않고 툇마루를 개방시켜 실질적인 실내 [[공간]]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총 28칸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에 [[처마]]는 겹처마, [[공포]]는 이익공 양식으로 공포 사이마다 장화반을 놓고 화반 사이마다 벽으로 마감했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상바름을 하고 [[용두]]와 취두, [[잡상]]을 올렸다. * 윗 단락에서 말했지만, 장락전 영역 자체가 이미 높은 [[기단]] 위에 위치했는데 거기에다 장락전 본채는 따로 기단을 또 두어 굉장히 높게 지었다. 양 옆에 있는 2층 [[누각]]인 용비루와 봉상루와 높이를 맞추기 위해서인 듯 하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봉상루.png|width=100%]]}}} || || {{{#gold ''' CG로 재현한 봉상루.[[http://www.cgcm.go.kr/GHP_HOME/jsp/MM03/gh030302VIEW.jsp?ryno=28|#]] 용비루도 같은 형태이다. '''}}} || 용비루와 봉상루는 똑같은 모습이다. [[지붕]]과 [[처마]], [[공포]]와 화반의 구조는 장락전과 같으나 이 두 [[누각]]은 화반 사이가 [[벽]]으로 막혀있지 않고 비어있는 것이 다르다. 정면 6칸, 측면 6칸의 총 36칸으로 동, 서, 남쪽 둘레에 밖으로 개방시킨 [[마루]]를 둘렀기에 실질적인 실내 구조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총 20칸이다. 각 [[기둥]] 하단부에는 [[닭다리]] 모양의 난간인 계자각(鷄子脚)을 세웠다.[[http://www.cgcm.go.kr/GHP_HOME/jsp/MM03/gh030302VIEW.jsp?ryno=26|#]] 1층 기단부에 [[아궁이]]가 있는 것을 보아 [[온돌]]도 설치되었던 듯 하다. [[분류:경희궁]][[분류:조선 시대의 없어진 건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