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경희궁)]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271호 경희궁}}}]]''' || ||<-3> {{{#ffd700 {{{+1 '''경희궁 태령전'''}}}[br]{{{-1 慶熙宮 泰寧殿}}}}}}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경희궁 태령전,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45 ([[신문로2가]]) || ||<-2> {{{#ffd700 '''건축시기'''}}} || [[1744년]] 이전 추정 {{{-1 (창건)}}} / [[2001년]] {{{-1 (복원)}}}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hyulimbook.co.kr/%ED%83%9C%EB%A0%B9%EC%A0%84(%EC%97%AC%ED%96%89%ED%8E%B8%EC%A7%80).jpg|width=100%]]}}} || || {{{#gold '''태령전'''}}} || [목차] [clearfix] == 개요 == [[경희궁]]에 있는 [[어진]] 봉안소[* 奉安所. 보관하고 모시는 곳.], 즉 진전(眞殿)이다. [[경희궁 자정전|자정전]]의 서쪽에 있다. [[정조(조선)|정조]]는 《경희궁지》에서 태령전을 “자정전 서쪽에 있으며 임금님의 [[어진]]을 봉안하는 곳이다.”라고 소개했다. == 이름 == '태령(泰寧)' 뜻은 '넉넉하고(泰) 편안하다(寧)'이다. 현재의 [[현판]]은 2001년 [[복원]]할 때 [[한석봉|석봉 한호]]의 [[글씨]]를 모아 만들었다.[* 이것을 집자(集字)라고 한다.] '태'''녕'''전'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寧]]'의 원래 발음이 '녕'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태'''녕'''전'이 맞다. 하지만 예전부터 '寧'의 앞 글자가 받침이 없는 경우 [[활음조 현상]]으로 인해 '령'으로 읽고 썼기 때문에[* 대표적인 예로, [[인명]]으로는 [[무령왕]](武寧王), [[효령대군]](孝寧大君), [[이어령]](李御寧) 등을, 이외에는 [[보령군]](保寧郡), [[고령가야]](古寧伽倻)를 들 수 있다. 자세한 것은 '[[寧]]' 항목 참조.] 이를 반영한 태'''령'''전으로 부르는 게 적절하다. 이 문서명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표기인 경희궁 태령전이지만, [[태녕전]]으로 [[검색]]해도 들어올 수 있게 했다. == 역사 == 원래 이 일대에는 상례 공간이었던 읍화당(挹和堂)이란 건물이 있었다. 읍화당은 1731년(영조 7년)까지 기록에서 존재가 확인되나[[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9D%8D%ED%99%94%EB%8B%B9(%E6%8C%B9%E5%92%8C%E5%A0%82)|#]] 그 이후 역사에 대한 자료는 찾아볼 수 없다. 태령전이 기록에서 처음 보이는 것은 [[http://sillok.history.go.kr/id/kua_12008020_002|1744년(영조 20년) 8월 20일 자 《영조실록》 기사]]이다. 저 때 중수했다는 내용인데, 이로 미루었을 때 읍화당을 고쳐짓고 태령전으로 이름을 바꾸었을 가능성이 크다. [[영조]]는 평생에 걸쳐 총 13점의 [[어진|초상화]]를 남겼는데, 그 중 7점을 태령전에 봉안했다.[[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태령전(泰寧殿)|#]] 1776년([[영조]] 52년) 영조가 [[죽음|승하]]하자 [[정조(조선)|정조]]는 태령전과 그 일대를 영조의 [[장례]][[공간]]으로 활용했다. 우선 혼전을 이곳에 두었고[[http://sillok.history.go.kr/id/kva_10003011_004|#]][* 이 때 태령전에 보관 중이던 [[어진]]을 임시로 태령전 서쪽에 있는 [[경희궁 위선당|위선당]]이란 곳에 옮겨 모셨다. 이후 [[어진]]은 [[경희궁 경현당|경현당]]을 거쳐[[http://sillok.history.go.kr/id/kva_10004017_001|#]] [[창덕궁 선원전]]으로 옮겨갔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0311025_001|#]]] 태령전 근처에 재실 도수연을 세웠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0005015_002|#]], 또한 정조 자신이 머물 여막을 태령전 남쪽 행각에 두었고[[http://sillok.history.go.kr/id/kva_10003013_002|#]] 인산 날 여기서 망곡례를 행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0007027_002|#]] 1786년([[정조(조선)|정조]] 10년)에는 사망한 [[문효세자]]의 혼궁[* 왕이 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혼'전(殿)'으로 부르지 못하고 혼궁이라 했다.]을 이 곳에 두고 일종의 [[위령제]]인 재우제(再虞祭)[* 시신을 무덤에 안장한 후 신주를 만들어 혼령을 안정시키는 제사를 우제(虞祭)라고 한다. 제우제는 하관(下棺) 후 두 번째로 지내는 우제이다.]를 지냈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1007120_001|#]] 1836년([[헌종(조선)|헌종]] 2년)에는 [[종묘]]의 영녕전을 증축공사하면서, 잠시 제1실 ~ 제8실에 있던 [[신주]]의 일부를 모시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http://sjw.history.go.kr/id/SJW-I02010130-00500|#]] 이후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고종(대한제국)|고종]] 시기 [[경복궁]]을 중건할 때 [[경희궁]]의 [[건물]]들을 헐어다 자재로 쓰면서 사라졌다. 근거는 다음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 서궐(경희궁) 내에는 [[경희궁 숭정전|숭정전]], [[경희궁 회상전|회상전]], 정심합(正心閤), 사현합(思賢閤), [[경희궁 흥정당|흥정당]]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헐었다.''' 목재를 가져오니 다수가 썩었다. 이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서 (경복궁의) 나인간(內人間)과 각사의 건조에 사용했다. >---- >《경복궁 중건일기》 [[일제강점기]] 이후 태령전 자리에 경성중학교[* 현재 [[마포구]] [[연남동]]에 있는 경성중학교와는 전혀 다르다. 그 곳은 1967년 개교했으며 한자가 ''''景''''城으로 다르다.]가 들어섰고 해방 후에는 [[서울고등학교]]로 바뀌었다. 1980년대에 서울고등학교가 지금의 [[서초구]] [[효령로]]로 이사간 후 [[서울특별시]]와 [[문화재청]]에서 2001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 구조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서궐도 태령전.png|width=100%]]}}} || || {{{#gold '''《서궐도안》을 채색한 《서궐도》의 태령전'''}}} || [[산]] 자락에 자리잡은 지형의 특성 상, [[기단]]을 두 단으로 쌓았다. 아랫 단은 장대석을 세 벌 쌓았고 윗 단은 두 벌을 쌓았다. [[계단]]은 정면에 윗 단 3벌, 아랫 단 3벌을 합쳐 총 6벌이 놓여있고, 측면에는 윗 단 1벌, 아랫 단 1벌을 합쳐 총 2벌이 놓여있다. *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이다. [[공포(동음이의어)#s-2|공포]]는 이익공 양식으로 되어있으며 공포 사이마다 화반을 두고 틈새를 [[벽]]으로 막았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상바름을 하고 그 위에 취두와 [[용두]], [[잡상]]을 올렸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태령전 뒷면.png|width=100%]]}}} || || {{{#gold '''태령전 뒷면'''}}} || 3면이 전부 띠살 창호로 된 [[문]]으로 되어 있다. 문 위엔 교창을 두었다. 뒷면의 경우만 다른데 양 끝 가장자리 칸은 문을 달았으나 가운데 3칸에는 중인방을 두고 그 위, 아래를 [[벽]]으로 마감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태령전 내부.png|width=100%]]}}} || || {{{#gold '''태령전 내부'''}}} || 정면 5칸, 측면 2칸의 총 10칸으로 실내는 전부 뚫려 한 공간으로 쓸 수 있게 했다. [[영조]]의 진전이었던 점을 반영하여 2001년 [[복원]]한 후 이 곳에 영조 [[어진]]의 모사본[* 摹寫本. 베껴 그린 그림.]을 전시 중이다. 훼손을 막기 위해 사방을 [[유리]]로 막았다. == 여담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희궁 서암.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서암의 샘.png|width=100%]]}}} || || {{{#gold ''' 태령전 뒤에 있는 서암 '''}}} |||| {{{#gold ''' 서암의 샘 '''}}} || 태령전 뒤에 큰 [[바위]]가 있다. [[정조(조선)|정조]]가 지은 《경희궁지》에는 “태령전 뒤에는 암천(巖泉, [[바위]] [[샘]])의 좋은 경치가 있다.” 고 적혀있는데 바로 그 바위이다. [[경희궁]]이 창건되기 훨씬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이름은 [[경희궁 서암|서암(瑞巖)]]이다. 원래 이름은 [[왕]]의 [[기|기운]]이 서려 있다는 뜻의 왕암(王巖)이었다. [[광해군]]이 [[경희궁]]을 짓게 한 새문동[* [[경희궁]] 일대가 돈의문(서대문) 바로 안쪽에 위치한다. 돈의문의 별칭이 새문이었기에 그 부근을 새문동이라 불렀다. 자세한 것은 [[돈의문]] 항목 참조.] 왕기설의 근원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 그래서 [[경희궁|새 궁궐]] 짓는다며 원래 이 자리에 있던 [[정원대원군|정원군]]([[광해군]]의 [[이복형제|이복 동생]])의 [[집]]을 빼앗았고, 정원군은 [[화병]]으로 사망했다. 나중에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로 즉위하면서 뺏긴 집을 도로 다시 찾은 모양새가 되었다.] 지금 이름인 서암은 [[숙종(조선)|숙종]]이 상서로운 기운이 서린 곳이라는 의미를 담아 지은 것이다. 자세한 것은 [[경희궁 서암|서암]] 문서 참조.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경희궁, version=321, paragraph=5)] [[분류:경희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