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계경찬}}}'''[br]'''桂景燦'''}}}}}} || || '''창씨명''' ||케이탄 케이산(桂丹景燦) || || '''족보명''' ||계인찬(桂仁燦) || || '''이명''' ||계추림(桂秋林)[* 중국에서 활동할 당시 사용한 가명이다.], 계선화(桂善化) || || '''본관''' ||[[수안 계씨]][* 대목파 20세 찬(燦) 항렬.] || ||<|2> '''출생''' ||[[1912년]][* 수안계씨족보 상권 대목파 890쪽에는 1913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2월 17일]] || ||[[평안북도]] [[선천군]] 군산면 대목리[br](현 평안북도 선천군 장공리) || || '''사망''' ||미상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2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계경찬은 1912년 2월 17일 평안북도 선천군 군산면 대목리(현 선천군 장공리)에서 독립유공자인 아버지 [[계창림]]과 어머니 [[평산 신씨]](1896 ~ ?) 신형규(申亨奎)의 딸 사이의 1남 1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 만주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하다가 1933년 4월 [[만주국]] [[봉천성]] 관전현(寬甸縣) 제3구(第三區) 우모오촌(牛毛塢村)[* 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단둥시]] 콴뎬만주족자치현(寬甸滿族自治縣) 니우마오우진(牛毛塢鎭).]에 거주하면서 [[조선혁명군]]에 가입하였으며, 참사(參士)로서 관전현과 환인현(桓仁縣)[* 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번시시]] 환런만주족자치현(桓仁滿族自治縣).] 두 현을 넘나들면서 독립운동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했다. 그 해 8월 27일[* 음력 7월 7일.] 밤에는 전에 조선혁명군의 총기를 탈취했다가 근래 항일 반만군(反滿軍)으로 전향한 관전현 이차성구(裡岔城溝)[* 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단둥시 콴뎬만주족자치현 리바차구(裡八岔溝).]의 중국인 12명을 습격하여 [[러시아]]식 장총 9정과 탄환 150발, [[아편]] 등을 빼앗고 이틀간 인질로 잡아 300원을 모금하였다.[[http://db.history.go.kr/id/npda_1936_06_12_x0002_1610|#]] 1934년 9월 23일[* 음력 8월 15일.]에는 무기 탈취를 위해 만주국 경찰관이 탄 자동차 3대를 습격하였으나 곧 경찰의 지원대가 뒤따르자 도주하여 몸을 숨겼다. 그러나 결국 1936년 5월 체포되었으며, 그 해 6월 15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강도죄|강도]] 및 [[살인미수]] 혐의로 징역 5년을 [[http://db.history.go.kr/id/su_011_1936_06_10_0560|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202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수안 계씨]][[분류:선천군 출신 인물]][[분류:1912년 출생]][[분류:몰년 미상]][[분류:독립유공자 후손]][[분류:희귀성씨인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