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고광돈.png|width=80%]] || 1940년 9월 3일, 춘천농업학교 독서회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될 당시 촬영된 사진 || ||<-2> [[파일:고광돈.jpg|width=300px]] || || 성명 ||고광돈(高光敦) || || 본관 ||[[고(성씨)|장흥 고씨]][* 22세 광(光) 항렬] || || 생몰 ||[[1919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ia_0215_0148|1942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출생일이 1920년 5월 20일로 기재되어 있다.] ~ [[2009년]] [[11월 23일]] || || [[출생지]]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봉양리[* [[고(성씨)|장흥 고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고웅주]]도 이 마을 출신이다.] || || 사망지 ||[[서울특별시]] || ||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 생애 == 고광돈은 1919년 3월 19일 강원도 정선군 정선면(현 정선읍) 봉양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8년 9월 하순경 [[소양고등학교|춘천농업학교]]에 재학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실현할 목적으로 비밀결사 독서회(讀書會)에 가입하여 1940년 3월 졸업 때까지 농촌의 계몽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활동했다. 졸업 후에는 [[함경북도]] [[무산군|무산]]영림서(營林署)에 임업수(林業手)로 취직하여 근무하면서도 독서회 활동을 지속했다. 그러나 1940년 12월 10일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1942년 10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다가 [[8.15 해방]]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고, 서울로 상경하여 평범하게 살다가 2009년 11월 23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고광돈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2009년 11월 25일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장흥 고씨]][[분류:정선군 출신 인물]][[분류:1919년 출생]][[분류:2009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분류:소양고등학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