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고구려의 대외전쟁)] ||<-4> {{{#000 {{{+1 '''고구려-신 전쟁'''}}}[br]高句麗-新 戰爭 | Goguryeo–Xin War}}} || || '''{{{#000 기간}}}''' ||<-3> '''1차''' [[12년]][br]'''2차''' [[14년]] [[8월]] || || '''{{{#000 장소}}}''' ||<-3> [[고구려]], 양맥, [[현도군]] 고구려현 || || '''{{{#000 원인}}}''' ||<-3> [[신나라]]에 의해 징발된 [[고구려]]계 병력의 저항[br]요서대윤 전담(田譚)의 사망 || || '''{{{#000 교전국}}}''' ||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1px 1px; border-radius: 0px; margin-right: 3px; background: #FF8C00; font-size: .8em" {{{#ffffff '''新'''}}}}}} [[신나라]] || [[파일:고구려 군기.svg|width=23]] [[고구려]] || [[고구려현]][br][[양맥]] || || '''{{{#000 지휘관}}}'''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1px 1px; border-radius: 0px; margin-right: 3px; background: #FF8C00; font-size: .8em" {{{#ffffff '''新'''}}}}}} '''[[왕망]]'''[br]{{{#!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1px 1px; border-radius: 0px; margin-right: 3px; background: #FF8C00; font-size: .8em" {{{#ffffff '''新'''}}}}}} 전담 †[br]{{{#!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1px 1px; border-radius: 0px; margin-right: 3px; background: #FF8C00; font-size: .8em" {{{#ffffff '''新'''}}}}}} 장우 ||<^|1>[[파일:고구려 군기.svg|width=23]] '''[[유리명왕]]'''[br][[파일:고구려 군기.svg|width=23]] [[연비#s-4.1]] †[br][[파일:고구려 군기.svg|width=23]] [[구려후 추]] †[br][[파일:고구려 군기.svg|width=23]] [[오이(고구려)|오이]][br][[파일:고구려 군기.svg|width=23]] [[마리(고구려)|마리]] || 지휘관 불명 || ||<|5> '''{{{#000 병력}}}''' || ||<-3> '''1차 전쟁 (12)''' || || 병력 불명 || 병력 불명 || 병력 불명 || ||<-3> '''2차 전쟁 (14)''' || || 병력 불명 || 약 20,000여명 || 병력 불명 || || '''{{{#000 결과}}}''' ||<-3> 고구려가 [[고구려현]]과 [[양맥]] 차지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구려]]와 [[중국]] [[신나라|신(新)]] 사이에 벌어졌던 [[전쟁]]. 신나라는 전한과 후한 사이에서 잠깐 활약하던 단명 제국(A.D. 8~23)으로 일반적인 역사 구분에는 역대 제국에 포함되지 않지만 기록상 12년과 14년에 분명히 존재하는 전쟁이 있었다. == 상황 == 이때 중국은 [[왕망]](王莽)의 [[신나라]]였다. 그가 교묘한 권모술수로 황위 찬탈에는 성공하지만 그가 펼치려고 했던 정치는 현실과 괴리감이 컸고, 정권 초부터 왕망이 죽을 때까지 내전 및 군사반란, 대규모 흉노 원정, 그리고 고구려와의 전쟁 등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고구려는 당시 개국초창기였고, 부여와의 전쟁이 끊이질 않는 상황이었다. [[유리명왕]]이 집권하고 있던 시기이도 하였다. 이 당시 고구려와 신나라간에 외교 관계는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지금 있던 역사서 내용을 그대로 써도 그 양이 충분하지가 않다. 전쟁 규모도 국지전 규모가 아니라 현(縣)급 규모로 보인다. 후에 뒤에 발발하게 되는 전근대시대까지 세계 최대 규모의 전쟁 규모, 스케일을 자랑하던 [[고구려-수 전쟁]]과 [[고구려-당 전쟁]]과는 아예 스케일을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인 셈이다. == 1차 전쟁 (A.D. 12년) == > 三十一年漢, 王莽發我兵伐胡. 吾人不欲行, 強迫遣之, 皆亡出塞, 因犯法爲冦. 遼西大尹田譚追擊之, 爲所殺, 州郡歸咎於我. 嚴尤奏言, “貊人犯法, 冝令州郡, 且慰安之. 今猥被以大罪, 恐其遂叛. 扶餘之屬, 必有和者, 匈奴未克, 扶餘·獩貊復起, 此大憂也.” 王莽不聽, 詔尤擊之. 尤誘我將延丕靳校勘. > > 31년(12) 한의 왕망(王莽) 이 우리의 병력을 징발하여 오랑캐(胡)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려고 하지 않자 강제로 보내니 모두 도망하여 새외(塞外)로 나갔고, 이 때문에 법을 어겨 도적이 되었다. 요서(遼西) 대윤(大尹)[* 태수의 신나라 이름.] 전담(田譚)이 이를 추격하다가 죽임을 당하니 주군(州郡)이 허물을 우리에게 돌렸다. 엄우(嚴尤)가 황제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맥인(貊人)이 법을 어겼으나 마땅히 주군으로 하여금 저들을 위로하여 안심하게 하여야 합니다. 지금 큰 죄를 그들에게 씌우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됩니다. [반란을 일으키면] 부여의 족속 중에 따르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흉노를 아직 이기지 못하였는데, 부여와 예맥(獩貊)이 다시 일어나면 이는 큰 근심거리입니다.” 하였다. 왕망이 듣지 않고 엄우에게 명하여 이를 공격하였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하여 목을 베어 머리를 수도로 보냈다. ^^''양한서(兩漢書) 와 남북사(南北史)는 모두 “[[구려후 추|구려후(句麗侯) 추(騶)]]를 유인하여 목을 베었다.”고 하였다.''^^ 왕망이 이를 기뻐하고 우리 왕 이름을 고쳐 하구려후(下句麗侯)라 하고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였다. 이에 한(漢)의 변방 지역을 침범함이 더욱 심하여졌다. >---- >'''《삼국사기》권제13 고구려본기 제1, 유리명왕 31년''' 왕망이 오랑캐를 정벌하기 위해 [[고구려]]에 병력을 내놓으라고 이야기 하자, 고구려 조정에서는 결국 병력을 강제 징발해서 보냈다. 하지만 징발된 고구려인들은 이를 거부하고 도적이 되어 버렸고, 오히려 [[현도군]](玄菟郡)의 변경을 습격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이 고구려인 도적 무리를 토벌하기 위해 출정한 신나라의 요서대윤인 전담이 죽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자, 이에 분노한 신의 황제 왕망은 장우(莊尤)[* 위의 엄우(嚴尤)는 후한 [[명제(후한)|명제]]의 휘인 장(莊)을 쓰기를 꺼려([[피휘]]) 글자를 바꾼 것이다.]에게 병력을 주어 고구려를 치게 한다. 이 명령에 장우는 "아직은 시기상조다."라고 반대했으나 결국 ~~황제가 빡빡 우기자~~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게 된다. 전투 상황은 상세히 묘사되지 않았으나 장우가 이끄는 신나라 군은 맞서 싸우러 온 연비(延丕)가 이끄는 고구려군과 맞붙었는데 여기서 고구려군이 신나라 군의 유인책에 걸려들어 연비가 전사하며 참패하게 되어 신이 승리를 했고, 장우는 전사한 연비의 머리를 잘라 수도로 보냈다. 왕망은 이 정보에 몹시 기뻐하며 고구려를 하구려후(下句麗[[侯]])로 포고하고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깎아내렸다. 본인의 정치도 어려운데 주변국 관계도 엉망으로 만들었으니 왕망이 오래갈 리 없었다. 23년 신나라는 사라지고 ~~왕망은 끔살되었으며~~ 16년만에 다시 한 왕조로 교체가 되었다. 그 후 32년 12월 후한 광무제 유수가 고구려의 왕호를 원래대로 회복하였다.[* 고구려와 후한이 외교적 관계를 맺었다고 해석해 볼수있다.] === 추측 === 인물에 대한 추론을 하면 연비(延丕)는 연타발(延陀勃)과 성씨가 같아 [[소서노]] 일파로 보는 추측이 있으며, [[구려후 추]]는 [[주몽]](추모), [[구추]], 혹은 [[유리명왕]]일거라 보는 견해가 있다. 추(騶)라는 이름은 한서 왕망전에 의거한 것인데, 중국측 역사서 삼국지 고구려전에서는 '도(騊)'라 하였다.[* 騶, 騊, 鄒 다양한 글자가 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구려후 추]] 문서 참고. 그리고 이 부분은 김부식이 삼국사기의 역사서를 만들 때 중국계 역사서의 기사와 국내 역사서를 조합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한서 왕망전을, 인물 이름은 현대에는 전해지지 않는 국내 역사서를 참고한듯 보인다. [[연비]]라는 이름은 중국계 역사서에서 보이지 않는 이름이다. == 2차 전쟁 (A.D. 14년 8월) == > 秋八月, 王命鳥校勘 伊·摩離, 領兵二萬, 西伐梁貊, 滅其國, 進兵襲取漢髙句麗縣 縣屬玄免校勘郡. >'''가을 8월에 왕이 오이(烏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정벌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군대를 내어 보내 한(漢)의 고구려현(高句麗縣) 을 습격하여 차지하였다.''' ^^''현은 현도군에 속한다.''^^ >---- >'''《[[삼국사기]]》권제13 고구려본기 제1, 유리명왕 33년''' 여기서 [[오이(고구려)|오이]]와 [[마리(고구려)|마리]]는 [[주몽]]을 같이 따라왔던 개국공신이 맞다. 개국공신이 50년이 지나 유리명왕까지 활약한걸로 미루어서 원로대신 중에서도 원로대신이다. 이때쯤이면 사실상 왕과 명칭만 다를 뿐 지위는 동등하거나 그 바로 아래급이라고 봐도 좋을 듯하다. 양맥(梁貊)은 중국과 관련된 건 아니고 고구려와 비슷한 맥족으로 보이며 그 위치는 사학자마다 다르게 보고 있다.[* 이후 양맥이라는 곳은 [[양맥 전투|고구려와 위나라의 전투]]의 무대가 된다.] 군대를 내어 보내 한(漢)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습격하여 차지하였다. 단편적인 기록으로 상황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한서지리지에 의하면 고구려현은 [[현도군]]의 영현 중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 관련 자료 == * 한국 측 사료 * [[삼국사기]] * 중국 측 사료 * [[한서]] 왕망전, 지리지 * [[방언(양웅)]] * [[후한서]] == 고구려의 대(對)중국 전쟁 목록 == * 고구려-신 전쟁 * [[비류수 전투|고구려]][[양맥 전투|-위 전쟁]] * [[좌원 전투|고구려-한 전쟁]] * [[고구려-수 전쟁]] * [[고구려-당 전쟁]] [[분류:고구려]][[분류:한국사/전투]][[분류:한중관계]][[분류:1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