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고려의 대외관계)] [include(틀:오키나와현의 관계)] [목차] == 개요 == [[고려]]와 [[류큐 왕국]]의 관계. == 역사 == [[고려]] 멸망 직전인 [[창왕]] 시기인 1389년 8월 츄잔왕(中山王) 삿토(察度)가 표문과 남방의 물산을 진헌하고, 왜구에게 사로잡혀간 류큐의 피로인을 송환하였다. 류큐가 고려에 접근한 것은 1371년 아유타야와 통교, 1372년 명에 입공한 것의 연장선으로 무역상의 이익을 얻고자 한 것이었다. 고려가 답례로 영접사로 파견함으로써, 양국관계가 시작된다. == 삼별초와 류큐? == 사학계에서는 삼별초의 거점이었던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군/행정|군내면]] 용장리 용상산에 존재했던 용장산성의 [[기와]]와 [[류큐 왕국]]에서 발견된 기와가 거의 일치한다는 점을 들어 삼별초의 잔여 세력이 [[오키나와]]로 건너가 류큐 왕국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지만, 아직까지 확실히 검증되진 않았다. [[http://www.hani.co.kr/section-021015000/2007/09/021015000200709060676065.html|관련기사]]. 아예 삼별초가 류큐왕국을 세웠다는 주장을 하는 경우도 있다지만, 중산세감(中山世鑑) 같은 류큐 역사서에는 관련 내용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고려기와의 존재로 인해 오키나와에 이주한 고려인들이 있었음이 증명되기는 하였다. 위의 내용이 KBS 역사추적으로 방영된 적도 있다. [[https://youtu.be/yTya5JcM1kA|KBS 역사추적 – 삼별초는 오키나와로 갔는가]]인데 용장산성 기와 외에도 오키나와 현지의 식습관, 제주도와 비슷한 돌담들, 삼별초가 일본에 보낸 구원요청, 연호 표시 유무, 류큐 왕국에 대한 미싱링크 등을 근거로 들어서 삼별초가 제주도에서 완전히 토벌된 것이 아니라 더 남쪽으로 가서 살았다는 주장을 편다. 몽골에 항복한 고려가 남은 삼별초를 잡아다 쳐죽이기위해 대대적인 수색을 했을 정도였으므로 이들에게는 항복 후 고려로 다시 돌아간다는 선택지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온 판단이라는 것이다. == 관련 문서 == * [[여일관계]] [[분류:고려]][[분류:전근대 한국의 외교]][[분류:류큐 왕국]][[분류:여일관계]][[분류:나무위키 외교 프로젝트]][[분류:오키나와의 외교]][[분류:나무위키 한국사 프로젝트]][[분류:과거의 외교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