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일본 덴노)]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F001F 0%, #bd0029 20%, #bd0029 80%, #AF001F)" {{{#dca600 '''고분 덴노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일본 태정대신)]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F001F 0%, #bd0029 20%, #bd0029 80%, #AF001F); color: #dca600" '''일본 제39대 천황[br]{{{+1 고분 덴노}}}[br]弘文天皇'''}}}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홍문천황릉.jpg|width=100%]]}}} || ||<-2> {{{#dca600 {{{-2 나가라노야마사키릉 전경}}} }}} || || '''출생''' ||[[648년]] || ||<|2> '''사망''' ||[[672년]] [[8월 21일]] (향년 24세) || ||[[왜국]] 오미노오오쓰노미야(近江大津宮)[br](現 [[일본]] [[시가현]] [[오츠시]]) || || '''능묘''' ||나가라노야마사키릉([ruby(長等山前陵, ruby=장등산전릉)]) || ||<|2> '''재위기간''' ||'''{{{#dca600 제39대 천황}}}''' || ||[[672년]] [[1월 9일]] ~ [[672년]] [[8월 21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휘''' ||이가([ruby(伊賀, ruby=이하)]) → 오오토모([ruby(大友, ruby=대우)]) || || '''부모''' ||부황 [[덴지 덴노]][br]모후 야카코노이라츠메 || || '''형제자매''' ||7남 12녀 중 장남 || || '''배우자''' ||토오치노 황녀, 후지와라노 미미모토지 || || '''자녀''' ||2남 1녀 || || '''관저''' ||오미노오오쓰노미야([ruby(近江大津宮, ruby=근강대진궁)]) || || '''작호''' ||오오토모 황자([ruby(大友皇子, ruby=대우황자)]) || || '''시호''' ||'''고분 덴노([ruby(弘文天皇, ruby=홍문천황)])'''[* [[고분 덴노#s-3|사후]] 문단 참고]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일본]]의 제39대 [[천황]]. [[덴지 덴노]]의 장남으로 휘는 오오토모(大友) 또는 이가(伊賀)였다. 그가 덴지 덴노 사후에 실제로 천황이 되었는지 아닌지는 분명치 않다. 확실한 건 당시 정식으로 즉위하지는 못했다는 것으로, 먼 훗날 [[메이지 덴노]]가 그에게 천황의 시호를 올린 뒤에는 일단 제39대 천황으로 인정되고 있다. == 덴지 덴노의 후계자 문제 == [[고교쿠 덴노|사이메이 덴노]]가 붕어한 뒤에 그녀의 장남 나카노오오에가 [[덴지 덴노]]가 되었다. 덴지 덴노는 천황이 되기 전에 동생인 오오아마 황자(훗날 [[덴무 덴노]])에게 황위를 계승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했고, 실제로 그를 황태자로 삼았다. 그러나 덴지 덴노는 아들인 오오토모를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태정대신]]으로 삼은 오오토모 황자를 후계자로 삼을 의향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결국 오오토모를 새로운 태자로 삼고 그 상태에서 붕어했다. 오오토모 황자가 정식으로 천황이 되려고 하자 오오아마 황자가 이에 불만을 품고 고대 일본사 최대의 내란이었던 '''[[임신의 난|진신(임신)의 난]]'''을 일으켰다. 그 결과 [[세키가하라]] 일대에서 양군은 수개월에 걸쳐 전쟁을 벌였다. 결국 오오아마군에게 크게 패배한 뒤, 오오토모는 그 다음날에 24살의 젊은 나이로 목을 메고 생을 마감했다. == 사후 == [[덴무 덴노]]는 >"저 놈이 천황이라면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라는 식으로 까면서 자결한 오오토모를 천황으로 인정하는 자에게 무자비한 형벌을 가했다. 이 여파가 어찌나 컸는지 오오토모는 [[메이지 덴노]] 때인 [[1870년]] [[8월 20일]] [[준닌 덴노]], [[주쿄 덴노]]와 함께 복위되어 '고분 덴노' 라는 시호를 받고 제39대 천황으로 공인 되었다. 즉 사후 천 년도 더 돼서야 시호를 받고 제39대 천황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래서 화풍 시호가 있던 시기의 천황임에도 준닌 덴노와 더불어 불구하고 화풍 시호가 없다[* 화풍 시호는 헤이안 시대때 없어진다. 사라진 지 오래된 메이지 덴노때 시호를 받았으니 화풍 시호는 받지 못했다.]. 고분 덴노는 역대 천황 중 '''유일하게''' 생전에 천황 대접을 아예(형식적으로나마 조차) 못받은 천황이었다[* [[스토쿠 덴노]]는 그나마 생전엔 천황으로서 대접을 받았고, [[준닌 덴노]]는 허수아비였지만 폐위하기 전까지만 해도 천황으로 대접을 못 받은 건 아니었다.]. 실제 천황이었던 시기가 있긴 했는지 불분명하지만[* 이 때문에 고분 덴노가 사실은 천황으로 추존된 것으로 보는 설이 있다.], 메이지 시대에 덴무 덴노 이전에 즉위한 천황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추존 천황은 아니다. 일본에서 거의 최초로 [[한시]]를 지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8세기 중엽에 편찬된 가장 오래된 일본 한시집인 《회풍조》에 오오토모 황자의 한시가 수록되어있다. == 가족관계 == * 황후皇后: 토오치노 황녀(十市皇女, 653?~678) - 덴무 천황(天武天皇, 631?~686)의 장녀 * 장남: 카도노노 왕(葛野王, 669?~705) * 비妃: 후지와라노 미미모토지(藤原耳面刀自) - 후지와라씨(藤原氏)의 시조인 [[후지와라노 카마타리]](藤原鎌足, 614~669)의 딸 * 딸: 이치시히메노 왕(壱志姫王) [각주] [[분류:천황]][[분류:648년 출생]][[분류:672년 사망]][[분류:일본의 자살한 인물]][[분류:태정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