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고려대학교 총장)] ---- || '''{{{#d7c9b1 고원훈의 역임 직책}}}'''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조선총독부 중추원)] ---- [include(틀:대한체육회 회장)] ---- [include(틀:대한축구협회 회장)]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641B27, #872434, #872434, #641B27);" '''[[틀:역대 고려대학교 총장|{{{#ffffff {{{#d7c9b1 제6대 보성전문학교 교장}}}}}}]][br]{{{#ffffff {{{+1 {{{#d7c9b1 고원훈}}}}}}[br]{{{#d7c9b1 高元勳}}}}}}'''}}}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고원훈_편집.jpg|width=100%]]}}} || || '''창씨명''' ||타카모토 쿤 (高元 勳) || || '''자 / 호''' ||형보 (亨甫) / 추인 (秋人) || || '''본관''' ||[[고(성씨)#s-1.1.3|개성 고씨]] (開城 高氏)[* 신전파(薪田派) 29세 훈(勳) 항렬.] || ||<|2> '''출생''' ||[[1881년]] [[3월 28일]] (음력 2월 29일) || ||[[경상도]] [[상주시|상주목]] 산남면 신전리[br](現 [[경상북도]] [[문경시]] [[산양면]] 신전리) || || '''사망''' ||[[1950년]] [[11월]] (향년 69세) || || '''학력''' ||[[메이지대학]] {{{-2 ([[법학과|법과]] / [[졸업]])}}} || || '''경력''' ||[[고려대학교|보성법률상업학교]] 교수[br][[조선총독부]] [[중추원(일제강점기)|중추원]] 주임참의[br][[전라북도지사]][br]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취체역|| [목차] [clearfix] == 개요 == [[일제강점기]]의 관료이며 기업인이다. 본관은 [[고(성씨)#s-1.1.3|개성]](開城)[* 신전파(薪田派) 29세 훈(勳) 항렬.], 자는 형보(亨甫), 호는 추인(秋人). == 생애 == 음력 1881년 2월 29일 [[경상도]] [[상주시|상주목]] 산남면 신전리(현 [[경상북도]] [[문경시]] [[산양면]] 신전리)[* 산양면 일대에 [[고(성씨)#s-1.1.3|개성 고씨]] 구성원들이 많이 집성한다. 독립유공자 [[고윤환(1845)|고윤환]]·고유훈 부자, [[고우진(정치인)|고우진]] 전 국회의원도 이 마을 출신이며, [[고병익]] 전 서울대학교 총장은 녹문리 출신이다.][[http://mgmaeil.com/detail.php?number=1963&thread=26|#]]에서 아버지 고윤경(高允㯳)과 어머니 [[광주 노씨]][* [[노수신]]의 후손으로, 노필경(盧必敬)의 딸이다.] 사이에서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0년 7월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과|법과]]를 졸업하고 1911년 8월 [[조선총독부]]의 경부(警部, 경찰의 계급)로 채용되었고, 1913년 보성법률상업학교로 옮겨 교수로 재직하다가 1920년 이 학교 교장이 되었다. 보성법률상업학교는 1921년 전문학교 인가를 받고 [[보성전문학교]]로 승격했고, 그는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전문학교 교장이 되었다. 한편, 1920년 7월 조선체육회의 초대 이사장으로 선출되었고, 1921년 같은 회의 회장이 되었다. 1924년 4월 조선총독부 [[중추원(일제강점기)|중추원]] 참의가 되었고, 도 참여관으로 관료의 길을 걸었다. 전라남도(1924년 12월), 경상북도(1926년), 평안남도(1929년), 경기도, 평안북도(1930년 4월)에서 참여관을 역임하고 1932년 9월에는 [[전라북도지사]]가 되었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는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 쉽게 말해 [[친일파]]. 1930년대 후반부터는 전쟁 지원에 적극 나서서 시국강연회에 참가하였다. 즉, 1937년 9월 경상북도 각지를 돌아다니며 [[내선일체]]와 황도(皇道) 실천을 주장하는 강연을 하였고, 1938년 7월 [[경기여자고등학교|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열린 총독부 후원의 시국대책강연회에서 '일본의 수호신이 되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였다. 또한, 1940년 10월에 결성된 국민총력조선동맹에서는 이사와 연성부(鍊成部) 연성위원 등의 직책을 맡았으며, 1941년 흥아보국단을 조직하여 상임위원이 되었는데, 이 단체의 결성식 때 좌장(座長)으로 선출되어 '출전장병의 노고에 감사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그리고,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년)에도 가담하고 1941년 8월 임전대책협의회를 조직하여 위원이 되었고, 1941년 10월 평양과 춘천에서 당시 결성예정에 있던 조선임전보국단의 사명을 해설하는 강연을 하였고, 이어 임전보국단을 결성하여 부단장이 되었다. 이즈음에 이른바 창씨개명을 권유하는 강연을 행하면서 자신도 성을 타카모토(高元), 이름을 쿤(勳)으로 고쳤다. 고원훈은 동광제사(東光製絲) 사장으로서 조선에서 손꼽히는 거부이기도 했다. 1944년 그는 일제의 침략전쟁에 사용할 비행기를 생산하기 위하여 김연수 등과 더불어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취체역이 되었다. 이 회사는 일제의 침략 전쟁에 동원될 비행기를 제작하는 기업이었다. 1945년 2월 대화동맹을 만들어 심의원이 되었고, 같은해 6월 대의당을 조직하여 위원직을 맡았다. 1950년 [[6.25 전쟁]] 중이던 7월 1일 납북되어 그해 11월경 [[자강도]] [[강계시]] 근처 산중에서 강행 중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분류:대한민국의 남성 기업인]][[분류:1881년 출생]][[분류:1950년 사망]][[분류:개성 고씨]][[분류:문경시 출신 인물]][[분류:납북자]][[분류:메이지대학 출신]][[분류:고려대학교 재직]][[분류:고려대학교 총장]][[분류:축구행정가]][[분류:대한체육회 회장]][[분류:대한축구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