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고조선의 대외 전쟁·분쟁)] ||<-3> {{{+1 '''고조선-연 전쟁[br]古朝鮮-燕 戰争'''}}} || || '''시기''' ||<-2>[[기원전 3세기]][* 보통 적어도 기원전 281년 이전에 일어났다고 본다.] || || '''장소''' ||<-2>요동 일대 || || '''원인''' ||<-2>[[고조선]]과 [[연(춘추전국시대)|연]]의 관계 악화 || || '''교전국''' ||[[고조선]] ||[[연(춘추전국시대)|연]] || || '''지휘관''' ||<^|1>[[조선왕 3세]] ||[[연소왕]][br][[진개]] || || '''병력'''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 || '''결과''' ||<-2>'''연의 대승''' || || '''영향''' ||<-2>고조선의 세력 약화 || [목차] [clearfix] == 개요 == [[기원전 4세기]] 후반 ~ [[기원전 3세기]] 초반 경 [[전국칠웅]] 중 하나인 [[연(춘추전국시대)|연나라]](燕)가 당시 인접 국가였던 [[고조선]]을 공격한 전쟁으로, 기록된 [[한국사]]상 최초의 국가 간의 전쟁이다. == 전쟁 == 기원전 281년 무렵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과 전쟁을 하고 승리해서 2000리 정도의 영토를 개척했다는 추측이 있는데, [[사기(역사책)|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281년에는 이미 연이 요동을 장악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사기의 기록에서 1년, 2년 차이나는 것 정도나 각 나라측의 기록에 따라 내용이 바뀌는 것은 흔한 일이긴 하다. [[사마천]]부터 [[분서갱유]]와 [[초한쟁패]]로 사료를 수집하는데 애먹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고로 연도의 경우 기원전 281년이 아니라 그 이전에 발발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추정해보자면 대략 기원전 300~282년 사이에 발발했다고 할 수 있다. 《동북아역사지도》에서는 진개의 활동시기를 기원전 281년이라 추측 하였는데([[http://nsimg.kbs.co.kr/data/news/2016/06/29/3303696_220.jpg|지도 사진]]), 지도 사업이 유사역사학자들의 농간으로 인해 폐기되는 바람에 비정 근거가 알려질 수 없었다. 다만 진개의 활약 시기를 기원전 300년에서 282년 사이의 시기로 추정하는 이유는 어느정도 일리가 있는데, 이러한 정황 증거들이 있기 때문이다. * [[형가]]의 진시황 암살시도로 알려진 형가의 동료, 진무양(秦舞陽)은 진개의 손자라고 한다. 그리고 진무양은 이때 형가가 진시황 암살을 위하여 고용한 장사였다고 하는데, 나이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노인은 아니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 [[사기(역사책)|사기]] 흉노열전에서는 [[조무령왕]]이 조나라 북부에 군을 설치하고 요새를 쌓은 이후, 진개가 흉노들을 격퇴했다고 적으며, 진개 이후에 조나라의 명장 [[이목(전국시대)|이목]]이 흉노를 또 다시 무찔렀다고 한다. 그런데 이목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목의 활동시기는 아무리 빨라도 272년 전후로 추측된다. 조무령왕은 기원전 300년 즈음에 요새를 쌓았으며, 이목이 흉노를 격퇴한 시기는 조나라의 기록[* 조나라의 기록에 마지막으로 흉노가 등장한 것은 사기 조세가 조혜문왕 편에서 기원전 272년, 흉노의 부족 중 하나였던 동호의 변경 불모지를 개간했다는 내용이 전부다. 그 이후로는 흉노가 등장하지 않아 이 시기를 전후하여 이목이 흉노와 전쟁을 벌였다는 추측이 가능하다.]과 그의 사망년도가 기원전 229년임을 생각하면[* 이목은 심지어 자연사도 아니고, 당시 전쟁에서 싸우던 장수였으나 모함을 받아 죽었다.] 기원전 272년~265년 즈음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진개의 활동시기는 기원전 300년에서 270년 사이로 추측되는데, 이는 연나라의 전성기이자 연나라 최고의 군주로 꼽히는 [[연소양왕]]의 제위시기와 일치하므로, 연나라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시기도 적절하다. 왜냐하면 연나라는 연소왕의 즉위 전까지는 [[자지(전국시대)|자지]]~~이상한 생각하지 말자~~가 날뛰는 등 매우 혼란한 시기였기 때문. 또한 연소왕의 아들인 [[연혜왕]]은 명장인 [[악의(전국시대)|악의]]를 쫓아내는 삽질에 집권하자마자 제나라와 전쟁을 벌였고 한, 위, 초 3개국 연합군의 공격을 받는 등 연혜왕 집권기엔 연나라 입장에서도 흉노에 신경쓸 시기가 아니기도 했다. 다만 이러한 정황증거만 있을 뿐, [[분서갱유]]로 인해 연나라의 사서가 타 국가들의 사서와 같이 소실되어 구체적인 기록이 남지 않아서 전쟁의 시기와 경과 등은 알 수 없다. 이 전쟁 이전의 고조선은 [[한반도]] 북부와 [[요서]], [[요동]], [[만주]]의 패권을 차지하고 전성기가 오래 이어지던 강성한 국가였지만 이 전쟁의 패퇴로 (고고학적 자료 등을 종합해보면) 요녕 지방을 상실하고 한동안 평안도와 황해도 일부 지방만을 차지하는 소국으로 전락했다는 설이 학계에서 제기된다. == 관련 설 == 고조선의 강역 및 중심지에 대한 학설 중 이동설을 주장하는 쪽에선 이 연나라의 공격으로 고조선의 중심지가 [[랴오닝]]에서 [[청천강]] - [[대동강]] 유역으로 이동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런 학설을 기반으로 고조선의 후기 수도인 [[왕검성]]의 위치가 [[평양시|평양]]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또한 연왕 희가 [[랴오둥]]을 넘어서 [[압록강]]까지 도주하려다 실패했다는 기록을 두고, 이 즈음 연나라와 고조선의 국경이 압록강 자체, 혹은 그 부근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또 다른 일부 연구는 고조선-연 전쟁 종결 후 고조선과 연의 경계 지역에 대해 [[랴오둥 반도]]를 가로지르는 첸산 서쪽으로 보고 있다.[* 연하도 문화가 천산 일대까지 나타난다.] 이후 서한은 거리가 멀어 지키기 어렵다는 이유로 다시 서쪽으로 물러나 고조선은 [[패수]][* 대체로 혼하나 압록강, 청천강으로 본다.]까지 진출하게 되었다고 본다. 또 연나라가 만번한까지 진출한 후 점진적으로 청천강까지 장악했을 것이라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 학설은 [[노태돈]] 교수의 주장이다.] == 기타 == 사실 연과 고조선은 최후까지도 관련이 있는데, 최후의 이성 연왕[* 즉, 본 문서의 연나라는 이후 진나라한테 망했고, 초한쟁패기 시절 다시 나타난 봉국으로써의 연나라.] [[노관]]이 [[전한|한나라]]의 [[유방(전한)|유방]]에 대적하다 패해 달아날 때 연나라에 살던 [[위만]]도 고조선으로 망명했는데, 이후 고조선 변방을 지키다 1년 뒤 [[준왕]]을 쫒아내 [[위만의 정변|왕위를 찬탈하고]] [[위만조선]]을 세우게 된다. 때문에 위만의 출신과 위만조선의 정체성을 두고도 여러 해석이 나오는데 이는 해당 문서들을 참고할 것. 본 전쟁의 발발년도를 기원전 281년으로 보는 견해를 수용하면 [[2020년]] 기준으로 고조선-연 전쟁은 2300주년을 맞는다. 허나 상기한 바와 같이 기원전 281년은 이미 전쟁이 종결된 이후이다. 따라서 위의 견해는 애초에 성립할 수 없다. 기원전 280년까지 늦추어 보는 연구도 있으나 [[연혜왕]] 즉위 이후의 연나라의 상황을 본다면 흉노에 신경쓸 상황이 아니었으니 지지받지는 않는 설이다. == 같이보기 == * [[방언(양웅)]] [[분류:동호]][[분류:고조선/전투]][[분류:춘추전국시대/전투]][[분류:한중관계]][[분류:북중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