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인물별/생애]][[분류:고종(대한제국)]] [include(틀:상위 문서, top1=고종(대한제국))] [include(틀:역대 조선 국왕 관련 문서)] [include(틀:고종(대한제국))] [목차] == 개요 == [[대한제국]] [[고종(대한제국)|고종 태황제]]의 생애(1852.07.25.~1919.01.21.)를 다루는 문서. == 가계 == '''[[고종(대한제국)|고종]](高宗)'''은 본래 [[영조]]와 [[사도세자]]의 후손이 아니라 [[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의 직계 8대손이었다. [[조선/왕실|왕족]]이라지만 9대조까지 거슬러가야 왕([[인조]])이 나오며, 선왕인 [[철종(조선)|철종]]과는 '''무려 17촌''' 간으로[* [[철종(조선)|철종]]을 기준으로 혈연적 촌수를 계산하면 (17) '''[[철종(조선)|철종]]''' - (16) [[전계대원군]] - (15) [[은언군]] - (14) [[사도세자]] - (13) [[영조]] - (12) [[숙종(조선)|숙종]] - (11) [[현종(조선)|현종]] - (10) [[효종(조선)|효종]] - (9) '''[[인조]](공통 조상)''' - (8) [[인평대군]] - (7) [[복녕군]] - (6) [[의원군]] - (5) [[안흥군]] - (4) 이진익 - (3) 이병원 - (2) [[남연군]] - (1) [[흥선대원군]] - (본인) '''[[고종(대한제국)|고종]]'''.], 왕위에서는 너무 한참 멀어진 일개 [[방계]] [[조선/왕실|왕족]](거의 [[전주 이씨]] 말단 [[종친]])에 불과한 처지였다. 그러나 양자 관계[* 훗날 [[고종(대한제국)|고종]]이 되는 명복은 [[효명세자]]와 [[신정왕후 조씨]]의 [[양자(가족)|양아들]]로 입적 되었다.]를 통해 '[[조선/왕사|왕위 계승권]]'을 논할 만큼 정말 많이 가까워질 수 있었다(양자 관계까지 포함하면 7촌). [[사도세자]]의 서자 [[은신군]]은 [[숙종(조선)|숙종]]의 서자 [[연령군]] 이훤의 양손자이자 [[낙천군]]의 [[양자(가족)|양자]]가 되었지만 후사 없이 [[사망]]했는데, 이에 [[조선]] [[순조]]는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6대손 진사 이병원의 차남 [[남연군|이채중(이구)]]을 사후 [[양자(가족)|양자]]로 입양시켰다. 이로써 [[남연군]]이 된 이채중(이구)은 원래 [[인조]]의 직계 7대손으로 '''[[조선/왕사|왕위 계승권]]'''이 없었지만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신군]]의 [[양자(가족)|양자]]가 되면서 [[조선/왕사|직통 왕위계승]]에 정말 가까워질 수 있었다. == 출생과 즉위 == [[1852년]](철종 3년) [[7월 25일]], [[흥선군]] [[이하응]]과 [[여흥부대부인|군부인]] [[여흥 민씨]]의 둘째 아들로 [[한성부]] [[안국동|안국방]] [[운현궁|구름재동]] [[흥선군]] 개인 사저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태어난 사저는 처음에 구름재댁으로 불리다가 그가 [[조선/왕사|국왕]]으로 즉위하면서 비로소 '''[[운현궁]](雲峴宮)'''이라는 궁의 작호를 받게 된다.] 어린 시절의 [[고종(대한제국)|고종]]은 특별할 것 없이 여느 일반 또래 아이들처럼 지냈다고 하는데 그렇다고는 해도 [[흥선군]]은 실권은 없어도 [[전주 이씨]] [[종친부]]의 주요 직책들을 맡았기 때문에 [[조선시대]] 기준으로 엄연히 상류층이었다. 처음 아명은 '[[개똥이]]'였다가 소년기에 '명복(命福)'[* 무병장수, 오래 살라는 의미로 이름을 [[흥선군]]이 직접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유는 당시 [[흥선군]]의 처지가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등 [[세도 정치|세도가]]에 붙어 기어들어가지 않으면 아무리 [[방계]] [[조선/왕실|왕족]] [[종친]]이라 할 지라도 목숨줄이 [[단명]]한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고종(대한제국)|고종]]이 태어났을 때 일계 [[종친]]으로 살아가야 할 아이를 '목숨 명'에 '복 복' 자로 지은 것이다.]으로 고쳤다. [[조선]] [[조선/왕사|국왕]]으로 즉위한 뒤에는 [[항렬]]에 맞춰 '재황(載晃)'으로 [[개명]]했다가 [[피휘]]를 위해 '형(㷗)'으로 다시 개명했다. 처음 자(字)는 명부(明夫)였다가 즉위 후 '성림(聖臨)'으로 개명하였다. [[1863년]](철종 14년) 음력 12월, 그냥 일개 평범한 [[종친]]으로 살 [[흥선군]]의 둘째아들 [[고종(대한제국)|이명복]]의 인생이 한 순간에 뒤바뀌는 상황이 오는데 당시 [[조선/왕사|국왕]]이었던 [[철종(조선)|철종]]이 후사없이 끝내 병으로 일찍 죽자 [[흥선군]]과 효유대왕대비 조씨([[신정왕후 조씨]])의 후원(뒷받침)으로 [[조선]] [[효명세자|익종]]([[효명세자]])과 [[신정왕후]]의 [[양자(가족)|양자]](차남)로 정식 입적되어 '익성군(翼成君)'으로 봉해지고 곧바로 [[조선]] [[고종(대한제국)|제26대 임금]]으로 정식 즉위하였다. >'''대왕 대비전에서 흥선군의 제2자에게 사위를 시킬 것을 명하다''' >---- >[[신정왕후 조씨|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에서 '''[[흥선군]](興宣君)'''의 적자(嫡子)인 [[고종(대한제국)|제2자]](第二子)에게 '''[[조선/왕사|사위(嗣位)]]'''시키라고 명하고, 영의정 '''[[김좌근]](金左根)'''과 도승지 '''민치상(閔致庠)'''을 보내어 [[운현궁|잠저]](潛邸)[* 잠저(潛邸) : 창업(創業)한 임금이나 종실(宗室)에서 들어온 임금으로서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의 일컬음. 또는 아직 [[조선/왕사|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 즉 여기서 말하는 잠저는 [[운현궁]]이다.]에서 봉영(奉迎)하여 오게 하였다. > >○大王大妃殿, 命'''興宣君'''嫡己第二子 嗣位, 遣領議政'''金左根''', 都承旨'''閔致庠''', 奉迎于潛邸。 >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實錄卷之十五終 >---- >- '''《[[철종실록]]》 15권, 철종 14년([[1863년]], 청 동치(同治) 2년) 12월 8일 (경진) 9번째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ya_11412008_009|#]].] == '''친정(親政)''' 시작 == 사실 [[수렴청정]]은 [[신정왕후 조씨|조 대비]]가 [[고종(대한제국)|고종]]이 15세 되던 해인 [[1866년]](고종 3년)에 물러나면서 끝났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그 때부터가 '''친정'''이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이 법적 제도적 근거 없이 살아있는 '[[고종(대한제국)|국왕]]의 [[아버지|생부]]'라는 이유로 실질적으로 [[상왕]]처럼 군림했기 때문에 고종의 실질적 친정은 한참 뒤로 밀리게 된다. 어린 시절에 그는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의지와 생각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지만 즉위 10년이 지나 22세가 되자 [[최익현]]의 [[탄핵]] [[상소]]를 계기로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옹호하는 신하들을 몰아내어 자기 주도적으로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실각시키고 직접 친정을 하였다. 흥선대원군 [[섭정]] 시기의 치세와 대원군의 실각 과정은 [[흥선대원군]] 문서 참조. 흔히 [[명성황후|부인 민씨]]나 그 일족과 힘을 합쳤다는 [[야사(역사)|야사]]에서 기인한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여흥 민씨]] 일족 세력은 기존의 외척가들에 비해 받쳐줄 세(勢)가 약해 강성하지 못했다. [[외척]] 세력이 득세하던 [[세도정치]]를 엎고 등장한 흥선대원군이 과거의 전철을 밟으며 누대로 강력한 세도가의 여식을 왕비로 뽑을 리 없었다. 더구나 [[명성황후]]는 가까운 혈족과 친지가 없던 거의 [[고아]] 신세였다. 그런데 어떻게 [[여흥 민씨]]가 척족 세력으로 득세를 했을까? 기이하게도 여흥 민씨는 고종 뿐 아니라 흥선대원군, 그 아버지 [[남연군]]에게는 처가이면서 외가인 기묘, 기이한(?) 3중의 [[사돈|겹사돈]]이었다. 심지어 고종 뒤의 [[순종(대한제국)|순종]]까지도 첫 부인 [[순명효황후]]가 [[여흥 민씨]]였다.[* [[순명효황후|순명효황후 민씨]]는 [[순종(대한제국)|순종]]이 [[대한제국/황사|황태자]]를 하던 시절에 세상을 일찍 떠났고, 이후 새로 맞은 황태자비가 [[해평 윤씨]] 가문의 [[순정효황후]] 윤씨.] 단순히 [[명성황후]] 한 사람 때문에 [[여흥 민씨]] 세력이 득세했다고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이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친정 초기에 [[박규수]], [[이경하]]를 비롯한 흥선대원군파, 중도의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일문, [[흥인군]] 이최응, [[김병학]]을 비롯한 흥선대원군 반대파를 골고루 탕펼하여 조정의 균형을 잘 맞추면서도, [[민승호]]와 [[민겸호]]를 비롯한 [[여흥 민씨]]들을 등용하여 힘을 실어주었다. 물론 고종은 [[흥선대원군|대원군]]의 [[개혁]]을 대부분 계승하여 [[호포제]][* [[양반]], [[지주]]들에게도 [[세금]]과 군역을 매기는 법을 제정하였다. 당시 19세기 조선 사회에서는 고금에 들어보지 못한 혁신적인 개혁정치라, [[양반]]들에게는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백성들에게는 정말 두 손 들고 적극 환영할 만한 일이라 대원군의 지지율이 더 올라갔다.], 사창제, [[서원]] 철폐 등을 고수했고 [[만동묘]](萬東廟)[* [[명나라]] [[만력제|만력제(신종)]]를 모시기 위해 만든 사당이다.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어 구해준 의리, 즉 사대에 대한 명분을 강조하기 위해,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는 명분과 기초 아래 지어졌으며 후대에까지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매년 사대부와 유림 세력은 자기네 사비가 아닌 전부 국고(국가의 세금)로 충당하여 조선 재정상태가 엉망이 될 정도였다.]는 복구하였으나 국가가 [[제사]]를 주관하게 하여 유림의 명분은 충족시켜주되 힘은 돌려주지 않는 교묘한 방법을 썼다. [[당백전]]만큼은 아니었지만 [[화폐]] 경제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던 호전(청전)을 혁파했고 문세도 없애어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 무렵의 [[정치]]를 보면 기본 [[능력]]이 없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적어도 '전통 시대 [[군주]]'로서 평타 이상은 되는게 이 시기. 다만 재정적으로 이 시기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유는 [[당백전]]를 대체하기 위한 '청전(淸錢)' 때문으로, 크기와 구리 무게가 [[상평통보]]인 1/3인 것이 막대한 [[인플레이션]]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폐지하고 보니 조정의 창고에는 청전만 가득했다. 당백전 때와 마찬가지로 지방 관아와 병영에서 양화인 상평통보는 자기들이 챙기고 악화인 청전만 공납으로 올려보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조선은 한순간에 국고가 사실상 1/3로 줄어드는 재정난에 몰렸고 세수 확보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렇다고 천천히 폐지할 수도 없었다. 조정의 창고에 있던 청전을 민간에 풀고 다시 [[상평통보]]를 거둬들이면 조정의 피해를 고스란히 민간에 억지로 떠넘기는 행태가 되고 어차피 폐지될 청전의 유통량이 더 늘어난다. 악화이기 때문에 손에 들어온 청전은 오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소모해 없애버리는 것이 이득이므로, 굉장한 속도로 유통되면서 당시 [[조선]]의 화폐 경제를 붕괴시켰던 것이다.] == [[운요호 사건]](1875) == 그러던 중 [[1875년]](고종 12년) [[운요호 사건]]이 [[강화도]] [[영종도|영종진]] 앞바다에서 터진다. 측량(해안 측정)을 구실로 접근한 [[일본제국군|일본군]]의 운요호는 [[조선군]]이 정당한--정당방위-- 위협 사격을 하자 즉각 공격을 감행했고 [[영종도]] 수비대가 일본 수병 36명(전원 전장식 단발총 무장상태)의 상륙에 전혀 저항하지도 못하고 완전히 전멸해 무너져 버렸다. 그런데 [[영종도]]는 [[병인양요|1866년 무장한 선원 200명의 공격에 그래도 어느 정도 저항한 전과가 있는]] 곳이고 운요호 1척에 초토화되었다는 [[초지진]] 또한 그보다 고작 [[신미양요|4년 전인 1871년에는 미 해군 포함 2척과 슬루프함 2척의 함포 사격을 하루종일 받으면서도 미군 상륙 개시 전까지 계속 응사하던 나름 튼튼한 포대]]였다. 그런데 [[미군]]이 이토록 포격을 오래 한 것은 7~8년 전에 있었던 [[제너럴 셔먼호 사건]]([[평양시|평양]] [[대동강]]에서 발생)의 영향이 좀 있었다. [[제네럴 셔먼호]]는 무장 상선이었기 때문에 [[미국]] 측에서 [[제너럴 셔먼호]]를 격침시킨 [[조선군]]의 군사력을 과대 평가하여 일단 화력 제압을 시도해서 오래 포격한 것이다. [[조선]]의 화망도 매우 정교하고 밀집되어 있어서 [[남북 전쟁]]에 참여했던 [[미군]] [[베테랑]]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고 워낙 잘 은폐된 포대의 위치 때문에 [[미군]]은 [[조선군]] 대포의 위치를 처음에는 가늠도 못했다. 결국 [[초지진]] 포격전은 [[미군]]과 [[조선군]]이 합쳐 2명의 사상자가 전부였고 본격적인 전투는 [[어재연]] [[장군]]이 지키던 [[광성보]]에서 터진다. 자세한 것은 [[신미양요]] 항목 참조. 그런데 왜 이렇게 쉽게 무너졌느냐 하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1874년]](고종 11년) 1월,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친정 이후 [[강화도]] 일대의 군영에 돌릴 예정이던 예산(군비/군수 지원금)들이 모조리 끊기고 전부 박살났던 것. 청전([[청나라]]의 동전) 폐지로 갑자기 극심한 [[디플레이션]]이 야기되고 있었고 그 상태에서 [[강화도]] 일대 군영의 주요 수입원이던 경강수세([[한강]] 통행세)를 혁파하여 가뜩이나 재정력이 부족했다. 때문에 [[운요호 사건]] 시점에서 [[경기도]] [[서해안]]의 주요 수군영은 몇 달째 군수 지원이 끊긴 상태였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은 부득이한 조치들이었는데 국가 1년 예산의 15배도 넘어가는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1866년]](고종 3년) 11월에 [[당백전]]을 과하다 싶을 정도로 정말 무리하게 찍어낸 [[흥선대원군]]의 [[화폐]] [[정책]] 때문에 당시 [[조선]]의 [[화폐]] 유통은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벌어지는 상황[* [[당백전]]을 살리자니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당백전]]을 폐지하자니 [[조선]]의 시장 경제가 망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의 무리한 [[당백전]] 화폐 정책은 [[백성]]들에게 있어 민심을 이반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이었다. 이후 2년 만에 말도 안 되는 악화[* 명목 가치는 이름 그대로 [[상평통보]]의 100배. 실질 가치는 6배 정도.]인 [[당백전]]이 폐지되었는데 [[인플레이션]][* [[당백전]]이 발행되고 [[조선]]의 물가는 정말 엄청나게 폭등했다. 단적으로 [[쌀|쌀값]]은 [[당백전]] 유통 6개월 만에 6배로 폭등한다.]이 벌어진 상황에서 [[당백전]]이 폐지되자 조정의 재정난이 극도로 심화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흥선대원군]]이 주력한 것이 [[관리]]들이 밀수입한 청나라의 동전인 '청전(淸錢)' 유통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청전 유통이 [[합법]]화된 것도 [[1867년]](고종 4년)의 일로 이것도 [[흥선대원군]]의 작품이다. 그리고 유통되던 [[당백전]]을 회수하는 과정도 당백전을 청전으로 바꿔준 다음에 [[당백전]]을 다시 녹여버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청전도 악화다.[* 청전은 [[상평통보]]의 1/3의 가치밖에 없는 악화였다.] 관리들이 [[청나라]] 동전을 [[밀수]] 했겠는가? 이 청전은 삽시간에 [[상평통보]] 유통량의 40%를 점유하였고 [[조선]] 내에서는 全 [[화폐]]에 대한 불신풍조가 다시 일어났다. [[당백전]]으로 불안했던 경제 사정에서 [[인플레이션]]이 다시 시작된 것도 당연한 수순. 이렇게 [[당백전]]의 무리한 발행과 [[경복궁]] 중건으로 인한 재정 위기를 그나마 넘어가기 위해서 도입된 청전이 한순간에 [[조선]] 경제를 다시 휘청하게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은 겨우 4년~5년이었다.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화폐]] 부실 문제로 [[1874년]](고종 11년), 청전이 폐지되자 다시 올랐던 [[인플레이션]]을 포함해서 역작용으로 [[디플레이션]]이 이어진 것이고 이 과정에서 [[조선]] 정부는 다시 극심한 재정난으로 돌아가야 했다. 경강수세가 폐지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후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왕실]] 재정에 집착하고 모든 국가 재정을 자신이 장악하려고 하였는데 이런 초기의 문제 때문일 수도 있다. [[흥선대원군]]의 무리한 [[경복궁]] 중건이 국가 근간의 등골을 빼먹는 수준으로 [[조선]] 정부의 재정적 여력을 악화시켰다는 것과 당백전과 청전의 유통 과정에서 발생했던 과도한 인플레이션과 폐해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왜 [[고종(대한제국)|고종]]이 [[부작용]]을 감수하면서도 다시 폐지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천천히 폐지하는 것이 어떠냐는 비판조차 말이 안 되는 것이 [[화폐]] [[개혁]]을 시간을 두고 진행한 경우는 거의 100% [[그레샴의 법칙]]이 왜 무서운지 알게 된다. 단적으로 [[당백전]]이 발행 되자마자 [[조선]]에서는 [[상평통보]]가 씨가 말랐고 [[당백전]]이 폐지된 이후에도 [[관북]] 이상 지방과 [[영남]] 지방은 청전 같은 악화는 쓰지도 않았기 때문에 부작용은 더더욱 집중되었으며 그 부작용은 안 그래도 허약한 [[조선]] 조정의 재정난을 악화시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왜 청전을 폐지해서 군사력을 더 떨어트렸느냐 라는 것은 억지 비판이 된다. 그 뒤로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새로 [[화폐]]를 발행하는 데에 상당히 신중을 기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한다. [[묄렌도르프]]가 당오전(當梧錢) 주조를 주장하자 [[김옥균]]의 [[차관]] 도입에도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그런데 [[일본제국|일본]]이 뒤통수 치는 바람에 차관 도입은 실패하고 [[당오전]]은 [[당오전]]대로 [[막장]]으로 굴러가서 효과는 못 봤다. 그러나 [[아편전쟁|중화에 강자로 군림했던 중국 청이 서양(영국, 프랑스 등)에게 단숨에 수도 [[베이징]](北京)이 무너지고]] [[쿠로후네 사건|일본이 미국 페리 제독에게 강제로 개항되는 상황]]에 군비를 삭감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조선]] 경제가 모두 초토화되는 사태라도 불과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 등 수백년 전 외침을 겪어왔던 나라에서 "당장 쓸 일도 없는 [[군대]]"라고 신경 쓰지 않은 것은 큰 오판이자 정말 잘못된 생각이다. 당시 [[조선]] 조정의 인식이 "가랑이 찢어질 정도로 [[가난]]하고 당장 먹을 것도 없는 우리 나라에 [[서양]] 놈들이 와서 뭐 하겠어"하는 인식이었던 것. == [[강화도 조약]](1876) == 각설하고 [[일본제국|일본]] [[운요호 사건|운요호]]의 [[무력]]에 조선은 놀라기는 했지만 [[흥인군|이최응]]과 [[박규수]]를 비롯한 개화파 조정 대신들과 [[고종(대한제국)|고종]]은 문호 개방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나라 문(國門)을 열고 관(館)을 설치하여 통상(通商)을 하면 백성에게 이득이 될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러 [[유림]]과 [[흥선대원군]]의 결사 반대조차 옳지 않다고 무시하고 '''[[강화도 조약]]'''[* 이 조약은 강제로 불평등하게 체결했기에 '늑약'(勒約)이라고도 한다.]을 [[조선]] 조정과 제대로 된 협의없이 반강제적으로 체결한다. == [[임오군란]](1882) == 그러던 중 [[여흥 민씨|민씨 일가]]가 장악하고 있던 '''선혜청(宣慧廳)'''의 부패(비리, 공금 횡령 등)로 인해서 가뜩이나 신식 군대인 [[별기군]] 창설 이후에 푸대접받고 있던 [[오군영]] 구식 [[군인]]들이 무려 13개월치[* 13개월이라는 숫자가 감이 안 올 수 있겠으나, 13개월이면 1년하고도 1개월이 더 지난 상태로 [[월급]]을 계속 못 받은 것이므로, 그동안의 [[오군영|구식]] [[군인]]들이 참다 참다가 [[별기군]]과의 차별, 그로 인해 구식 군인들의 상대적 박탈감과 불만 등으로 군란이 터질래야 터질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던 것이다.]나 [[월급]]을 못 받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나마 [[훈련도감]]을 비롯해서 특별한 소속이 있는 군인들은 제때 월급을 꼬박꼬박 받을 수 있었으나 [[별기군]] 창설 이후 수많은 구식 [[군인]]들은 특별한 소속없이 방치되었고 그들은 [[왕십리]]에서 [[채소]]를 재배해서 부업으로 겨우 먹고 사는 지경에 이르렀다. 구식 군인들의 불만이 위험 수위에 이르자 그들에게 1개월 치 급료가 지불되었는데 문제는 급료로 지불된 [[쌀]]이 [[겨]]와 [[모래]]가 섞인 썩은 쌀들이었다. 분노한 군인들이 항의하자 고지기들은 겁도 없이 군인들에게 썩 꺼지라고 [[적반하장]]격으로 오히려 큰소리를 쳐댔고 분노한 군인들은 그 고지기의 얼굴과 몸을 단체로 반병신되게 밟아 죽사발로 만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고종(대한제국)|고종]]은 "13개월이나 급료를 받지 않고도 규율을 지킨 것이 가상하다"고 칭찬하면서[* 근데 이건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세상에 13개월(거의 1년 이상)이나 급료도 못 받았는데 [[호구]]처럼 군대 규율을 곧이곧대로 지키는 사람이 어디 있나? 하지만 그런 사태를 만든 장본인이 [[고종(대한제국)|본인]]이라는 것은 망각한 듯 하다.] "[[조선|나라]]에서 [[월급]] 못 준 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니 잘 타이르라"는 정상적인 결론을 내린다. 근데 [[여흥 민씨|민씨]] 일가의 수장인 선혜청 제조 [[민겸호]]는 [[고종(대한제국)|왕]]의 명령을 가볍게 제끼듯 무시해버리고 주모자들을 강제 연행, 감금한다. 이에 구식 군인들 사이에서 "[[민겸호]]가 잡아간 [[군인]]들을 죽일 것"이라는 [[찌라시]] [[소문]]이 돌았다. [[폭발]]한 [[군인]]들은 선혜청 제조 [[민겸호]], [[흥인군]] 이최응을 비롯해 원성을 하고 있던 고관 대작들을 보이는 즉시 닥치는대로 죽였고, [[일본제국군|일본군]] 훈련 교관들과 [[일본인]] [[민간인]]도 [[일본인]]이라는 이유하나 만으로 무참히 [[살해]]했다. 주조선 일본 공사 '''요시모토 하나부사(義質花房)'''는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달아났고 겁에 질린 [[고종(대한제국)|고종]]은 허겁지겁 [[흥선대원군]]을 모셔와 "[[군인]]들을 달래달라"고 요청하며 다시 전권을 내어주었다. [[군인]]들은 대궐에 나타난 [[흥선대원군]]을 보고 열광, 환호했으며 대궐에 일제히 몰려든 [[군인]]들은 [[명성황후|중전]]을 내어 줄 것--(폐위)--을 [[흥선대원군]]에게 강력히 요구했지만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중전(中殿)]]은 이미 [[죽음|승하]]하셨으니 안심하고 물러나라"는 말을 하여 [[군인]]들을 안심시킨 뒤 해산시키고 [[임오군란]]의 큰 원인제공을 한 단체였던 [[별기군]]을 완전 해체하며 [[강화도 조약]]을 비롯하여 [[일본제국|일본]]과의 모든 통상 [[조약]]의 파기를 일방적, 독단적으로 선언한다. 그런데 [[청나라]] [[이홍장]]의 지시로 [[청나라]] 군대가 들이닥쳐 [[흥선대원군]]을 자신들의 진지로 초청하는 체 하며 그를 [[강제]] [[납치]]하여 [[청나라]] [[톈진 시|톈진]]로 끌고 가는 돌발 상황이 발생한다. 동시에 [[홍계훈]]의 기지로 목숨을 건졌던 [[명성황후]]가 [[청나라]]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와 다시 집권하게 된다. [[청나라]]가 나름 친 청적인 면모를 보인 [[흥선대원군]]을 [[납치]]해간 이유는 [[흥선대원군]]의 쇄국([[통상 수교 거부 정책]]) 재개가 [[일본제국|일본]]을 더욱 자극하여 [[동북아시아]]의 균형을 망치지 않을까 우려해서였다는 설이 있다. 한편 [[정여창]]의 눈에 들어 출세한 23세의 젊디젊은 [[원세개|위안스카이]]는 북양 [[군벌]]의 철수 이후 [[조선]]에 잔류한 청나라군을 지휘하며 [[조선]]에서 [[총독]]이라도 되는 것 마냥 [[고종(대한제국)|고종]]을 [[꼭두각시]] 혹은 [[암군]](暗君, 어리석은 임금)이라면서 자기가 행사하겠다고 오만방자하게 [[왕]]처럼 군림 행세하게 된다. == [[갑신정변]](1884) == 이 와중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 등의 젊은 급진 개화파들이 [[일본제국|일본]]의 지원을 얻어 [[정변]]을 일으키니 이것이 곧 [[1884년]](고종 21년)의 [[갑신정변]]이다. 우정국 사건을 시작으로 민영익을 베어 넘긴[* [[미국인]] [[선교사]] 겸 [[외교관]], [[의사]]인 [[호러스 뉴턴 알렌]]의 구사일생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죽진 않았다.] 그들은 [[여흥 민씨|민씨]] 일파, [[고종(대한제국)|고종]]과 [[명성황후]]를 확보하여 경우궁[* 현재의 [[덕수궁]]인 경''''운''''궁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수빈 박씨(後. 현목수비 박씨 추증)]]의 사당이다.]으로 옮기고 자신들에 반대하고 [[청나라]]에 사대하던 관료들을 입궐시킨 후 닥치는 대로 베어 죽였다.[* 이때 죽은 이들을 온건 개혁파라고 부르는 견해가 있지만 [[갑신정변]] 때 [[숙청]]된 이들은 급진 개화파와 척을 지고 있던 사람들(보수적인 사람)이었다고 보는 게 맞다. 이전에는 기득권 유지에 급급했다고 썼지만 죽은 사람들 중 상당수는 개화에도 관여했을 정도로 우수한 인재들이 많았다. 애초에 급진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이유는 본인들의 처지가 막장이 되어서였지, [[조선]]을 개혁하겠다는 의지로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사태가 심각해졌는지, 아니면 수습하기 어려웠는지 [[눈물]]을 흘리며 제발 그들을 살려달라고 [[김옥균]] 등에게 붙잡고 사정하듯 애원했지만, 피를 보고 눈이 뒤집혀 크게 흥분한 급진 개화파들은 [[고종(대한제국)|고종]]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급진 개화파는 '''정강 14조'''를 발표하여 개각(改閣)을 단독으로 선언했지만, 눈치 빠른 [[명성황후]]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차리고 "[[신정왕후 조씨|효유대왕대비]](效裕大王大妃)께서 넓은 곳으로 옮기길 원한다"고 말하자 [[다케조에 신이치로]] 공사가 얼마든지 방어할 수 있다고 자신하여 넓어 방어하기 어려운 [[창덕궁]]으로 옮겨가는데, 이것이 패착(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무너진 패배 요인)이 되어 [[원세개|위안스카이]]가 지휘하는 1,500명의 청군과 이에 합세한 [[조선군]]이 몰려들면서 급진 개화파는 완전히 궁지에 몰린다. 급진 개화파는 [[고종(대한제국)|고종]]을 데리고 [[인천]]으로 달아나 후일을 도모하려 했지만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죽어도 효유대왕대비([[신정왕후 조씨]])가 계신 [[창덕궁]]에서 죽을 것을 고집하여 결국 [[고종(대한제국)|고종]]을 놔두고 자기들만 양복으로 갈아입고 [[상투]]를 자른 후 [[일본제국|일본]]으로 암암리에 도주/망명하는 처지가 된다. 이중에 [[박영효]]의 형인 박영교, 홍영식은 남아 오조유가 이끄는 청군에 합류하려던 [[고종(대한제국)|고종]]을 만류하던 중에 느닷없이 공격해온 [[조선군|조선 병사]]들에게 도륙당해 죽는다. 결국 이들의 [[갑신정변|정변]]으로 인해 [[개화]] 이야기는 쑥 들어가고 말았고 급진 개화파의 친족들은 무참한 죽임을 당하고 저잣거리에서 효수당한다. 그리고 [[청나라|청]]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사대 관계)은 오히려 공고해지고 말았다. 한편 [[일본제국|일본]]은 적반하장으로 [[조선]]에 [[한성 조약]][* [[갑신정변]]에 대한 전면 피해보상, [[일본제국|일본]] [[공사관]] 신축 배상 및 [[조선]]에 [[일본제국군|일본군]] 주둔.]을 강요하며 배상을 모두 받아냈고 [[청나라|청]]에겐 무력 시위를 하여 [[1885년]](고종 22년)에 [[톈진 조약]][* 양국군 철수 및 동시 진입 보장.]을 체결하는 데 모두 성공했다. ==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개혁]] == [[갑신정변]] 이후 10년 간 [[조선]]은 [[청나라]]가 주도권을 잡고 [[유럽]], [[미국]], [[일본제국|일본]]의 세력이 주변을 기웃거리는 묘한 공백 상태에 빠진다. 주차관 [[원세개|위안스카이]]가 [[조선/왕사|국왕]]에 준하는 --실세--권력자가 되어 [[조선]]에 군림하긴 했지만 그의 행보는 [[이홍장]]의 제지 및 다른 열강을 의식했는지 의외로 소극적이었고 별 의미 없는 10년이 어영부영하며 훌떡 지나간다. 그 10년 간 [[고종(대한제국)|고종]]은 5군영을 3군영으로 개편했다가 다시 4군영으로 개편하는 군제 개혁에 착수했는데 기존 정변에서 거의 쓸모가 없었던 군에 대한 불신 때문에 급히 행한 것이었고 별다른 성과는 거두지 못 했다. 그리고 개혁을 위해 내무부를 설치하여 궁내 사무와 군국 사무를 겸하게 했고 이 과정에서 친위 세력인 [[여흥 민씨]]들을 다시 기용했다. [[육영공원]]을 비롯한 학교, [[제중원]] 등의 근대식 [[병원]], [[전신]], [[전기]] 등이 이 시기에 들어왔다. 하지만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일련 [[개혁]]들은 어디까지나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의 대혼란 이후에 극도로 불안해진 나머지 자신의 [[조선/왕사|왕권]] 유지를 기본 전제로 하고 있었고 [[서양]] 문물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매우 소극적이었고 두루뭉술했다. 정권 유지에 대한 집착은 정권 유지 기반인 재정 확보에 매달리게 했고 내무부는 [[개혁]] 조치가 아니라 [[고종(대한제국)|고종]]의 개인 비자금 확보에 더 주력했다. [[서양]] 신식문물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마구잡이로 들여온 일부 무기와 군함도 거의 쓸모가 없었다. 한편 계속된 교세 확장에 고무되고 기존에 금지된 [[천주교]], [[개신교]]의 합법화에 자극받은 [[동학]]이 대대적으로 합법화를 요구하게 된다. [[1892년]](고종 29년) 교주 [[최시형]]의 허락 아래에 [[공주시|공주]]에서 동학교도들의 집회가 열려 충청 감사 조병식을 통해 [[동학]] 합법화의 뜻을 전달했다. 조병식은 "나라에서 하는 일을 감영에서 와서 따지면 뭘 어쩌라는 거냐?"라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동학]] 단속을 다소 완화했다. 이후 삼례에서 더 큰 집회가 열렸지만 [[충청도]]에서 거둔 것 이상의 성과는 없었다. [[1893년]](고종 30년), 동학 대표들은 서울로 상경하여 [[최제우]]를 신원하고 [[동학]]을 합법화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복합상소). 이에 [[고종(대한제국)|고종]] 이하 조정은 매우 긴장했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이단(異團)을 탄압하는 것이 [[조선/왕실|열성조]](列聖祖)의 법"[* [[성리학]]이외에는 모두 탄압해야 한다는 것이 [[태종 이방원|조선 태종]]때부터 이루어진 [[숭유억불]] 정책에 기초하여 나온게 이단([[천주교]], [[동학]] 등)을 탄압하는 [[조선]] 고유의 기본 정책이다.]이란 입장을 분명히 했고, 유림들도 앞을 다투어 "[[동학]]을 탄압해야 한다"는 상소를 일제히 올렸다. 결국 조정은 [[동학]]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동학 지도부는 [[보은군|보은]]에 전국의 모든 교인들을 집합시켰고 '''보국안민(保國安民), 척왜양창(斥倭攘窓)의 깃발'''을 휘두르는 수만 명의 교인이 [[보은군|보은]]에 집결했다. 경악한 조정은 [[어윤중]]을 내려 보내 동학교도들을 달래려고 시도한다. 한편 조정은 [[동학]]교도들이 [[한성부|서울]]로 진공할 것을 크게 우려하고 있었는데 [[강화도]]와 [[평양]]의 병력을 [[수원시|수원]]과 [[용인시|용인]]에 급파하고 [[한성부|서울]]의 군사들을 대기시키자는 논의에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외국 군대(외세)를 동원하자는 의견'''(?)을 내놓는다. 조정은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주장에 크게 반대했지만,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청나라]] 군사를 쓰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냐"는 입장을 계속 고수했다. "어차피 [[원세개|위안스카이]]가 지휘하는 청군이 [[조선]]에 주둔하고 있었으니 청군의 힘을 빌리자"는 것이었다. 한편 어윤중은 [[동학]] 교인들을 타일러서 해산시키는 데 성공했다. 사실 해산이 신속했던 것은 [[동학]] 지도부가 [[전봉준]]을 비롯한 과격파에 스스로가 놀랐기 때문이었다. [[전봉준]] 등은 [[전라도]] [[김제시|금구]]로 이동하여 또 집회를 가졌고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분노하여 마침내 봉기하게 된다. 자세한 것은 [[동학농민운동]] 항목 참조. 조정은 황토재에서 관군이 패퇴했다는 소식을 듣자 홍계훈과 장위영 병력을 급파하지만 장성 전투에서 또 패전보를 듣고 전라 감영까지 함락 당하자 마침내 고종과 민영준은 [[원세개|위안스카이]]와 접촉하여 청군의 도움을 적극 요청하게 된다. [[원세개|위안스카이]]는 이에 "간단한 일"이라고 호언장담했고 이에 [[이홍장]]도 파병을 결정하여 [[아산만]]에 청군이 도착한다. 그런데 동학농민군은 홍계훈의 독일제 쿠르프 야포 포격에 잇달아 패해 더 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있었고, 청군의 등장에 [[일본제국군|일본군]]이 [[톈진 조약]]을 빌미로 덩달아 [[인천]]에 나타나면서 조선도, 청도, 농민군도 동시에 당황한다. 농민군은 "이러다가 나라가 외세의 전쟁터가 되겠다"고 [[전주 화약]]을 관군과 맺고 평화적으로 물러났고, [[조선]] 정부는 [[청나라|청]]과 [[일본제국|일본]]에 모두 철수를 요구한다. [[청나라]]는 이에 곧바로 응했지만 [[일본제국|일본]]은 "우리가 알기론 동비(東備, 동학농민군)들이 소탕되지 않았다."란 억지를 부리며 철수를 완강히 거부한다. 그러자 [[청나라]]는 [[일본제국군|일본군]]이 혹시 [[뒤통수]] 맞을 것을 두려워하여 저러는가 싶어서 동시에 철수하잔 제안을 했으나 [[일본제국|일본]]은 이마저도 거부한다. 이에 [[조선]]의 요청을 받은 [[러시아]], [[미국]], [[영국]]이 중재에 같이 나섰으나 일본은 이 역시 매몰차게 거부했고 역으로 [[청나라]]에 같이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고 [[조선]]의 내정 개혁에 착수하잔 제안을 한다. [[청나라]]는 "[[동학농민운동|동학 란]]은 이미 다 끝났고 [[조선]]의 [[개혁]]은 [[조선]] 사람들의 일인데 왜 니들이 더 난리냐?"라고 거부했고 [[일본제국|일본]]은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적으로 공격을 퍼부어 [[아산만]]에서 [[청나라]] 군함들을 전격 침몰시키니 이것이 바로 [[청일전쟁]]의 시작이다. [[일본제국|일본]]은 난데없이 [[경복궁]]을 야밤에 기습으로 불법점령하고 [[조선]]의 대청 독립 선언(조선에 대한 청나라 종주권 포기)을 강요한 다음에 [[고종(대한제국)|고종]]을 위협, 겁박하여 [[청나라]]의 모든 조약을 전면 파기하고 모든 청군은 [[조선]]을 떠나라는 [[고종(대한제국)|국왕]]의 명령서를 받아낸다. [[일본제국|일본]]은 [[흥선대원군|대원군]]을 포섭하여 [[고종(대한제국)|고종]]에게서 빼앗은 전권을 위임한다. [[흥선대원군|대원군]]은 [[여흥 민씨|민씨]] 일족들을 숙청하면서 내정 개혁에 착수하려 했지만 문제는 [[흥선대원군|대원군]] 역시 [[고종(대한제국)|고종]]과 마찬가지로 [[일본제국|일본]] 때문에 별다른 힘이 없는 [[바지사장]] 같은 느낌이라 할 수 있다. 실세는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조선)|김윤식]], [[박정양]]을 비롯하여 [[일본제국|일본]]의 뒷배, 후원을 받는 친일적 성향을 띄는 新급진 개화파들이었다. '''군국 기무처(軍局機務處)'''가 설치되고 [[갑오개혁]]이 새로 실시된다. 이 시기에 [[노비제]], [[신분제]]가 폐지, 철폐되었고 [[도량형]]의 통일, [[화폐]] [[개혁]], [[세금|조세]]의 금납화, [[재정]] 일원화가 실시되었다. 과부의 [[재혼|재가]] 허용, [[조혼]] 금지, [[과거제]] 폐지, 과도한 고문([[압슬|압슬형]]) 폐지, [[연좌제]] 폐지도 동시에 실시되었으며 지방관(사또와 같은 수령)의 개인 사법권도 박탈하고 형사적인 [[재판소]]를 설치하여 사법권을 일원화 했다. 한편 자신이 [[일본제국|일본]]에게 이용만 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흥선대원군|대원군]]은 [[전봉준]][* 이 과정에서 [[흥선대원군|대원군]]에게는 [[고종(대한제국)|고종]] 밀서 [[위조]] 의혹이 있다. [[동학]] 세력은 [[고종(대한제국)|고종]]의 밀서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흥선대원군|대원군]]의 후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다 뻥이다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중에서 가장 유력한 것이[[흥선대원군|대원군]]이 [[고종(대한제국)|고종]]의 밀서를 [[위조]]해서 [[동학]]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일본제국|일본]]이 [[경복궁]]을 기습 불법점령한 사건의 영향으로 [[일본제국군|일본군]]의 감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밀서를 보낼 상황이 아니었고 [[동학]] 내에서도 [[일본제국|일본]]에게 [[고종(대한제국)|왕]]이 위협받고 있는데 2차 봉기를 할 수 있느냐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흥선대원군|대원군]]이 [[고종(대한제국)|고종]]의 밀서를 위조했다고 본다면 이 모든 의문들이 해결되기 때문이다.], [[이홍장]] 등과 은밀히 접촉하면서 힘을 합해 [[일본제국군|일본군]]을 몰아내고 자신에게 권력을 쥐어달란 [[로비]]를 하고 있었는데 청군이 [[평양]] 전투를 비롯해서 [[일본군]]에게 개 박살나고 동학 농민군도 [[우금치 전투]]에서 처참히 패배하면서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자세한 것은 [[청일전쟁]]과 [[동학농민운동]] 항목 참조. 어쨌거나 [[조선]]의 주도권을 장악한 [[일본제국|일본]]이 [[러시아]]/[[독일]]/[[프랑스]]의 [[삼국 간섭]]으로 인해 [[요동]]을 빼앗은 걸 다시 토해내는 것을 본 [[고종(대한제국)|고종]]과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제국|일본]]을 견제할 생각을 가지고 인아거일(引啞拒日)이라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제국|일본]]을 몰아내는 외교 정책을 수립하기 시작한다. 한편으로는 [[독일]]과 [[미국]]에도 구조 요청을 보내지만 [[독일]] [[황제]]도 힘이 없었고,[* 이때 [[독일]]의 [[황제]]는 [[빌헬름 2세]]였다.] 미국은 금광(금광채굴권)만 먹었다. == [[을미사변]](1895) == [[청일 전쟁]] 와중에도 [[일본제국|일본]]은 [[김홍집]] [[친일]] [[내각]]을 통해 [[조선]]과 동맹을 불합리하게 체결했고 20개조 개혁안을 통해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실권을 상당수 뺏고 [[명성황후]]의 정사(政事) 개입도 일절 금지했다. 이 와중에 [[청나라]]군 및 [[동학]]군과 내통한 것이 걸린 [[흥선대원군]]은 정치판에서 완전히 실각한다. [[일본제국|일본]]은 [[갑신정변]]의 주역인 [[박영효]]를 내무대신, [[서광범]]을 법무대신으로 내세웠고 [[고종(대한제국)|고종]]으로 하여금 '''[[홍범 14조]]'''를 반포하게 했는데 이 시기 [[고종(대한제국)|고종]]의 호칭은 [[대군주]], [[왕비]]가 [[왕후]], [[세자]]가 [[태자|왕태자]]로 바뀐다. 한편 [[고종(대한제국)|고종]]과 [[명성황후]]는 [[러시아]] 대사 [[베베르]]와 접촉하면서 "우리가 믿을 것은 [[러시아]] [[황제]] 폐하뿐이다."라고 노골적으로 [[알렉산드르 3세]], 그 뒤를 이은 [[니콜라이 2세]]와 [[러시아 제국]]에게 러브콜을 보낸다. 이에 베베르도 고종 부부의 주장에 부응, 화답하면서 본국에 [[조선]]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주장했지만 [[러시아]] 정부는 소극적이었다. 이 와중에 [[영선군|이준용]] [[역모]]사건이 터지는데 흥선대원군의 장손 [[이준용]](고종에게는 3촌 조카)이 박준양, 이태용 등과 합세하여 2차 [[김홍집]] 내각을 없애고 [[고종(대한제국)|고종]], [[순종(대한제국)|태자]], [[명성황후]]를 폐한 후 스스로 [[조선/왕사|왕좌]]에 앉으려 한 것이다. 이를 [[박영효]]와 [[서광범]]이 밝혀내어 자신들의 권위를 공고히 한다. 궁궐 수비대를 [[훈련대]]로 바꾸자는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훈련대]]는 [[일본제국군|일본군]]이 훈련하는 부대고 [[대한제국군 시위대|시위대]]는 [[미군]]이 훈련하는 부대다. 일본을 경계하던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이걸 받아들일리 만무했다.] [[역모]]를 꾀했다고 하는데 체포령이 떨어지자 [[박영효]]는 허겁지겁 [[일본제국|일본]] [[공사관]]을 통해 [[일본제국|일본]]으로 망명했으며 그는 [[명성황후]], [[유길준]], [[이노우에 가오루]]의 모함으로 자신이 실각했다고 멋대로 (허위)주장한다. [[박영효]]에 의해 실각한 [[김홍집]]이 복귀했고 [[박정양]], [[이완용]], 이운용, [[이범진]], [[민영환]] 등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0097|정동 구락부]] 출신의 친미파와 친러파들이 득세(3차 김홍집 내각)하는데 [[박영효]] 중심의 친일 내각이 완전히 실각한 것이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일본제국군|일본군]]에 의해 훈련받던 [[훈련대]]도 강제 해산해버렸으며 이에 분노한 [[일본제국|일본]]은 [[군인]] 출신의 [[미우라 고로]] 공사를 부임시켰는데 [[이노우에 가오루]]는 바로 귀국하지 않고 보름이나 그와 같이 지내며 [[을미사변|모종의 계획]]을 꾸몄다. 그 결과가 친청파이자 친러파였던 [[명성황후]]를 잔인하게 시해한 [[을미사변]]이다. [[을미사변]]에는 [[흥선대원군]]도 동석하여 명분 비슷한 것을 갖추었고 [[홍계훈]]과 [[이경직]]을 죽이고 [[명성황후]]를 시해한다. 이 와중에 [[낭인]]들은 [[고종(대한제국)|고종]] 앞에서 감히 칼을 겨누고 [[순종(대한제국)|왕태자 척]]의 [[상투|머리채]]를 끌어잡는 등 잔혹한 행패를 부렸다. [[미우라 고로|미우라]] 공사는 [[고종(대한제국)|고종]]의 부름에 입궐하는 척하며 입궐하여 친미파와 친러파를 내쫓고 친일파 [[이재면]], [[조희연(1856)|조희연]], [[유길준]]으로 새로운 내각(4차 [[유길준]]/[[김홍집]] 내각)을 구성한다. 각국 공사들의 추궁에 [[훈련대]]의 짓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얼버부리지만 워낙 증인들과 목격자가 정말 많아서 곧 거짓말인게 드러난다. 새로운 내각의 핵심은 [[유길준]]이었는데 그의 주도하에 [[을미개혁]]이 실시되고 [[단발령]]이 실시되어 [[고종(대한제국)|고종]]과 [[순종(대한제국)|순종]]이 같이 먼저 [[상투]]를 자르고 [[머리카락]]을 자른다. 거의 연금 상태의 [[고종(대한제국)|고종]]은 [[러시아]]와 [[미국]]의 [[외교관]]들과 비밀리에 접촉하며 [[일본제국|일본]]의 [[독살]]을 우려하여 아예 그들이 만들어온 [[음식]]들 만을 먹으며 연명했다. 그 와중에 [[명성황후]]가 단순히 어디 피한 것이 아니라 외세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다는 정황이 포착되면서 근왕파와 민심이 매우 요동치기 시작한다. [[이재순]], [[이도철]] 등의 근왕파들은 [[이완용]], [[이범진]] 등의 친미파와 친러파, [[미국]]과 [[러시아]]의 외교관들과 합세하여 [[고종(대한제국)|고종]]을 [[미국]] [[공사관]]으로 탈출시키려는 [[춘생문 사건]]을 일으키지만 일부 대대장의 밀고로 [[군부]] 대신 [[어윤중]]에 의해 진압/저지당한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0097|정동 구락부]] 인물들은 각국 공관에 대피한다.[* [[일본제국|일본]]은 이 사건을 핑계 삼아 [[미우라 고로]]를 풀어준다. 왜냐고? "[[서양]]이 [[조선]]에 간섭하는데 우리가 간섭 못할게 어디 있냐?"란 논리이다.] 한편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유림]]들에게 암암리 밀사를 보내 대대적으로 [[의병]] 궐기를 촉구했고 [[1896년]](고종 33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궐기하였으며 [[의병]]들은 애꿎은 [[수령]]들을 참수하고 여러 고을을 점거했는데 이것이 [[을미의병]]이다. == [[아관파천]](1896) == [[을미의병]]으로 인해서 [[한성부|서울]]에 주둔한 군사 대부분이 각 지방으로 내려가 감시가 소홀해지자 [[고종(대한제국)|고종]]은 [[궁녀]]가 타는 [[가마(탈것)|가마]]를 타고 아들 [[순종(대한제국)|왕태자 척]]과 함께 대궐을 두고 [[러시아]] [[공사관]][* [[러시아]]가 아닌 [[한성부|서울]] [[정동]]에 있는 [[주한러시아공사관|러시아 공사관]]이다. 분명 [[러시아]] [[공사관]]이니 [[조선]] [[땅]] 안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을 말하는거다.]으로 피신하는데 이것이 바로 '''[[아관파천]]'''이다. 베베르는 [[인천광역시|인천]]항에 정박시켜 놓은 [[러시아]] 수병 117명을 동원해 즉각 [[공사관]]에 배치함으로 공사관을 지켰는데 단순히 117명이 문제가 아니라 [[러시아]] [[제국]]이 [[고종(대한제국)|고종]]을 손아귀에 쥐고 있음을 분명하게 한 제스처였다. 사실 [[러시아]] 공사인 베베르는 일찍이 고종이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19970209303|일찍부터 막대한 이권으로 매수]]하다 시피한 인물이었고 후일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친러 [[정책]]을 펴는 배경이 된 인물이었다.[* 실제로 베베르는 이후 열심히 친조선 정책을 펼쳤는데 너무 친조선적으로 활동한다라는 이유로 2번이나 조선 공사 직에서 파면당할 상황이 온다. 처음은 주일 공사가 우연히 죽으면서 유임되는데 이 때 [[아관파천]]이 터진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이 베베르를 유임시켜 달라고 러시아 외무부에 직접 [[편지]]를 보낸 것까지 남아있다. 이후에도 [[고종(대한제국)|고종]]을 위한 활동을 많이 했으니 매수는 대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즉각 "[[김홍집]] 내각의 관료들을 죽이라"는 교지를 내렸고 군중이 [[김홍집]], [[정병하]] 등을 노상에서 살해했고 [[유길준]] 등은 황급히 [[일본제국|일본]]으로 [[망명]]한다. == [[독립협회]](1896~1898) == [[아관파천]] 이후에도 [[고종(대한제국)|고종]]은 한동안 [[러시아]] [[공사관]]과 기존의 궁을 오가면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부각된 단체가 '''[[독립협회]](獨立協會)'''이다. 원래는 [[독립문]]을 건립하기 위해서 발족했던 단체였으나, 이후 [[독립신문]] 발간 등의 독자적인 활동을 하면서 조직이 그대로 생명력을 이어가면서 별도의 단체가 되었다. 초기 [[독립협회]]는 친정부적인 형태로 출범하였으나, 개창자 중 대표적인 인물인 [[서재필]][* [[갑신정변]]을 주도한 그 서재필이 맞다], 그리고 이후에 활동하는 [[박영효]] 계열 등의 영향으로 급진 개화 단체의 성격이 강해졌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의 환궁 이후에는 개혁 방안을 두고 [[고종(대한제국)|고종]]과 갈등을 빚었으며 [[대한제국 중추원|중추원]] 설립 과정에서 독립협회의 과욕, 친일성향을 보이던 [[독립협회]]에 대한 [[고종(대한제국)|고종]]의 불신 등이 겹친 상황에서, 결국 중추원의 권한남용 사건이 터지면서 [[고종(대한제국)|고종]]이 군대를 동원해 강제로 무력 해산시켰다. 이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독립협회]], [[독립문]], [[독립신문]], [[대한제국 중추원]], [[광무개혁]] 항목 참고.[* 워낙에 모순적인 부분도 많고 흔히 교과서 등에서는 쉽게 언급 할 수 없는 부분도 많아서 내막이 잘 알려지지 않은 단체이다.] == [[대한제국]] 선포, [[광무개혁]](1897) == [[고종(대한제국)|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는 동안 [[조선]] 내외부에서는 외세의 간섭을 막고 자주적으로 근대 국가를 세우자는 주장이 자주 벌어졌고, 외부에서는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러시아의 견제를 위해 [[고종(대한제국)|고종]]의 환궁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에 [[아관파천]]이 시작된 지 1년 뒤인 [[1897년]](고종 34년) 2월에 [[고종(대한제국)|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덕수궁|경운궁]]으로 정식 환궁하였다. 또한 [[고종(대한제국)|고종]]은 환궁 후 [[10월 26일]]에 정식으로 국호를 [[황제]]의 [[국가]]를 뜻하는 '''[[대한제국]](大韓帝國)''',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며 [[원구단]]을 축조하여 그곳에서 [[대한제국/황사|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여 독립된 자주국가임을 공식 선포하였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직후 [[고종(대한제국)|고종]]은 '''[[광무개혁]](光武改革)'''을 전면 추진하였다. 자세한 것은 [[광무개혁]] 항목을 살펴보자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이 개혁을 통하여 근대식 정부와 행정제도 [[국민개병제]]와 도시의 근대화를 추진하고 '[[대한제국/황사|황권]](皇權)'을 더욱 강화하려 했지만, 결국 [[일본 제국|일제]]가 [[러일전쟁]]을 일으켜 군대를 주둔시키고 [[한일의정서]]의 강압적인 체결과 [[일본제국|일본]]의 승리로 내정간섭이 심화되면서 중단되었다. == [[러일전쟁]](1904~1905) == 당시 [[대한제국]]은 [[삼국 간섭]] 이후로 꾸준히 신경 쓰던 [[인아거일]] 정책을 통해 [[러시아]]의 힘으로 [[일본제국|일본]]을 막으려 했고 [[일본제국|일본]]은 [[대한제국]]을 [[식민지|식민지화]]하기 위해서 당연히 [[러시아]]와 일전을 벌여야 했다. [[러시아]] - [[일본제국|일본]] 간의 갈등은 첨예해졌고 결국 [[1904년]](광무 8년)에 [[러일전쟁]]이 터진다. [[일본제국|일본]]은 또다시 선전포고도 없는 기습으로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 [[군대]]를 공격했고 [[중립]]을 선포한 [[대한제국]]을 강제로 동맹국으로 끌어들였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이범윤을 러시아군에 합류 시켰다고 한다.] '''이때 [[독도]]를 멋대로 자기네 땅이라고 불법으로 편입하고 다케시마(竹島)로 불법 개칭 후 선언하였다.'''[* [[일본제국|일본]]이 다케시마(竹島)으로 불법 개칭하고, 주인없는 땅이라고 전에 공포했던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칙령 제41호('울릉전도와 죽도, 석도([[독도]])는 [[울도군]]에 속한다.')'''는 싸그리 무시한채 자기네 영토에 있는 [[시마네현]]에 불법 편입하여 [[일본제국|일본]]이 자국의 영토라고 인식하게 되었다고 한다. 허나, [[일본제국|일본]]이 [[독도]]에 대한 억지 영토 영유권 주장을 한다고 해도, 100년동안 실효적 지배 점유를 한다면 그나라의 영토로 자연스레 귀속되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일본]] 영토로 넘어갈 가능성은 정말 현저히 낮다.] [[일본제국군|일본군]]은 [[러시아]] [[군대]]에게 [[청일전쟁]]만큼 압도적이지는 않았지만, 끝내 승리를 거둔다. [[러일전쟁]]은 [[미국]]의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대통령]]의 중재 아래에 [[포츠머스 조약]]을 맺고 최종적으로 [[일본제국|일본]]의 승리로 끝을 맺는다. 최후의 대일 견제 세력인 러시아가 물러나면서 [[대한제국]]은 그야말로 [[일본제국|일본]] 앞에 잘차려진 따뜻한 한 끼의 밥상이 되고 만다. 여담으로 [[시어도어 루즈벨트|루즈벨트]] [[미국 대통령|대통령]]은 [[포츠머스 조약]] 중재 대가로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 == [[을사늑약]](1905) == [[러일전쟁]]의 종전 이후 [[일본제국군|일본군]]은 [[덕수궁|경운궁]]을 완전 장악하고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덴노]]의 위협적인 국서(國書)를 가지고 [[고종(대한제국)|고종]]을 직접 알현한다. 국서의 내용인즉 '[[간디(문명 시리즈)|순순히 외교권(外交權)을 넘긴다면 유혈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였다. 정말로. [[메이지 덴노|덴노]]의 뜻이라기 보단 [[일본제국|일본]]을 움직이던 [[일본제국|일본]] 고위 수뇌부들의 뜻이었겠지만.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이는 나라를 망치는 일이니 죽는 한이 있어도 응할 수 없다"고 처음에 매우 강경하게 대응했다. 이왕 체결할 김에 최대한 [[대한제국]]에 관대한 처우라도 바라자는 안을 내놓은 이가 있었으니, 이가 바로 학부 대신 [[이완용]]'이다. 그리고 [[고종(대한제국)|고종]]은 "경들이 대책을 강구해 보라"고 자신은 인후통을 핑계를 대어 물러나버리고 8대신을 이토 히로부미와 면담하게 하였다.[* 이때 [[이토 히로부미]]는 '이 [[대한제국|쓰레기 같은 나라]]에도 [[친일파|충신]]이 있었군요!' 하면서 감탄했다.] 그런데 [[이완용]]은 거의 [[외교|외교권]]을 송두리째 [[일본제국|일본]]에게 갖다 바치는 결과를 낳았으니... 자세한 것은 [[을사늑약]] 항목 참조. 이후 [[대한제국]]은 [[최익현]]을 비롯한 [[유림]]들은 물론이고 거의 전국이 발칵 뒤집혀서 대혼란에 빠졌다.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도 이때의 일. 곳곳에서 [[을사늑약]]을 규탄하는 자결자([[민영환]]이 대표적으로 을사조약의 부당함에 스스로 자결했다.)들이 속출했고 백성들은 나라가 망했다고 혼비백산했다. [[평민]], [[유림]]을 가리지 않는 광범위한 [[의병]]이 일어나니, 이가 바로 [[을사의병]]이다. 하지만 이러한 반항 움직임도 [[을사늑약]]을 되돌리진 못 했다. == [[헤이그 특사사건]]과 [[일본제국|일본]]에 의한 [[고종(대한제국)|고종]]의 강제 퇴위 [br]그리고 [[정미 7조약]], [[대한제국]] [[군대]] 해산(1907) == >'''"[[고종(대한제국)|짐이]] 살해당해도 나를 위해서 아무런 신경을 쓰지 마라. 너희들은 특명을 다하라. [[대한제국]]의 독립주권을 찾아라."''' >----- > - [[https://www.yna.co.kr/view/AKR20190311159500082|고종의 '헤이그 특사'인 이위종과 이상설이 로이터 통신과 한 인터뷰 내용]][* 인터뷰에서는 '''"[[고종(대한제국)|황제]]의 마지막 전언"'''이라고 했다.] [[을사늑약]]의 체결은 단순히 [[외교|외교권]]을 강탈한 수준이 아니었는데 사실상 [[대한제국]]의 종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이 노골적으로 도움을 요구했던 [[미국]]과 [[영국]] 등의 [[국가]]들도 냉담한 반응을 보이며[*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몇 개월 전 [[1905년]](광무 9년) 7월, [[미국]]과 [[일본제국|일본]]은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맺어 [[미국]]은 [[필리핀]]을 점령하고 [[일본제국|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보호권을 갖는 것에 비밀리에 합의했다. [[1905년]](광무 8년) 8월, [[영국]]과 [[일본제국|일본]]은 [[영일동맹#s-3|제2차 영일 동맹]]으로 [[영국]]은 [[일본제국|일본]]이 [[대한제국]]에서 갖는 이익을 보장하고 [[일본제국|일본]]은 [[영국]]의 [[인도]] 지배를 옹호/승인하기로 서로 합의하였다. 즉, [[일본제국|일본]]이 [[대한제국]]을 [[식민지]] 지배하겠다는 내용에 대해 [[미국]]과 [[영국]]이 이미 차례로 승인했던 것.] 각국의 [[대사관]]을 강제 철수시켜버렸다. 이쯤 되면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최선적으로도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으며 [[일본제국|일본]]은 [[고종(대한제국)|고종]]의 발악을 막기 위하여 [[고종(대한제국)|고종]]의 권한을 대폭 축소했고 차례로 [[대한제국|한국]]의 권리들을 차근차근 박탈했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은 마지막 시도로 [[이준(열사)|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망명]] 특사로써 [[모스크바]]의 [[이범진]]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했지만 그들은 사전에 이 일을 안 [[일본제국|일본]]의 수작으로 문전박대당했다. [[이준(열사)|이준]]은 [[헤이그]]에서 객사(客死)하고 말았으며 이는 [[이준(열사)|이준]]이 [[할복]] [[자살]]했다는 [[야사(역사)|야사]]를 낳았는데 이것이 [[헤이그 특사사건]]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대한제국)|고종]] 앞에 나아가 "[[헤이그 특사사건|멋진 일]]을 하셨더군요. 근데 앞으로는 좀 더 공공연하게 하시지 그러십니까?"라고 대놓고 비웃었으며 [[이완용]]과 [[송병준]]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고종(대한제국)|고종]]의 [[퇴위]]를 은근히 협박하듯이 강요했다. 하지만 많은 기록에서 의외로 이완용과 고종의 친분이 두터웠다는것을 나타내기에 사실로 보기에는 어려운 부분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이완용이 칼빵 당한뒤 고종이 궁중의사를 두명이나 급파 후 매일 시종을 보내 간호할 필요도 없이 죽게 내버려두면 될 문제였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은 [[박영효]]를 궁내부 대신으로 삼으며 [[박영효]]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박영효]]는 이를 무마하려 시도하지만 실패했고 [[이완용]]과 [[송병준]]은 [[인간 말종|전화선까지 끊고는 고종을 사실상 궁에 감금하였다.]] 이에 [[고종(대한제국)|고종]]은 마지 못하여 [[대리청정]]의 명을 내렸지만 얼마 후에 [[일본제국|일본]]에서 새 [[대한제국/황사|황제]] 즉위를 축하한다는 문서가 오자 [[이완용]]은 아예 [[내시]] 2명을 데려와서 각각 [[고종(대한제국)|고종]]과 [[순종(대한제국)|순종]]의 자리에 세우고 날치기로 [[대한제국/황사|황위]]를 [[고종(대한제국)|고종]]에서 [[순종(대한제국)|순종]]으로 교체해버렸다. >각 부문의 유사(有司)들은 자기 직책을 부지런히 수행해야 하겠으나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박영효(朴泳孝), 시종원 경(侍從院卿) 이도재(李道宰), 전 홍문관 학사(前弘文館學士) 남정철(南廷哲)은 직책이 더욱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거세게 직책을 회피하였으니 그 진상을 덮어둘 수 없습니다. >---- >순종실록 1권, 순종 즉위년 7월 21일 양력 3번째기사 1907년 대한 광무(光武) 11년이완용, 조중응이 직책을 회피한 박영효, 이도재, 남정철 등을 탄핵하다[[https://sillok.history.go.kr/id/kzb_10007021_003|#]] >"평리원 재판장(平理院裁判長) 조민희(趙民熙)의 보고서를 받아보니, ‘피고 박영효(朴泳孝), 이도재(李道宰), 남정철(南廷哲)의 죄안을 심리한 결과 피고들은 모두 궁부(宮府)의 중임을 띠고서 황태자(皇太子)가 정사를 대리함을 진하(陳賀)하는 예식을 거행할 때 들어와 참가하지 않고 혹은 병을 핑계대기도 하고 혹은 통지를 받지 못하였다는 등의 말들로 공술하였습니다. 더없이 중대한 예식을 태연히 회피하였으니 처벌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피고들은 모두 《형법대전(刑法大全)》 제226조의 관리들이 임명받았거나 재임 기간에 일을 당하여 사고로 핑계대거나 병이 있다고 핑계하고 회피하는 자는 중한 법조문에 의하여 각각 태형(笞刑) 80대에 처한다는 율문을 적용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평리원에서 원래 제기한 법조문에 의거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 >순종실록 1권, 순종 즉위년 8월 22일 양력 3번째기사[[https://sillok.history.go.kr/id/kzb_10008022_003|#]] 그렇게 [[1907년]](광무 11년) [[7월 19일]],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일본제국|일본]]의 압박과 친일적인 주변 [[신하]]의 끈질긴 [[퇴위]] [[강요]]에 끝내 못이겨 강제로 [[퇴위]]했고 [[7월 20일]], [[한국사]] 최후의 [[군주]]인 [[순종(대한제국)|순종]]이 주변의 강요와 협박으로 강제 즉위했다. 형식은 [[양위]]였으나 퇴위식이자 즉위식인 이날 [[고종(대한제국)|고종]]과 [[순종(대한제국)|순종]] 모두 불참하였다. [[대한제국]]의 [[군대]]는 해산당했으며 그 결과로 [[정미의병]](丁未義兵)이 일어나 [[숭례문]]에서 치열한 [[남대문 전투]]가 크게 일어났지만 일본군의 압도적인 [[무기]]와 [[병력]] 열세 차이로 밀려나 패배했다. [[1909년]](융희 3년), [[기유각서]] 체결로 대한제국의 [[사법]]권 및 교도 행정권이 [[1910년]](융희 4년), [[한일약정각서]]의 체결로 [[경찰|경찰권]]이 [[일본제국|일본]]에 넘어갔고 결국 [[1910년]](융희 4년) [[8월 29일]], '''[[경술국치]](庚戌國恥)'''로 5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조선]]의 명맥을 이은 [[대한제국]]이 성립된 지 13년만에 [[멸망]]했다. 이후 [[고종(대한제국)|고종]]과 [[대한제국/황실|황족]]들은 [[일본제국|일본]]의 강요로 [[일본 정부]]에게서 [[왕공족|작위]]와 은사금을 억지로 받았다. == [[한국 독립운동|항일]]과 망명시도(1907~1910) == >[[1908년]](융희 2년) 봄 '''[[이위종]]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고종(대한제국)|고종황제]]의 독립자금 1만 루블(Ruble)을 가지고 연해주의 노보키예프스코예(Novokiyevskoye)에 도착했다. 한러국경에 가장 가까운 러시아 마을인 연추는 전신국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보의 집결지로서 이미 러일전쟁 초기부터 한러군사협력 및 항일의병전쟁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에 황제의 자금이 이범윤, 안중근, 최재형 등이 참여한 연해주 대한독립군 조직인 同義會 창설에 소요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 >따라서 '''大韓義軍은 [[1907년]](광무 11년)에 해산된 구한국군대를 계승하여 항일독립전쟁을 이끌어 나갈 주력부대가 됨으로써 [[고종(대한제국)|고종황제]]가 그 최고통수권자가 되었음은 명백하다.''' 대한의군의 설립은 [[1908년]](융희 2년) 11월에 구체화된 '''[[고종(대한제국)|고종황제]]의 블라디보스톡 파천계획의 전제조건으로서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연해주 망명정부수립 구상의 일환이었다.''' 1910년 7월 28일 “[[고종(대한제국)|고종황제]]로 하여금 노령의 [[연해주]]로 조속히 파천하여 망명정부를 세워 독립운동을 영도”하라고 청한 十三道義軍都總裁 유인석과 이상설이 연명으로 올린 상소는 '''항일전쟁을 지휘할 최고 사령관이 [[고종(대한제국)|고종황제]]임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 >그 결과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는 [[고종(대한제국)|고종황제]]를 정점으로 한 대한의군의 항일독립전쟁사의 序幕에 해당되는 바, 이는 [[1945년]]까지 항일독립전쟁을 지속시킬 동력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대한의군의 활동에 정통성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지대하다. >----- >- [[고종(대한제국)|고종황제]]와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1904~1910) 2012, vol., no.73, pp. 95-142 (48 pages) >본 연구는 [[러일전쟁|러일개전]](1904)에서 [[헤이그 특사|헤이그특사]] [[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시기(1909)까지 '''[[고종(대한제국)|고종황제]]의 항일독립운동'''을 [[고종(대한제국)|황제]]의 강제 [[퇴위]](1907)를 정점으로 양 시기로 구분하여 고찰한 것이다. 전기는 개전 이후 단교되었던 한러관계가 주한공사 파블로프가 지휘하는 상하이정보국과 [[고종(대한제국)|고종황제]]의 비공식 정보협력 채널을 통해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던 시기였다. 전쟁기간 중 러시아유학생들이 주축이 된 상하이정보국의 한국분과 요원들의 활동은 '''한러간의 정보협력뿐만 아니라 전후 이들이 의병활동에 투신함으로써 [[고종(대한제국)|고종황제]]의 항일독립운동에 기여했음을 알 수 있었다.''' 후기는 '''[[헤이그 특사사건]] 이후 [[고종(대한제국)|고종황제]]가 측근들을 통한 소극적인 저항보다는 [[연해주]]로 망명하여 망명정부를 통해 직접 독립운동을 지휘하고자 다양한 시도를 했던 시기였다.''' 이를 위해 [[고종(대한제국)|고종황제]]와 [[러시아]] 당국간의 비밀교섭 창구 역할은 상하이주재 러시아 상무관이던 고이예르와 현상건이 맡았으며 이들은 [[러일전쟁]]기 파블로프의 상하이정보국에서 공조했던 전력이 있었다. 따라서 [[러일전쟁]] 이후 한러관계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 정보협력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 >- [[고종(대한제국)|고종황제]]의 독립운동과 러시아 상하이 정보국(1904~1909) 81 (2014.12), pp.43-84 [[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150228/69852717/1|[토요판 커버스토리/단독]고종의 ‘항일 스파이’… 러와 손잡고 싸웠다]] [[https://vod.kbs.co.kr/index.html?source=episode&sname=vod&stype=vod&program_code=T2013-0132&program_id=PS-2013116806-01-000&broadcast_complete_yn=Y&local_station_code=00§ion_sub_code=05|고종의 시종무관 김인수 참령의 후손 100년 만에 나타나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은 망명을 해 국외에서 외교적 수단을 동원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려고 했다. 첫 망명시도는 [[1990년대]] 탈냉전 이후 [[러시아]] 문서들이 공개되면서 밝혀졌다. [[1904년]](광무 8년), [[러일전쟁]]의 위험이 커지자 [[고종(대한제국)|고종]]은 [[러시아]] 측에 [[망명]] 가능성을 은밀히 타진했다. 이때는 국내의 [[러시아]] [[공사관]] 뿐만 아니라 국외 망명까지 고려한 것이었다.[*박종효,2002,101 박종효 편역, 『러시아국립문서보관소 소장 한국관련 문서요약집』 101쪽] 하지만 이미 전쟁은 막을 수 없는 대세여서 [[러일전쟁]]으로 이어졌고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일본]]의 손아귀에 사실상 떨어졌다. 두번째 망명시도는 [[1907년]](광무 11년), 강제 퇴위당한 바로 그 다음해였다. 당시 [[일본제국|일본]]의 감시를 피해 국외 망명을 시도했고[*박종효,2002,73 박종효 편역, 『한국관련 문서요약집』 73쪽] 3번째 [[망명]] 시도는 [[1908년]](융희 2년) 11월에 있었는데 이번에는 [[러시아]] 측 대일협상파에 의해 저지당했다.[*박종효,2002,74 『한국관련 문서요약집』 74쪽]4번째 [망명]] 시도는 [[고종(대한제국)|고종]]은 [[1910년]](융희 4년) 6월경 다시 [[연해주]] 망명정부 수립을 기도 했었다.[*외교통상부,2003,223~224 외교통상부, 『이범진의 생애와 항일독립운동』, 2003년, 223~224쪽] 즉 고종은 병탄전에만 4번의 망명시도를 했다가 모두 좌절됐고 한일합방 후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사실 이 [[망명]]시도 이전에부터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일본 제국|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러시아]]와 손을 잡은 상황이었다. [[1902년]](광무 6년) 12월 [[한성부|서울]] [[덕수궁|경운궁]]에서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인사차 찾아온 카를 베베르 전 주한 러시아공사에게 “관립노어학교 졸업생 10명을 러시아 군사학교에 입학시키고 싶다”고 부탁하였고 베베르는 [[고종(대한제국)|고종 황제]]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로부터 2년 뒤 [[고종(대한제국)|고종]]이 [[러시아]]의 [[상하이]] 정보국을 통해 특별히 안부를 물었다는 졸업생들이 바로 이들이며 이때 그들 중 9명은 이미 [[러시아]]의 정보요원이 돼 있었다. 이렇게 [[일제강점기]] 한국인 유학생들이 [[고종(대한제국)|고종]]의 밀명을 받고 [[일본제국|일본]]에 대항해 [[러시아]] 정보요원으로 활약한 사실은 [[2015년]]에서야 밝혀졌는데 이는 최덕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러시아]] 국립역사문서보관소를 통해 당시 작성된 [[러시아]] 정부의 비밀 문건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밝혀진 사실로 당시 [[일본제국|일본]]의 침략에 대응해 대한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공동 항쟁에 나섰음을 보여 주는 역사적 사료로 평가된다. 이 당시 유명한 인물로는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시종무관이었던 김인수로 김인수도 [[함경도]]로 파견돼 첩보 활동을 벌였는데 이런 반일 첩보활동은 [[러일전쟁]]의 패전으로 한러 합작으로 운영되던 상하이 정보국이 [[1905년]](광무 9년) 11월경 일시 해체되면서 끝이 나게 된다. 그러나 [[일본제국|일본]]의 [[간도]] 침략으로 위협을 느낀 [[러시아]]가 새로운 인물인 레프 고이예르 상무관을 내세워 [[1908년]](융희 2년), 상하이 정보국을 재건함. 당시 비밀 문건 중에는 고이예르가 2차 [[러일전쟁]]이 일어나면 즉각 한국 의병들에게 무기와 병력을 지원하는 계획을 세운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 무렵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심복인 [[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한-러 정보 협력의 대가로 수만 명의 의병으로 구성된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방안을 [[러시아]] 측과 협의하게된다. 그러나 [[이상설]]의 계획이 [[러시아]]의 갑작스런 비협조로 실패하면서 항일의 방식을 놓고 양측의 시각차가 드러났고 [[러일전쟁]] 패배 이후 [[일본제국|일본]]과 화해 국면에 들어간 [[러시아]]가 [[대한제국|한국]]의 적극적인 무장 투쟁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김인수는 [[대한제국]]의 참령([[소령]])이자 [[고종(대한제국)|고종황제]]의 시종무관이었고 한편으로는 [[러시아]] 국적자이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그의 이러한 신분과 [[고종(대한제국)|고종]]의 반일 친러 행보는 당시 [[일본제국|일본]]의 강한 경계를 받았고 이에 [[일본제국|일본]]은 [[러시아]] 측에 [[러시아]] 국적자인 김인수가 [[대한제국]]의 참령으로 복무하는게 옳지 않다는 식으로 [[러시아]] 측에 강하게 항의하게되지만 '빅토르 김(김인수)이 비록 [[러시아]] 국적자이지만 [[대한제국|한국]] 출신이므로 한국군에 복무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러시아는 앞에와 같은 전문을 보내면 쿨하게 씹었고 이후에도 김인수는 [[대한제국]]에서 [[고종(대한제국)|고종 황제]]의 러시아어 통역관 겸 시종무관 겸 첩보원으로 계속 활약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에 [[러일전쟁]]이 터짐에 따라 결국 [[러시아]]로 탈출하게된다.[* 이후 [[대한제국]]의 [[장교]]이자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시종무관이었던 김인수는 10년만에 [[러시아]] [[제국]]의 [[대령]]으로 나타난다. 중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인수는 [[러시아]] 여성과 결혼하여 [[러시아]] [[제국]]군의 [[대령]]으로까지 진급하게되었으며 김인수 역시 [[1차 세계대전]] 당시 수 많은 [[연해주]] 지역의 항일의병들과 함께 [[러시아]] 제국군 소속으로서 동부전선에 참전하게 된다. 지금도 [[러시아]]에는 김인수 참령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데 후손들도 할머니(김인수의 친손녀)에게 설명을 듣기전까지는 조상님이 [[한국인]]이고 심지어 제정 [[러시아]]의 [[대령]]이었다는 사실 조차 몰랐다고한다. 그 이유가 일단 본인들 외모는 100% [[백인]] 외모이고 제정 [[러시아]]가 [[혁명]]으로 무너진 이후에 제정 [[러시아]]의 [[장교]]이자 간부였던 김인수의 성을 계속가지는 것은 매우 위험했기 때문에 김인수 부인의 성으로 모두 바꾸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것이라고] [[1915년]] [[7월 26일]] 성낙형 등은 [[내관]] 염덕인(廉德仁·또는 염덕신)을 통해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대한제국)|고종]]에게 중·독·영·러가 연합해 [[일본제국|일본]]을 공격할 것이 대세라는 등의 보고서를 올리게 했다. 이 보고서를 보고 만족한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성낙형에게 ‘한중의방조약안’을 가지고 직접 알현하라면서 승낙의 징표로 과거 정조가 사용했던 ‘온여기옥(溫如其玉)’이란 인영(印影·도장)을 찍어 주었다. 그러나 [[고종(대한제국)|고종]] 면담 직전 성낙형을 비롯해 김사준(金思濬)·김사홍(金思洪)·김승현(金勝鉉) 등 다수의 관련자가 검거됨으로써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것이 [[보안법]] 위반 사건이다. 이때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아들이였던 [[의친왕]]도 적극 협력했었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의 해외 망명이 다시 추진된 해는 [[1918년]]이었다. 그리고 이 망명은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생전 마지막 망명시도가 되었다. 이번에는 우당 [[이회영]]이 중심 인물이었다. [[이회영]]의 장남 규학의 아내 조계진(趙季珍)이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생질(외조카)로서 [[고종(대한제국)|고종]]과 사돈인 데다 [[이상설]]과 [[헤이그 특사사건]]을 기획했던 경험을 갖고 있어 [[고종(대한제국)|고종]] [[망명]] 계획에 나서게 했다. 내적인 조건은 우당 [[이회영]] 약전에서 “이때는 마침 [[영친왕]] 이은(李垠)과 [[일본제국|일본]] [[일본/황실|황실]] [[이방자|이방자 여사]]의 혼담 결정으로 [[고종(대한제국)|황제]]의 고민이 지극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이 시종이 ([[이회영]]) 선생의 생각을 상주하자 뜻밖에 쾌히 승낙하셨다”고 전하는 대로 [[결혼|국혼]](國婚) 문제였다. [[순종(대한제국)|순종]]이 후사가 없는 판국에 [[황태자]] [[영친왕]]이 [[일본]] [[여성|여인]]과 [[결혼|혼인]]한다면 [[조선/왕실|조선 왕실]]과 [[대한제국/황실|대한제국 황실]]의 맥은 끊기는 것이었다. [[이회영]]과 민영달은 육로 대신 수로를 이용하기로 하고 [[상하이|상해]]와 [[베이징|북경]]을 저울질하다가 우선 [[베이징|북경]]에 행궁(行宮)을 마련하기로 합의했다. 민영달이 행궁 구입 자금으로 5만원(圓)을 내놓자 [[이회영]]은 [[1918년]] 말께 이득년(李得年)·홍증식(洪增植)에게 건네 [[베이징|북경]]의 동생 [[이시영(정치인)|이시영]]에게 전달하게 했다. 계획은 순조로웠다. 이제 [[고종(대한제국)|고종]]이 [[덕수궁]]을 나서 [[일본 제국|일제]]의 감시를 피해 신하들과 합류하면 됐지만 이때 [[고종(대한제국)|고종]]은 [[1919년]] 1월, 갑자기 급서하면서 실패한다. 그리고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죽음]]이 [[독살]]이었음은 친일 성향의 [[윤치호]] 일기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윤치호]]는 또 다른 친일파 한진창이 전하는 말이라면서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시신 상태를 이렇게 설명했다. “완벽한 건강을 누리던 [[고종(대한제국)|황제]]가 [[식혜]]를 섭취한 뒤 반시간 만에 격렬하게 몸을 뒤틀면서 죽었다. [[고종(대한제국)|황제]]의 팔다리가 하루 이틀 사이에 엄청나게 부풀어 올라서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 할 정도였다. [[혀]]가 닳아 없어지고 치아는 모두 빠져나왔다. 1피트(30.38㎝)쯤 되는 시커만한 줄무늬가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윤치호 일기』 1920.10.13.) [[일본 제국|일제]]가 편찬한 《[[순종실록]] 부록》에 [[덕수궁]] [[이태왕]](李太王·[[고종(대한제국)|고종]])의 와병 기록이 나오는 것은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날인 [[1919년]] [[1월 20일]]이다. 그러나 병명도 기록하지 않은 채 그날 병이 깊어 [[도쿄 도|동경]](東京)에 있는 [[영친왕|황태자]]에게 전보로 알렸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우당 [[이회영]] 실기는 ‘([[고종(대한제국)|고종]]이) 밤중에 [[식혜]]를 드신 후 반 시각이 지나 갑자기 [[복통]]이 일어나 괴로워하시다가 반 시간 만에 [[죽음|붕어]](崩御)하셨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 [[망명]]시도는 아예 헛되지는 않아서 훗날 [[연해주]]는 항일의병들의 주 거점이되었으며 많은 [[의병]] 단체들이 연해주에서 활동하게 되는 계기가 되게된다. == 의문의 최후 [anchor(독살설)] == >완벽한 건강을 누리던 황제가 [[식혜]]를 섭취한 뒤 반시간 만에 격렬하게 몸을 뒤틀면서 죽었다. 황제의 팔다리가 하루 이틀 사이에 엄청나게 부풀어 올라서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 할 정도였다. [[혀]]가 닳아 없어지고 [[치아]]는 모두 빠져나왔다. 1피트 (30.38㎝)쯤 되는 검은 줄무늬가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선명히 나 있었다. >---- >- [[윤치호 일기]] (1920.10.13.) [youtube(-ZZQ0VQNqek)] [[1907년]] 망국의 군주로 완전히 물러난 이후에도 무려 [[1919년]]까지 생존했는데 이는 현대의학의 힘 때문에 장수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국왕 치세+[[대한제국]] 황제 치세+[[태황제]] 치세+([[왕공족]])[[이태왕]] 치세까지 모두 합하면 [[영조]]의 재위 기간조차 넘어가며 정확히 55년이다. 노년임에도 자기관리와 현대의학의 힘 때문에 건강해서 고명딸 [[덕혜옹주]]가 이 시기에 태어났다. 일제가 주선한 [[영친왕]]과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의 [[약혼]]을 반대했지만 영친왕의 보안과 안전을 위해서 어쩔수 없이 눈물 겨자먹기로 받아들이게 된다. [[1919년]] [[1월 21일]], 항상 야참으로 마시던 [[식혜]][* 또는 [[수정과]] 혹은 [[홍차]]라는 설도 또한 있다. 황제가 [[커피]]를 자주 즐겨 마셨다는 것에서 나온 듯.]를 마신 뒤 [[잠자리(동음이의어)#s-2|잠자리]]에 들었다가 깨어나 목이 마르다고 차를 마셨는데, 그 뒤 [[복통]]을 호소하다 각혈한 뒤 [[사망|붕어]]하였다. 왕으로 즉위한 지 55년 째 그리고 황제로 즉위한 지 딱 22년이 되는 날이었다. [[1월 21일]],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 곁방에서 '''[[사망|붕어]](崩御)'''하여 그의 인산일로 하여금 [[3.1 운동]](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게 한, [[3.1 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유난히 많은 [[조선왕 독살설|조선 왕조의 독살 의심 사례]] 가운데서도 대미를 장식한다. 음식물에 [[독]]이 들어 있었다는 소문은 민중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3.1 운동]]의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덕혜옹주]]는 아버지가 [[독살]]당한 것으로 굳게 믿고 [[가쿠슈인]](學習院)에 다니면서도 반드시 먹는 물을 보온병에 따로 챙겨다녔으며,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조현병]]까지 걸렸다. 심지어 [[일본/황실|일본 황족]]인 며느리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이방자 여사]]조차 시아버지가 [[독살]]당했을 거라고 판단했다. [[고종(대한제국)|고종]] 독살설의 증거로 제기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데, 대중사학자 [[이덕일]]의 저서 <누가 왕을 죽였는가> 등을 토대로 하면 다음과 같다.[* [[이덕일]]이 [[노론 음모론]], [[고조선]] 강역 견강부회 등 각종 [[음모론]]으로 악명이 높지만, 의외로 박사 논문이 [[일제강점기]]를 다루고 있으며, 그의 [[고종(대한제국)|고종]] 독살설에 대한 해석은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등의 정론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독살설' 근거를 잘 정리한 것으로서는 가치가 있다.] * 일제의 발표에 의하면 사인은 지병인 [[뇌일혈]]인데, 전조 증상이 분명한 뇌일혈에 비해 고종은 붕어한 당일까지 건강 상태가 매우 양호하였다. * 고종 사후 염습(殮襲, 시신을 깨끗한 여러 옷으로 감싸 봉인하는 일)한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3일 만에 완전히 [[부패]]하여 이가 빠지고 살점이 뚝뚝 떨어졌는데, 이는 [[조선시대]]에 독약으로 자주 사용된 비상(砒傷; 비소 화합물)의 [[비소]] 성분으로 사망 시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이다.[* 비소 중독의 경우는 세포 조직이 먼저 괴사하며 [[사망]]하기 때문에 부패가 이른 편이다.] 고종의 붕어일은 [[양력]] [[1월 21일]], 한 겨울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경우라면 3일만에 부패하는 경우는 당연히 있을 수 없다. * 고종에게 최후의 간식을 올리고 기미한 것으로 보이는 [[궁녀]]들도 이후 [[의문사]]하였다. * 그의 승하가 기록된 《[[고종실록]]》 및 《[[순종실록]]》이 일제에 의해 편찬된 점으로 보아 미심쩍은 구석도 있었다. 《순종실록》 부록에선 [[1919년]] [[1월 20일]] 고종의 와병 기록이 있고, 여기선 정확한 병명에 대한 언급 없이 [[도쿄]]에 있는 [[이왕|이왕세자]] [[영친왕]]에게 전보를 쳐서 알렸고, [[이완용]]과 [[이기용(1889)|이기용]]이 숙직했다는 기록이 전부다. 또한 [[사망]]일 역시 《고종실록》의 [[1월 21일]]인지, 《순종실록》의 [[1월 20일]]인지 불분명한 경우도 있다. * [[조선총독부]]가 칙령 9호로 이태왕 [[죽음|승하]]에 따라 3일 간 가무음곡을 중지한다고 결정했는데, 1주 뒤에 칙령을 내린 점도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해당 책에서 이덕일은 이러한 일을 통해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 간에 뭔 일이 있었을 걸로 추측될 여지가 있다고 봤다.] * [[데라우치 마사타케]] 당시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총리대신]]을 비롯한 고위층에서 이 무렵에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기록도 존재하는데, 이를 고종 암살설과 연계시킬 수도 있다.[* 당시 데라우치는 [[조선 총독]]이 아니라 본토 총리대신으로 승진해 있었고 총독은 [[하세가와 요시미치]]였다. [[암살]]에 개입했을 가능성이야 있지만 내지 정무로도 충분히 바빴었을 사람이 현직 조선 총독을 점프하여 암살에 개입한다는 것은 가능성이 낮다는 반박도 있다.] 정확한 사인을 알 수는 없지만 [[살해]]당했다면 보통 [[이완용]]과 [[이기용(1889)|이기용]][* [[일제강점기]] 때, [[자작(작위)|자작]] 작위와 은사금 3만원을 받았던 인물로 '''고종의 [[5촌]] [[조카]]'''이기도 하다. 친조카인 [[영선군]]은 정적이었던 것 등, 고종은 일가와 사이가 상당히 안 좋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이 배후일 거라고 지목되고 있었다.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고종 독살설의 배후로 [[이왕직]] 장시국장을 지낸 [[한창수]] 남작과 시종관 한상학을 꼽는 이들도 있는데, 이증복은 [[1958년]] 12월 16~19일자 <연합신문>에서 [[1918년]] [[12월 19일]]에 두 한씨가 고종에게 [[독]]이 든 [[식혜]]를 올려서 독살케 했다고 기록했고, 구양근 성신여자대학교 교수가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찾아낸 국민대회 성명서에서도 "그들(이완용 등 친일파)은 궁지에 몰린 상태에서 윤덕영과 한상학을 시켜서 식사와 기미 당번을 하는 두 궁녀로 하여금 밤참에 독약을 타서 올려서 살해했다"는 대목이 있다고 설명했다. 우당 [[이회영]]의 며느리이자 고종의 생질(외조카)인 조계진도 고종 승하 닷새 뒤 [[운현궁]]에 다녀와서 시부에게 이러한 사실을 전한 일화도 있었며, 독립운동가 [[송상도]]가 쓴 <기려수필>의 유신영 편에서 "역신 한상학, [[윤덕영]], 이완용이 고종을 독살했다"는 기록도 있다. 고종의 죽음에 대한 논의와 평가는 [[1910년대]]의 혁명적 환경을 외면하고, 3.1운동의 발생을 고종의 죽음이라는 우연한 사건에 종속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게재되어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전국적인 추모 분위기와 함께 일어난 3.1운동을 살펴보면 당시 [[조선인]]들이 고종을 '''민족의 대표자'''로 인식하지는 않았더라도 '''국가의 상징적 존재'''로는 인식하고 있었다. 비록 고종 자신이 장기간 일본에 시달리면서 유의미한 반격은 거의 못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죽음이 도화선이 된 [[3.1운동]]으로 최초이자 최후로 일본에 큰 유효타를 먹이는 데에 성공한다.[* 그리고 대규모 항쟁이 꼭 모두의 투쟁하자는 암묵적 동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닌 아주 우연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일어나는 경우도 일어난다. 예시로 [[루마니아]]의 공산독재정권이 무너진 것도 그 시작은 그저 반차우셰스쿠 성향의 신부가 강제 이주 판결 및 폭행을 당한 것과 이에 대한 항의집회였다. 그게 커지고 커지다 [[혁명]]으로 연결된 것이다. 그러니 '''전임 군주'''의 죽음은 그 폭발력이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단순한 자연사도 아닌 [[독살]]이라는 설까지 돌고 있으니... 하다못해 [[꼭두각시]] [[군주]]였던 [[순종(대한제국)|순종]]조차도 나라가 망한 뒤 옛 조선의 백성들과 만났을 때 그에게 [[만세]]를 외쳤음에도 [[일본제국|일본]]에서는 아무 제지도 하지 못했고 그가 죽었을 때([[1926년]]) 아버지 때와 마찬가지로 [[6.10 만세운동|만세운동]]이 일어났다.] [[2009년]], 한국사학자 [[이태진]]과 [[이승엽]]은 '고종 독살설'에 대해 심도 깊은 논쟁을 벌인 바 있다. 이태진은 창부용삼랑일기(倉富勇三郞日記)에 대한 분석을 통해 고종독살설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는데, 같은 자료를 분석한 이승엽은 오독의 가능성을 제기한 뒤, 고종 독살설은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조선인]]의 불만과 [[영친왕]]이 [[이방자|일본인 여성]]과의 혼인에 대한 반감에서 야기된 소문의 확대 재생산에 불과하며, 사실임을 증명할 만한 근거는 전무하다고 반박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고종 붕어 직후 보도된 한국과 일본의 자료를 검토하고 재구성하여 고종의 사인에 대해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선 [[1월 20일]]부터 고종의 붕어까지 각 보도 자료 내용을 종합하여 시간 순서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1월 20일]] * 오전 11시 - 고종 기상, 안상호 촉탁의 배진, 아침식사 (매일신보 1919.1.22.) * 오후 3시 - 고종 가미온담탕 진어 (매일신보 1919.1.22.) * 오후 가미오카 대표 촉탁의 2회 배진 (경성일보 1919.1.24.) * 오후 6시 도가와 촉탁의 배진 진맥 (경성일보 1919.1.24.) * 오후 10시 저녁식사(평소 저녁식사 11시) (매일신보 1919.1.27.) * [[1월 21일]] * 오전 1시경 발병 (매일신보 1919.1.29.) * 발병직후 상황 김형배 전의 청심환 처방 (매일신보 1919.1.22.) * 전의가 도가와 촉탁의에게 연락 (경성일보 1919.1.23.) * 2시경 도가와 촉탁의 제일 먼저 배진, [[뇌일혈]] 진단, 고종 20분마다 총 12회 경련 (경성일보 1919.1.23.) * 4시 53분 가미오카 배진, 뇌일혈 진단 (경성일보 1919.3.16.) * 5시 30분 모리야스 배진, 뇌일혈 진단 (매일신보 1919.1.23.) * 6시경 고종 붕어 직전 [[순종(대한제국)|순종]] 참궁, 이후 사망 (경성일보 1919.1.23.) 여기서 [[뇌일혈]] 증세에 대해서는 동일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21일 오전 1시 30분경 왼쪽 손에 마비가 와서 고통에 시달렸다는 오사카매일신문과 고종의 평상시 생활습관이 평소 새벽 3시에 잠들어 오전 11시에 일어나고 오후 3시에 아침을 먹고 저녁식사를 11시에서 12시에 했다는 경성일보하고 [[1914년]] [[12월 31일]]에 측정된 체중 기록에서 고종의 체격이 키 153cm[*A 경성일보]에 몸무게 70[*A 경성일보]~73[* [[1914년]] [[12월 31일]]의 체중 기록]kg이라는 비만체형이라는 것에서도[* 이는 고종이 [[아이스크림]], [[와플]], [[사이다]]처럼 단 음식과 [[삼계탕]], [[추어탕]]처럼 고단백 음식을 좋아한데다 [[야식]]을 즐겨먹었으며 [[운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충분히 발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한편 독살설의 근거로 제시되는 자료는 김명길 상궁이 고종의 시신을 염(殮)할 때 시체에서 피와 살이 묻어나 독살의 의문을 표했던 것, 윤치호일기에 고종의 팔다리가 엄청나게 부어오르고 이가 모두 빠져있다고 한 점 등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보통 시신은 사망 후 하루 안에 바로 염을 하는데 고종의 시신은 4일 정도 아무 조치를 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순종 황제가 아닌 [[도쿄]]에 유학 중인 [[영친왕|황태자]]가 오길 기다렸기 때문이다. 사망 후 시신은 바로 [[부패]]활동이 일어나 급격히 붓기 시작하는데, 건강한 사람의 경우 평소 장내에는 약 1kg의 세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고종은 뇌일혈을 일으키며 다소 체온이 상승하고 밤 10시에 저녁식사를 하여 다소 열이 있었으며, 따뜻한 [[덕수궁 함녕전|실내]]에서 시신을 안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패]]가 심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사망]]소식을 늦게 알린 이유는 [[이왕직]] 사무관 [[곤도 시로스케]]가 이왕직 고관들이 모두 부재중인 상황에서 자신이 대응방략을 놓고 고심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였다. 당시 [[이방자|마사코 여왕]]과 [[영친왕]]의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수의 고위고관들이 [[도쿄|동경(東京)]]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고종의 [[장례식|상(喪)]]을 비밀로 붙이고 혼례를 올린 전례가 있음을 들어 혼례를 먼저 하려고 했으나 왕가의 혈통을 끊으려한다는 소문이 있는 상황에서 혼례를 거행할 때, 소요 사태가 분명 일어날 것이라고 하여 혼례를 연기하고 이후 고종의 소식을 늦게나마 알리게 된 것이다. [[김윤식(조선)|김윤식]]의 <속음청사>에서도 고종의 급서로 아들들(순종, [[의친왕]], [[영친왕]] 등)이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2010년]]에는 일본이 일부러 고종을 독살할 뚜렷한 이유가 없었다는 주장이 국내 연구자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다. 같은 시기 일본에 머물고 있던 [[영친왕]]과 [[이방자]]의 혼례가 본래 [[1919년]] [[1월 25일]]에 예정된 상태이므로, 불과 4일 후에 [[결혼식]]이 예정된 상황에서, '내선일체'(內鮮一体)의 [[이데올로기]]를 홍보할 좋은 기회를 맞이했던 일본이 일부러 [[영친왕|신랑]]의 [[아버지]]인 고종을 제거해 물의를 일으킬 근거가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고종 [[망명|망명설]]을 부정하거나 사전에 막아 버리는 것이 더 낫다는 입장에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망국의 군주, 고종 황제의 [[장례식]]은 일본의 강요로 전통식으로 아닌 일본식으로 치러졌다. 여기서 말하는 '전통식(傳統式)'은 일본식으로 치르는 [[장례식]]과는 다르게 사후 몇개월이 지나서 [[장례]]를 치르는 것이 조선과 대한제국의 전통이자 관습이었는데, 고종은 [[일제강점기]] [[이왕가]]의 '[[덕수궁]] [[이태왕]]' 신분으로 승하했기 때문에 돌아간지 얼마 안돼서 바로 짧게(1~2개월 만에) [[장례]]를 치른 것이다. [[장례]]는 일본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의 장례를 기준으로 하여 장의괘장에 야마가타 이사부로, 제관장에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가족)|양자]] 이토 히로쿠니 등을 각각 지명했다. 기존 전통식 국장과는 다르게 대여와 신연을 분리해 훈련원과 [[종로]]로 각각 향했다. [[3월 3일]]에는 훈련원에서 '국장식'이라는 별도의 식을 열어 두 행렬이 동대문 밖에서 만났고, [[청량리]]에서 노제를 치르고 현재의 [[남양주]]가 있는 [[홍유릉]] 구역으로 향했다. 위에 언급하였듯이 일본은 혼례를 앞두고 [[고종(대한제국)|고종]]을 죽일 이유가 없었는 시각에서는, [[뉴욕 타임즈]]에서는 고종이 [[자살]]을 하였다고 잘못 기재, 보도한 것도 그 연장선으로 본다[[https://www.nytimes.com/1919/03/18/archives/say-yi-heui-killed-himself-emperor-of-korea-objected-to-heirs.html?searchResultPosition=1|#]]. [[파일:external/playculture.chosun.com/2009030200816_0.jpg]] [[2009년]]에는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지시로 친일파 대신들이 독약을 탔다는 증거가 처음으로 발굴되었다는 [[http://playculture.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3/02/2009030200926.html|기사]]가 나왔는데, 이는 기자의 설레발 혹은 제목 낚시. 기사를 잘 읽어보면 "데라우치가 고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음요. 님 혹시 들은 내용 없음?" 이라고 구라토미가 질문한 것뿐인데, 이를 독살의 증거라고 확대 해석한 것이다. 이 질문은 당시에도 독살'설'이 있었다는 증거이지 독살 자체의 증거는 아니다. 어쨌든 고종의 유해가 남아있으므로 [[나폴레옹]]처럼 현대 과학 기술로 검사해보면 [[독살]]당한 것이 사실인지 규명해 볼 수 있겠으나 [[홍유릉]]을 발굴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으므로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실제로 [[2008년]] [[청나라]]의 비운의 황제로 알려진 [[광서제]]의 유해를 부검한 결과 비소 성분이 발견되어 [[독살]]당했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바로 [[위안스카이]](원세개). [[서태후]]도 함께 용의선상에 오르고 있으나 당니 서태후는 이질(痢疾)이라는 중병에 걸려 있었고 익일에 광서제를 따라갈 정도로 몸이 나빠질 대로 나빠져 있었다. 서태후의 악명을 고려하면 결코 배제할 수는 없으나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위안스카이]]의 이후 막장 짓거리를 생각해보면 정황상 위안스카이가 가장 충분히 유력하다.] 그런데 고종은 사실 전에도 독 타진 음료를 마시고 사망 할 뻔했다. [[1898년]](광무 2년) '''[[김홍륙독차사건]]'''이다. 실각한 [[김홍륙]]이 앙심을 품고 평소 고종이 즐겨마시던 [[커피]]에 독([[아편]])을 넣어 벌어진 일이었다. 고종은 조금 먹어보고 커피의 냄새가 이상하여 뱉고, 다 마시지 않고 버려서 화를 당하지 않았다. 다만 같이 [[커피]]를 마신 순종과 [[내관]]은 죽다 살아나 평생 [[후유증]][* 순종은 먹었을 당시 [[치아]] 전체가 헐어 빠졌고, 심각한 [[복통]]이 발생되어 [[구토]], [[혈변]] 섞인 [[설사]]가 몇주 내내 발생하여 엄청 고생했다고 한다.]이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정세가 어지러울 때는 [[독살]] 위협 때문에 식사도 제대로 못 하고 에비슨과 같은 외국 선교사들이 보내준 연유 [[통조림]]과 삶은 [[계란]] 몇개로 연명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능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남양주)|금곡동]]의 '''홍릉(洪陵)'''[* 공교롭게도 [[강화도]]에 있는 [[고려]] [[고종(고려)|고종]]의 능호도 홍릉(洪陵)으로 한자까지 똑같다.] [[명성황후]]와 합장되어 있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의 능은 전통적인 조선식 왕릉과는 다른 양식으로 꾸며져 있다. '황제릉'(皇帝陵)의 형식으로 꾸민 것이라고. 본래 홍릉은 [[명성황후]]가 [[을미사변]]으로 시해되고 처음에는 오늘날 [[서울특별시|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에 묻혔었는데 [[1919년]]에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죽음|붕어]](승하)하고 당시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금곡(오늘날의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남양주)|금곡동]])으로 이장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원래 홍릉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것이 [[고종(대한제국)|고종]]의 [[후궁]] [[순헌황귀비 엄씨]]의 묘소인 '영휘원'(英輝園)인데 오늘날에도 그 근처에는 '홍릉로'(洪陵路)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으며 이 근처에는 홍릉 수목원이 있다. 뒷날인 [[1926년]], 아들 [[순종(대한제국)|순종황제]]가 죽은 후에도 홍릉 근처에 능을 써서 이 능역을 합쳐 '''[[홍유릉]](洪裕陵)'''이라고 부른다. 홍유릉 뒤편에는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나 [[의친왕]], [[덕혜옹주]] 등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 일원들의 묘소도 함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홍유릉]] 일대는 '''[[대한제국/황실|대한제국 황족]]들의 [[가족]][[무덤]]'''인 셈. == 복제 논쟁 == [[고종(대한제국)|고종황제]]의 [[사망|승하]] 이후 아직까지 잔존한 [[유림]]들 사이에선 [[20세기]] 판 [[예송논쟁]]이 벌어졌다. 고종의 사망 이후 일부 유림들이 '''"우리는 [[대한제국]] [[대한제국/황사|황제]](大韓帝國 太皇帝)의 신하들이지, [[일본제국|일본]] [[이왕|이태왕]](日本 李太王)의 신하는 한 적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할 수 없다!"'''라고 [[고종(대한제국)|고종]]에게 절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조긍섭으로 [[고종(대한제국)|고종]] 무복설(無服說)을 주장하였는데, 간단히 말하면 [[멸망|망국]]의 책임이 있는 [[대한제국/황사|왕]]은 [[조선/왕사|왕]] 대접을 해주면 안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 근거로 [[명나라]]가 망하자 자결한 [[숭정제]]를 들며 [[멸망|망국]]의 책임이 있는 [[군주]]라면 마땅히 [[자살|자결]]해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일본 제국|일제]]로부터 '[[이태왕]]'이라는 작위까지 받았으니 [[고종(대한제국)|고종]]을 위해 [[상복]]을 입는 건 [[일본제국|일본]]의 신하임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 주장으로 조긍섭은 [[최병심]] 등의 [[상복]] 찬성파들에게 맹렬한 공격을 받게 되고 제자에게도 절연당하는 등 많은 고초를 겪다가 [[고종(대한제국)|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을 듣자 한발 물러서 [[상복]]을 입게 된다.] 그런데 [[한성부|서울(경성)]]에서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일본제국|일본]]에게 저항하다가 끝내 [[독살]]되었단 소식이 들어오자, 그렇다면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친일]]을 한 것이 아닌 것이 된다고 하여 [[고종(대한제국)|고종]]에게 절하기로 합의가 되었다. 이후 [[유림]]계는 '''"[[고종(대한제국)|고종황제]] 폐하께서는 무능하셨다. 근데, 그것이 오직 그분만의 [[책임]]인가? 우리도 여러 실책을 하여 [[경술국치|나라가 망한 것]]이니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간재 [[전우(학자)|전우]] 등의 강경파[* [[유림]] 강경파들은 "머리 깎은 자들의 복국 운동(伏鞫運動)은 유림으로써 상종할 일이 되지 못한다."라고 하면서 [[3.1 운동]] 참여를 거부했다.]를 제외한 대다수 [[유림]]들은 [[3.1 운동]] 등에 참여하여 다른 종교인들과도 상호 연대하고, 파리 장서 사건을 모의하는 등 [[한국독립운동|독립 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