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926년 작품]][[분류:가곡]][[분류:동요]][[분류:시]][[분류:홍난파]] [include(틀:한국갤럽 선정 봄하면 생각나는 노래)]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uYzHXT9XIuY)]}}}|| || {{{#000 {{{-1 [[오연준]]이 부른 버전.}}}}}}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KG2-yD-9Fvk)]}}}|| || {{{#000 {{{-1 [[북한]]에서 부른 버전.}}}}}} || [목차] [clearfix] == 개요 == [[일제강점기]]인 [[1926년]] [[이원수(아동문학가)|이원수]] 시인이 발표한 동시이며, [[동요]]는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26&newsid=20110601155419748&p=yonhap&RIGHT_COMM=R8|이일래(본명 이부근)작곡 버전]]과 [[홍난파]] 작곡 버전 두 종류가 있다. 이일래 버전은 홍난파 버전과 달리 조금 더 음정이 늘어지고 곡조가 미묘하게 다르지만, 이 중에서 세간에 알려진 버전은 홍난파 버전. [[일본어]] 버전도 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일본식 운율인 7·5조가 사용되어 일본인들에게도 친숙한 느낌을 준다고 한다. 비슷한 7·5조 노래로 '[[학교(동음이의어)#s-6|학교]]'과 '[[섬집 아기]]'가 있다. 1절에서 '차린'을 '차리인'으로 늘려 발음하는 이유도 7·5조의 운율을 살리기 위함이다. 첫 소절인 '나의 살던 고향은'은 현대 국어 화자가 보기에는 [[문법]]적으로 다소 어색하다. 현대 국어 기준으로 어색하지 않은 [[한국어]] 표현은 '내가 살던 고향은'인데, [[일제강점기]]에 쓰인 가사이다 보니 일본어에서 주격 조사 'が'가 종속절의 조사로 쓰일 때 'の'로 변화하는 문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통사적으로는 후행하는 명사를 꾸며주는 속격이지만 의미상 주어의 역할을 하는, 이른바 주어적 속격은 [[중세 국어]]에도 존재한 바 있었으므로, 섣부르게 판단할 수는 없다.[* 비슷한 용례가 [[기미독립선언서|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이다.] 가사는 서정적이지만 곡조는 [[섬집 아기]]처럼 우울한 느낌이 드는데, 어두컴컴한 곳에서 혼자 듣다 보면 좀 무서워진다. 하지만 묘하게 착착 감기는 곡이라 [[초딩]]때 배우는 노래인데도 성인이 되어 잊어버리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이원수는 이 동요를 중학시절인 10대에 지었는데, 그 1절은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이다. 이 노래의 배경이 되는 곳은 당시 이원수가 살고 있던 '''[[창원시|창원군]]'''. 지금의 모습으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창원은 [[마산시|옛 마산시]] 등에 비하면 [[시골]]에 가까웠다. 당시 이원수가 살고 있었고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의창동|소답동]] 일대는 더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 바로 옆 동네인 [[명곡동(창원)|명곡동]]만 하더라도 [[1990년대]] 초반은 그야말로 허허벌판이었다. 그래서 창원 [[팔용동]] 남산에는 '고향의 봄 도서관'에 이원수 문학관이 있다. 그러나 이원수가 노래한 '꽃피는 산골'은 도서관이 있는 곳과는 반대쪽인, 현재 [[창원역]] 뒤에 있는 천주산이다. 이 곳의 [[진달래]]는 산 사면을 따라 울긋불긋 피어올라가는 모습을 보인다.[* 이원수의 출생지인 [[양산시]]에서는, 이 곡을 지을 당시 살던 곳은 창원이지만 노래에서 묘사한 지역은 양산이라면서 역시 시비(詩碑)를 세웠지만 빼도박도 못하는 역사왜곡이다. 이원수가 양산에서 살았던 기간은 고작 1년도 되지 않았으며 본인 스스로 양산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으며 자신의 고향은 창원이며, '고향의 봄'의 배경 또한 창원 소답동이라고 밝혔다.[[http://www.leewonsu.co.kr/_sub03/sub03_01.html|#]] 양산에서도 저자가 직접 밝힌 사실이라 할말이 없는 모양인지 한때 고향의 봄 관광사업을 적극 추진하려 했다가 이제는 거의 사장되다시피한 상태이다.[[https://www.yangsa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84339|#]]] '울긋불긋 꽃대궐'이라 하듯이 부잣집도 여럿 있었는데 그 중 남아있는 것이 [[https://local.nculture.org/6e3bb|등록문화재 200호 창원 소답동 김종영 생가]]가 있다. [[2011년]] 초 이원수가 고향의 봄을 쓴 곳이 확인되었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창원)|오동동]] 71번지라고 한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1/01/31/0200000000AKR20110131033100052.HTML|‘고향의 봄’ 탄생지는 마산 오동동 71번지]] [[영구와 땡칠이 시리즈]]의 세번째 작품인 [[영구람보]]에서는 엔딩곡으로 등장한다. 그 당시에 슬프게 불렸다.[[https://www.youtube.com/watch?v=-zwBK5PuFZk|영구람보 엔딩장면]] 그리고 예전에 [[고교야구]] 대회에 [[재일교포]] 야구단이 초청받아 참가했었는데 경기에서 [[재일교포]] 팀이 승리할 경우 한국의 여러 고교팀이 각자 학교의 교가를 트는 것과 달리 이 고향의 봄을 틀었다.[* 영화 '[[그라운드의 이방인]]'에서 자세히 묘사된다.] [[1988 서울 올림픽/개회식|1988 서울 올림픽 개회식]]에서 [[코리아나]]의 [[손에 손 잡고]] 공연과 폐식통고가 끝난 뒤 폐식곡으로 개회식 출연자들이 그라운드에 모여 박수를 치며 부른 노래다. [[영창피아노]]의 1992년 광고에서 [[빈 소년 합창단]]이 이 노래를 부른다.[[https://youtu.be/8RrBNSpQMOU|#]] 그런데 [[HDC영창#s-5.1|광고가 광고인 만큼]] 해당 동영상의 댓글도 밑의 교도소 드립처럼 [[영창]] 드립이 많다.--나의 갇혔던 '''영창'''은 최전방 산골--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노래이다 보니 [[북한]]에서도 불리고 있는 노래며 여기선 '동네'가 아니라 '동리'로 부르고 있다. 이런 점이 고려되었는지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에선 [[오연준]]이 만찬장에서 불렀고 환송식 공연에서도 활용되었다. [[https://youtu.be/Jg0AqlFGsro?t=56s|#]] [[북한]]에서 송출하는 V15 난수방송의 21호 탐사대원 개시곡으로 쓰이고 있다. 이 노래를 기념하여 [[경상남도]] [[양산시]]에 [[고향의봄로]]가 있으며,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공원[* 고향의 봄을 썼던 오동동 자취방 뒷산이면서 이원수 선생의 모교인 [[마산용마고등학교]]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에는 고향의 봄 노래비가 건립되어 있다. [[만주어]] 버전도 있다. [[https://youtu.be/DDR5seDGtKw|#]] [[일본]] [[소학교]]([[한국]]의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이 노래가 실리기도 했다.[[https://m.mk.co.kr/news/all/2213148|#]] == 가사 == === 한국어 원 가사 === ||{{{#!wiki style="text-align: center" {{{+2 '''고향의 봄'''}}} {{{-2 이원수 작사・홍난파 작곡}}}}}} ---- '''1절'''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2절''' 꽃동네 새동네 나의 옛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 === 북한 가사 === [* 일부 띄어쓰기, 그리고 [[두음법칙]]을 사용하지 않는 북한 특성상 일부 가사가 다르다. '동리'는 옛말로 '동네'라는 뜻이다. [[동(행정구역)|동]]과 [[리(행정구역)|리]]를 뜻한다.] '''1절'''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리 그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2절''' 꽃동리 새 동리 나의 옛 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내가의 수양버들 춤추는 동리 그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 일본어 번역 가사 1 === [[https://www.youtube.com/watch?v=QLnYuctQXvY|이 영상]]과 [[https://www.youtube.com/watch?v=gJYsKUqM6y4|이 영상]], [[http://www.ritsumei.ac.jp/acd/cg/lt/rb/651/651PDF/uno.pdf|이 문서]]에는 아래 가사로 옮겨져 있다. ||{{{#!wiki style="text-align: center" {{{+2 '''故郷の春'''}}} {{{-2 作詞 李元壽・作曲 洪蘭坡・訳詞 笠木透}}}}}} ---- '''1절''' 私の故郷 花の村 モモの花 アンズの花 山ツツジ いろとりどりの 花もよう 遊んだあの日が なつかしい '''2절''' 私の故郷 鳥の村 緑の野原に 風吹けば 川辺の柳も おどり出す 遊んだあの日が なつかしい || === 일본어 번역 가사 2 === [[https://www.youtube.com/watch?v=977eQVTkvTs|이 영상]]과 [[https://ameblo.jp/karennda-1/entry-12543950718.html|이 포스팅]]에는 아래 가사로 옮겨져 있다. ||{{{#!wiki style="text-align: center" {{{+2 '''故郷の春'''}}} {{{-2 作詞 李元壽・作曲 洪蘭坡}}}}}} ---- '''1절''' 我が生まれた故郷 花咲く 山里 桃の花 あんずの花 赤ちゃん つつじ 色とりどり鮮やかな 花の宮殿[* 직역하면 '알록달록 선명한 꽃 궁전'. 한국어 가사와 다르다.] その中で 戯れた時が 懐かしい '''2절''' 花の里 鳥の里 我が故郷 青い草[* '파란 풀'로 번역되었으며 일본어로 '들'은 '野原(のはら)'. 박자를 맞추기 위해 조금 바꾼 듯하다.] 南から 風が吹けば 川の ほとりの 柳が 踊り躍る[* 직역하면 '냇가의 수양버들이 춤추고 춤추네'. '춤추는 동네'라는 명사 서술어가 동사 서술어로 번역되었다.] その中で 遊んだ時が 懐かしい || == 우표 == [[1985년]]부터 1993년까지 발행된 음악 시리즈의 제1집으로 1985년 9월10일, 동요인 '나뭇잎 배'와 같이 발행되었고, 액면가는 70원. == 패러디 == === [[교도소]] 버전 ===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1970년대]] 전후부터 "나의 살던 고향은 XX[[교도소]]"로 개작한 노래가 유행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1070800209206003&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71-07-08&officeId=00020&pageNo=6&printNo=15308&publishType=00020|기사]] [[초등학생]] 등 유소년들을 중심으로 유행했으며, 그 시대를 풍미한 [[범죄자]]를 풍자하는 의미를 담아 불렀다. [[1990년대]]라면 [[신창원]]이라든지, 심지어 [[전두환]]이나 [[노태우]]까지도 풍자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에 맞춰서 [[경북북부교도소|청송교도소]]나 [[부산교도소]], [[안양교도소]], [[서울구치소]] 등으로 매칭하여 불렀다. 지역마다 인근 교정시설의 이름을 넣어서 부르기도 했다. '인천교도소'라는 정체불명의 교정시설도 등장했는데, 실은 '[[인천구치소]]'이다. 인천구치소는 과거에 '인천소년교도소'로서 [[소년범]]을 수용하기도 해서 잘못 전해져서 불린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아이들이 [[교도소]]와 [[구치소]]의 차이를 알았을 리가 없었으니... [[대구광역시]]에서는 '[[대구교도소|화원교도소]]'로,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는 '[[서울동부구치소|성동구치소]]'로 바꿔서 불렀다. 지역마다 가사는 다르지만 내용은 거의 대동소이하게 '''XX교도소에 수감됐던 죄수가 [[꽁보리밥]] 먹다가 10년만에 출소 혹은 탈옥을 해서 집에 와보니 아내는 집 팔아먹고 도망갔다'''는 내용이다. 대개 다음과 같은 가사로 불렸다. 물론 지역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나의 살던 고향은 XX교도소 개 밥에 된장국도 맛만 좋더라 감옥살이 10년하고 집에 와보니 마누라가 집 팔아먹고 도망갔더라|| ||나의 살던 고향은 XX교도소 먹는 것은 꽁보리밥에 멸치 세마리 10년만에 탈옥해서 집에 왔더니 마누라는 집팔아 먹고 도망갔대요|| ||나의 살던 고향은 화원교도소 눈만뜨면 꽁보리밥에 김치 깍두기 10년만에 탈옥해서 집에 와보니 마누라는 집 팔아먹고 토끼뿓더라[* 대구 지역에서 구전되던 가사]|| ||나의 살던 고향은 XX교도소 꽁보리밥에 된장국이 일품이라네 10년만에 탈옥해서 집에 와보니 여편네는 집 팔아먹고 도망갔대요|| ||나의 살던 고향은 XX교도소 꽁보리밥에 된장국은 맛이 없구나 10년만에 탈출해서 집에 갔더니 여편네는 집 팔아먹고 도망갔구나|| ||나의 살던 고향은 부산교도소 날만 새면 꽁보리밥에 김치 깍두기 집에 오니 아이들은 고아원가고 여편네는 집 팔아먹고 도망갔대요|| ||나의 살던 고향은 [[광주교도소]] 눈만뜨면 꽁보리밥에 빳다 열두대 한대 두대 세대 네대 아이구 엉덩이야 신신파스 붙일 때가 그립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XX교도소 꽁보리밥에 된장국이 그립습니다 교도생활 10년에 집에 와보니 여편네는 집 팔아먹고 날랐습니다[* 서울 북부에서 구전되던 가사. [[1970년대]]엔 서울교도소였고, 전두환이 잡혀갈 때 안양교도소라고도 했다.]|| ||나의 살던 고향은 인천[* [[안양시]] 인근 일부 지역에서 구전되던 가사였음에도 [[안양교도소]]로 불리는 경우는 드물었다.]교도소 아침밥은 꽁보리밥에 김치 한조각 10년만에 탈옥해서 집에 와보니 마누라는 집 팔아먹고 바람핍니다|| 혹은 2번째 행이 '''썩은 밥에 개구리 반찬 그립습니다'''로 치환되는 경우가 있다. === [[신약성경]] 버전 === [[가톨릭]]에서 [[신약성경]]의 제목들로 개사한 버전이 있다. ||[[마태오 복음서|마태오]] [[마르코 복음서|마르코]] [[루카 복음서|루카]][[요한 복음서|요한]] [[복음서]] 네권 [[사도행전|사도]][[로마서|로마]] [[고린토서|코린토]] [[갈라디아서|갈라티아]] [[에페소서|에페소]] [[필립비서|필리피]] [[골로사이서|콜~로새]] [[데살로니카서|테살로니카]] [[티모시|티모테오]] [[디도서|티토]] [[필레몬서|필레몬]] [[히브리서|히브리]] [[야고보서|야고보]] [[베드로서|베드로]] [[요한서|요한]][[유다서|유다]] [[묵시록]]|| 개신교에서는 일본 [[철도창가]]를 번안한 성경목록가라는 성가를 주로 사용했다. == [[만주어]] 고향의 봄 == [youtube(DDR5seDGtKw)] 만주어 관련 유튜버가 작사후 노래한 만주어판 고향의 봄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