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15px -10px" || '''{{{#000,#ddd {{{+1 江華 骨氏[br]강화 골씨}}}}}}''' ||}}} || || '''{{{#ece5b6 관향}}}''' ||[[인천광역시]] [[강화군]] || || '''{{{#ece5b6 시조}}}''' ||골귀손(骨貴孫) || || '''{{{#ece5b6 집성촌}}}''' ||--평안북도 영변군--[* 16세기.] || || '''{{{#ece5b6 인구}}}''' ||'''0명'''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시대의 성씨로 현재는 [[한국의 성씨/사라진 성씨|사라졌다.]] 본관은 강화 단본. == 역사 ==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골씨는 [[경기도]] [[강화군|강화도호부]](現 [[인천광역시]] [[강화군]])에서 [[평안도]] [[영변군|영변대도호부]](現 [[평안북도]] [[영변군]])의 연산(延山)으로 이주했다. 《융경2년무진년증광사마방목(隆慶二年戊辰年增廣司馬榜目)》에 의하면, 평안도 영변대도호부에 거주하던 유학(幼學)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b_1568_005499|골인서]](骨仁瑞, 1524 ~ ?)는 1568년([[선조(조선)|선조]] 1) 증광 [[진사|진사시]]에 3등 27위로 입격했다. 당시 본관은 강화(江華)였고, 자는 언부(彦符)였다. 아버지는 계공랑(啓功郞)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 골귀손(骨貴孫)이었고, 위로 형 골인구(骨仁球), 골인구(骨仁璆), 골인수(骨仁琇)이 있었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61 「앙엽기(盎葉記)」에 수록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77A_0610_010_0030_2000_010_XML|동국제성]](東國諸姓)」을 보면, [[이덕무]]가 1789년([[정조(조선)|정조]] 13) 《[[동국여지승람]]》을 수보하면서 [[한성부]] 호적을 일일이 검사한 뒤 당시 한성부에 거주하던 사람들의 성씨를 모두 기록해놓았는데, 이 중에서도 골(骨)씨가 나타난다. 맞춤법 실수일 가능성이 있지만, 1905년 5월 18일, 'Mer Poon Na Dul'에서 거주하던 '''골점동'''([[https://scholarspace.manoa.hawaii.edu/handle/10125/25500|Kol, Chum Dong]])씨가 [[하와이]]로 이민했다는 기록이 있다. 정말이라면 골씨가 대한제국 때까지도 있었을 수 있다. 1930년 [[조선총독부]] 국세조사에서는 집계되지 않았고, [[대한민국]] [[인구주택총조사]]에서도 집계된 적 없다. [[천방지축마골피]]에 포함되지만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참봉]], [[진사]]를 배출한 성씨로, 양반 가문에 속한다. 이를 통해 '천방지축마골피'의 허구성을 지적할 수 있다. == 인물 == === 실존인물 === * 골귀손(骨貴孫): 강화 골씨의 시조. 역임 직위는 계공랑 기자전참봉.[* [[선우씨]]가 [[팔전|기자전]]에 대대로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은 [[광해군]] 시기부터로, 그 전에는 다른 성씨의 인물들도 기자전의 참봉을 지냈다.] 인구(仁璆), 인수(仁琇), 인서(仁瑞)라는 아들을 뒀다. * 골인서(骨仁瑞): 위 인물의 막내아들. 1524년생으로 자는 언부(彦符), 거주지는 영변이다. 선조 1년(1568) 45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3등 27위로 합격했다. === 가상인물 === * [[골한석]] - [[명탐정 코난]]의 등장인물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메구레 쥬죠,version=82, title2=메구레 쥬조, version2=372, title3=한국의 성씨/사라진 성씨, version3=103)] [[분류:성씨/한국]] [[분류:사라진 성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