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수 황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533227 0%, #7C4B3B 20%, #7C4B3B 80%, #533227); color: #ece5b6" '''수 제3대 황제[br]{{{+1 공황제 | 恭皇帝}}}'''}}} || ||<|2> '''출생''' ||[[605년]] || ||[[수나라|수]] [[시안시|대흥]][br](現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시안시]]) || ||<|2> '''즉위''' ||[[617년]] [[12월 18일]] || ||[[수나라|수]] [[시안시|대흥]][br](現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시안시]]) || ||<|2> '''사망''' ||[[619년]] [[9월 14일]] (향년 14세) || ||[[수나라|당]] [[시안시|장안]][br](現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시안시]]) || || '''능묘''' ||[[장릉]](莊陵) || ||<|2> '''재위기간''' ||'''{{{#ece5b6 제3대 황제}}}''' || ||[[617년]] [[12월 18일]] ~ [[618년]] [[6월 12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양(성씨)|양(楊)]] || || '''휘''' ||유(侑) || || '''부모''' ||부황 [[양소(수 추존)|세종]][br]모후 황태후 위씨 || || '''형제자매''' ||3남 중 3남 || || '''작호''' ||진왕(陳王) → 대왕(代王) → 휴국공(酅國公) || || '''시호''' ||'''공황제(恭皇帝)''' || || '''연호''' ||[[의녕]](義寧, [[617년]] ~ [[618년]])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수나라]]의 마지막 황제. 시호는 공황제(恭皇帝)였고, 휘는 양유(楊侑)였다. 희대의 폭군 [[수양제]]의 손자이자, 원덕태자 [[양소(수 추존)|양소]]의 막내아들이었다. == 생애 == 양유는 605년에 황태자 양소와 황태자비 위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양유 위로 이복형이 2명 있었는데 장남은 대양제 유씨가 낳은 연왕 양담이었고, 차남은 소양제 유씨가 낳은 월왕 양동이었다. 물론 양유의 이복형들은 [[서자]]였고, 양유는 [[적자]]였으니 당연히 수양제의 적장손인 양유의 계승권이 더 높았다. 양유는 대왕(代王)의 [[작위]]에 있었으나 606년에 아버지 원덕태자가 급사하자 할아버지 양제에 의하여 [[황태손]]으로 책봉되었다. 607년 [[진]]왕(陳王)으로 책봉되었다가 후에 [[대]]왕(代王)으로 변경되었다. 양제가 [[고구려]] 원정에 출정할 때 [[수도(행정구역)|수도]] [[시안(도시)|장안]]을 지켰다. 615년 양제의 진양 행차에 따라 태원태수에 임명됐지만 곧 장안으로 돌아갔다. 617년 양제가 강남의 강도로 피난을 가자 계속 장안을 지키게 되었다. 하지만 본인이 어린애였고, 장안은 방치 상태가 되었으며 양제가 피난간 곳에 관료들이 같이 가지도 않았으므로 사실상 수나라의 중앙정부는 활동이 정지되었다. 그렇다고 양제가 강도로 가기 전에 장안에 제대로 된 방어대책을 세운 것도 아니었으므로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수도였던 만큼 성벽은 튼튼했으나 결국 제대로 지킬만한 인물이 없었으므로 11월 태원유수 [[고조(당)|이연]]이 쳐들어와 장안을 함락시켰다. 장안에 입성한 이연은 617년 12월 18일에 황태손 양유를 황제로 옹립하고 대흥전에서 즉위시켰으며 강도에 있는 양제 양광을 [[태상황]]으로 받들었다. 그리고 자신은 [[섭정]]을 맡아 실권을 잡았다. 하지만 말이 태상황이지, 사실상 양제를 폐위시킨 것으로 그는 양제의 지위를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양유라는 [[카드]]를 사용하여 수나라의 문무백관들에게 투항을 권유해 대권을 모두 자신의 손에서 조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연에게 굴복한 양유는 조서를 내려 이연에게 가월(假鉞)의 칭호를 하사하고, 사지절(使持節) 겸 대도독내외제군사(大都督內外諸軍事) 및 대승상(大丞相), 당왕(唐王)에 봉하여 모든 권한을 넘겨 주었다. 618년 3월 양제가 [[우문화급]]에게 시해되고, 5월에 그 소식이 장안에 이르자 618년 6월 12일 양유는 이연에게 [[선양]]했다. 이로써 봉지 이름인 당이 그대로 왕조 이름으로 격상되어 당나라 300년사가 시작되었다. 양유는 왕급도 아닌 휴국공(酅國公)으로 강등되었고, 이로써 수나라는 멸망했다. 619년 9월 양유는 [[당고조]]의 명령을 받은 [[이세민]]에게 살해되었다. 양유가 폐위당한 후에도 동도 [[낙양]]에서 [[왕세충]]에 의해 양유의 이복형 [[양동(수)|양동]]이 황제로 옹립됐지만 양유가 당고조에게 선양한 것을 정통으로 보기 때문에 양동은 일반적으로 정통 황제로 보지 않는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수서)] [include(틀:북사)]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양유, version=42)] [[분류:수당시대/황제]][[분류:605년 출생]][[분류:619년 사망]][[분류:망국의 군주]][[분류:시안시 출신 인물]][[분류:중국의 살해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