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조선 왕세자빈)]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d0730, #1b0e64 20%, #1b0e64 80%, #0d0730); color: #FFD400" '''조선 순회세자의 세자빈[br]{{{+1 공회빈 윤씨 | 恭懷嬪 尹氏}}}'''}}}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순창원.jpg|width=100%]]}}} || ||<-2> {{{#ffd400 {{{-2 순창원 전경}}} }}} || ||<|2> '''출생''' ||[[1553년]] [[7월 21일]]^^([[음력]] [[6월 1일]])^^ || ||[[조선]] [[한성부]][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일대) || || '''책봉''' ||[[1561년]] || ||<|2> '''사망''' ||[[1592년]] [[4월 4일]]^^([[음력]] [[3월 3일]])^^[br]{{{-2 (향년 38세)}}} || ||[[조선]] [[한성부]] [[창경궁 통명전]][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 || '''능묘''' ||'''[[서오릉|순창원]](順昌園)''' || ||<|2> '''재위기간''' ||'''{{{#ffd400 조선 왕세자빈}}}''' || ||[[1561년]] ~ [[1563년]]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무송 윤씨]] || || '''부모''' ||부친 윤옥(尹玉, {{{-3 1511 ~ 1584}}}) 모친 [[파평 윤씨]](坡平 尹氏, {{{-3 ? ~ 1572}}}) || || '''배우자''' ||'''[[순회세자]]''' || || '''자녀''' ||슬하에 자식없음 || || '''봉작''' ||덕빈(德嬪) || || '''시호''' ||'''공회빈(恭懷嬪)''' || }}}}}}}}} || [목차] [clearfix] == 생애 == 불행한 삶을 살았던 비운의 [[세자빈]].[* [[강빈]](소현세자의 세자빈)이나 [[혜경궁 홍씨]](사도세자의 세자빈)는 각각 자식이라도 있었고 [[효순왕후]]는 [[정조(조선)|양자]]가 [[조선/왕사|왕]]이라도 됐지, 공회빈 윤씨는...] 공조판서를 지낸 윤사익(尹思翼)의 손녀이자 윤옥(尹玉)의 딸로 [[1553년]](명종 8년) [[6월 1일]]에 태어났다. 9살이 되던, [[1561년]](명종 16년), [[순회세자]]와 [[결혼|가례]]를 올리고 [[세자빈]]이 되었으나 2년 뒤인 [[1563년]](명종 18년)에 남편 [[순회세자]]가 사망하자 11살의 어린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어 덕빈(德嬪)이라 불렸다.[* [[효장세자]]가 일찍 죽어 14살에 과부가 된 [[효순왕후]]보다도 더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되었다.] [[순회세자]] 사후, [[선조(조선)|선조]] 즉위 후에도 [[창경궁|궁]]에서 계속 생활하다가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2년]](선조 25년) [[음력]] [[3월 3일]], [[창경궁]] [[창경궁 통명전|통명전]]에서 [[사망]]하였다. 사후 '''공회빈(恭懷嬪)'''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순회세자빈 윤씨의 졸기''' >---- >3일에 순회세자빈(順懷世子嬪) 윤씨(尹氏)가 [[죽음|졸]](卒)하였다. >윤씨는 참판 윤옥(尹玉)의 딸로서 10세에 간택되어 덕빈(德嬪)에 책봉되었는데, >이듬해에 [[순회세자|세자]](世子)가 졸하였다. >그러나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유명으로 궁궐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선조(조선)|상]](上)이 또 [[왕세자]]를 세우지 않았으므로 빈이 그대로 [[경복궁 자선당|동궁]](東宮)에 거처하였다. >[[선조(조선)|상]]이 정성을 다해 그를 대우하였으며 여러 비빈(妃嬪)들도 모두 따르며 수학(受學)하였다. >빈의 성품이 지극히 정결하였는데 >[[순회세자|세자]]의 [[죽음|상사]]를 당한 뒤로부터 종신토록 언제나 상중에 있는 것처럼 하였으며 >친척들의 궁궐 출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순회세자|세자]]의 영혼을 기원하는 뜻에서 불공을 자주 드렸으나 >상이 가엾게 여겨 금지시키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음|졸]](卒)한 것이다. >시호를 공회(恭懷)라 하고 장차 세자원(世子園)에 부장하려고 공사를 크게 일으켰는데, >갑자기 [[임진왜란|왜변]](倭變)을 만나 미처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상이 피난을 가게 되었다. >이에 빈소를 모시고 있던 관리 몇 사람이 후원(後苑)에 임시로 매장하려 하였으나 >재실(梓室)이 무거워 옮길 수 없었는데, 조금 있다가 궁전에 불이 나는 바람에 >관리들도 모두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이에 궁인들이 그를 추모하고 비통해 하면서 말하기를, >‘빈이 살았을 적에 [[불교]]를 숭상하였는데, 우연히 [[화장(장례)|화장]](火葬)하게 되었으니 그것도 생전의 뜻에 부합된다.’ 하였다. >---- >-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년|1592]], 명 만력(萬曆) 20년) 3월 3일 갑자 2번째기사''' == 사후 == [[창경궁 통명전]] 부근에 빈소를 설치하고 시신을 안치하여 [[장례|상례]](喪禮) 절차를 진행하던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선조(조선)|선조]]와 신하들이 [[의주]]로 급히 피난을 가면서 어가가 [[벽제]]에 이르렀을 때에야 덕빈의 시신을 후원에 임시로 가매장하라는 전갈을 보냈으나, [[1593년]](선조 26년)에 피난 갔던 [[선조(조선)|선조]]가 다시 [[한성부|한양]]으로 돌아와 그녀의 시신을 수습하려 하였을 때 찾지 못하였다. 당시 사평(司評) 이충(李忠)이 시신을 함춘원(含春苑)[* 현재의 [[서울대학교병원]] 위치이다. 병원 입구에 있는 함춘회관이 당시 지명을 계승하고 있다.]에 묻었다고 했으나 그가 이미 죽은 뒤라 덕빈의 남동생 윤백상에게 찾아보게 했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덕빈은 곧 [[순회세자]]의 [[세자빈|빈]]으로 [[1592년|임진년]] 2월 [[창경궁]]의 [[창경궁 통명전|동궁]]에서 [[죽음|졸]](卒)하였는데 미처 [[장례|장사]]지내지 못했었다. >[[임진왜란|변란]](變亂)이 일어나 [[선조(조선)|상]](上)이 [[의주|서쪽]]으로 파천하여 [[벽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후원(後園)에 가매장할 것을 명하였다. >윤백상은 곧 덕빈의 동생이다. >후에 [[선조(조선)|대가]](大家)가 환도하니, 이충은 이미 죽었는데 이충과 함께 묻은 자가 스스로 상소하여 아뢰었다. >[[선조(조선)|상]](上)이 여러 관원으로 하여금 아는 자를 데리고 함께 가서 찾게 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 >---- >- 《[[선조실록]]》 37권, 선조 26년([[1593년|1593]], 명 만력(萬曆) 21년) 4월 18일 임인 1번째기사 선조는 이처럼 시신이라도 찾는 심정으로 [[강령술]]까지 고려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가 커서 무산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1603년]](선조 36년), 결국 [[선조(조선)|선조]]는 신주(神主)만 봉안하여 [[순회세자]]와 공회빈을 [[서오릉|순회묘]](順懷墓)[* [[1870년]](고종 7년) 이후 [[서오릉|순창원]]으로 명명.]에 합장하였으나 이마저도 [[병자호란]] 때 분실되었고 [[서오릉|순창원]](順昌園)에는 [[순회세자]]의 재궁(梓宮, 관)과 공회빈의 빈 재궁만 안장되게 되었다. >[[비망록|비망기]]로 전교하였다. >---- >공회빈(恭懷嬪)의 일은 차마 말할 수조차 없다. >[[임진왜란|사변]](事變) 때문에 [[조선|국가]]가 황급하여 지금까지도 신주(神主)를 모시지 못하였으니 >이는 참통한 중에서도 참통한 일이다. >[[순회세자]]도 신주가 없으니, 이 양위(兩位,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공회빈]])의 신주를 세워 >전례대로 유사가 치제하고 조처하는 일이 있어야 할 듯하다. >내 우연히 생각하니 말보다 눈물이 앞선다. >의논하여 처리할 것을 예조에 말하라. >---- >【임진년([[1592년]]) 4월에 빈의 상이 빈소에 있었는데, 왜적이 갑자기 쳐들어왔다. >[[선조(조선)|대가]]가 [[의주|서쪽]]으로 행행하여 [[경복궁|시사]]가 창황하게 되자 그대로 버려두고 떠났다. >그 뒤에 빈의 족인들이 겨우 [[창덕궁|전]](殿)의 뜰에다 매장하였는데, [[왜군|왜적]]이 파내어 불태웠다. >그러니 당시 국사를 도모한 대신과 도감의 여러 신하들이 >기일을 앞당겨 잘 조처하지 못한 죄를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 >환도한 지 10년에 간혹 이 사실을 말하는 사람은 오열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비로소 이러한 전교가 있었다.】 >---- >《선조실록》136권, 선조 34년([[1601년|1601]], 명 만력(萬曆) 29년) 4월 25일 임진 1번째기사 [[서오릉|순창원]]은 지난 [[2006년]] [[문화재청]]에 의해 ''' '순창원 도굴 미수 사건' ''' 현장이 발견돼 각종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 가계 == * '''친정([[무송 윤씨]])''' * 아버지 : 부원군(府院君) 윤옥(尹玉) * 어머니 : 부부인 [[파평 윤씨|윤씨]](府夫人 尹氏)[* 어머니는 [[파평 윤씨]]이다.] * '''시가([[조선/왕실|전주 이씨]])''' * '''시조부 : [[중종(조선)|중종]](中宗) 이역(李懌)''' * '''시조모 : [[문정왕후]] [[파평 윤씨|윤씨]](文定王后 尹氏)''' * '''시아버지 : [[명종(조선)|명종]](明宗) 이환(李峘)''' * '''시어머니 : [[인순왕후]] [[청송 심씨|심씨]](仁順王后 沈氏)''' * 배우자 / 자녀 * '''남편 : [[순회세자]](順懷世子) 이부(李暊)''' * '''자녀 : 슬하에 자녀 없음''' == 참고 문서 == * [[명종(조선)|명종]] * [[명종실록]] * [[선조(조선)|선조]] * [[선조실록]] * [[선조수정실록]] * [[서오릉|순창원]] * [[순회세자]] * [[윤원형]] * [[인순왕후]] * [[창경궁]] * [[창경궁 통명전]] [[분류:조선의 왕세자빈]][[분류:무송 윤씨]][[분류:1553년 출생]][[분류:1592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