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오대십국시대/인물]][[분류:송나라의 추존 왕]][[분류:송나라의 외척]][[분류:935년 출생]][[분류:989년 사망]][[분류:타이위안시 출신 인물]] [include(틀:송사)] ||<-2> '''초충무왕(譙忠武王)[br]{{{+1 郭守文 | 곽수문}}}''' || || '''시호''' ||충무(忠武) || || '''작위''' ||초왕(譙王) || || '''성''' ||곽(郭) || || '''이름''' ||수문(守文) || || '''자''' ||국화(國華) || || '''생몰''' ||935년 ~ 989년 || || '''출신''' ||병주(幷州) 태원현(太原縣) || || '''부친''' ||곽휘(郭暉) || || '''자녀''' ||곽숭덕(郭崇德), 곽숭신(郭崇信), 곽숭엄(郭崇儼), 곽숭인(郭崇仁), [[장목황후]] || [목차] [clearfix] == 개요 == [[오대십국시대]], [[북송]]의 장수로 자는 국화(國華). [[장목황후]]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 생애 == === 초기 생애 === 병주(幷州) 태원현(太原縣) 출신으로 곽휘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곽휘는 [[후한(오대십국시대)|후한]]에서 호성군사(護聖軍使)를 지냈고 [[곽위]]가 이수정의 반란을 토벌할 때 종군했다가 전사했다. 곽위는 곽수문을 불쌍히 여겨 자신의 부하로 두었다. [[후주]]가 들어선 뒤 좌반전직(左班殿直)으로 보임되고 다시 동제2반부도지(東第二班副都知)로 옮겼다. === 태조 재위기 === 960년 [[북송]]이 들어선 뒤 서두공봉관(西頭供奉官)으로 승진하였다. 곽수문은 북송의 후촉 정벌에 종군하고 군공을 세워 지간주(知簡州)가 되었으며, 검문 안팎에 흩어져있던 도적들을 모두 위무하였다. 970년, [[반미(북송)|반미]]가 [[남한(오대십국시대)|남한]]을 정벌할 때 종군하여 [[유창(남한)|유창]]을 사로잡은 뒤 조정에 승전보를 알리면서 한림부사(翰林副使)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곽수문은 조빈 등이 [[남당]]을 정벌할 때도 종군하여 [[이욱]]을 궐하로 호송하며 돌아왔다. 당시 이욱이 [[태조(송)|태조]]를 알현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곽수문은 이를 알아채고 이욱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며 안심시켰다. >나라가 강토를 회복하여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데만 힘쓰는데, 어찌 나중에 도착해서 꾸짖음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곽수문은 뒤에 서경작방사(西京作坊使)로 전임되고 한림사(翰林使)를 겸임하였다. 그리고 당진에게 종군하여 단백곡(團柏谷)에서 [[북한(오대십국시대)|북한군]]을 물리쳤다. === 태종 재위기 === == 사후 == 곽수문이 죽고 한 달이 지나, 내시가 북쪽에서 돌아오고 다음의 문답이 오갔다. >내시: 곽수문이 죽은 뒤에 군사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습니다. >태종: 왜 그렇게 되었소? >내시: 곽수문은 자신이 받은 녹봉이나 하사품들을 모두 군사들을 위로하는데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곽수문이 죽은 날에 집안에 남은 재산이 없었습니다. 태종은 오랫동안 탄식하고 곽수문의 집안에 500만 전을 하사하였으며, 3남인 양왕 조원간에게 곽수문의 딸을 시집보냈는데, 이 딸이 바로 [[진종(송)|진종]]의 황후인 [[장목황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