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2> '''{{{+1 郭元振 | 곽원진}}}''' || || '''작호''' ||대국공(代國公) || || '''성''' ||곽(郭) || || '''이름''' ||진(震) || || '''자''' ||원진(元振) || || '''생몰''' ||656년 ~ 713년 || || '''출신''' ||위주(魏州) 귀향현(貴鄕縣)[* 現 [[허베이성]] [[한단시]] 다밍현(송·명 시대의 대명부(大名府)) 근처. 한단시, 나아가 허베이성 전체에서도 남동쪽 끝이다.] || [목차] [clearfix] == 개요 == [[당나라]]의 명장으로 이름은 곽진(郭震)이며 자는 원진(元振). == 생애 == 위주(魏州) 귀향현(貴鄕縣) 출신으로 16살의 나이에 설직(薛稷), 조언소(趙彦昭)와 함께 태학생이 되었다. 18세에 진사에 급제하여 통천현위(通泉縣尉)가 되었다. 곽원진은 의협심이 강한 한편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였으며 자질구레한 사무에 개의치 않았다. 또한 관할 현의 백성 1천여 명으로부터 약탈한 물건을 빈객들에게 나누어주거나 사사로이 돈을 주조하여 백성들이 괴로워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측천무후]]는 곽원진을 소견하여 힐문하려고 했지만 곽원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곽원진의 재능을 기이하게 여겼고 곽원진이 지은 문장을 찾았다. 곽원진은 자신이 지은 보검편(寶劍篇)을 측천무후에게 바쳤고 측천무후는 보검편을 학사 이교(李嶠) 등에게 보여주었다. 또한 이때 곽원진을 우무위(右武衛) 개조참군(鎧曹參軍)으로 제수하고 봉신감승(奉宸監丞)으로 진위시켰다. 696년 [[토번 제국]]의 [[가르친링]]이 당나라에 화해를 청하자, 측천무후는 곽원진을 토번에 사신으로 파견했다. 가르친링은 안서 4진에서 당나라 군대가 철수할 것과 돌궐 십성 부락의 땅을 분할할 것을 조건으로 걸었다. 다음은 곽원진과 가르친링이 나눈 대화이다. >곽원진: 안서 4진과 돌궐 십성은 토번과 다른 민족인데, 지금 당나라의 군대를 철수하도록 요청하는 것은 합병할 뜻이 있다는 것이 어찌 아니겠습니까? >가르친링: 토번이 만약 땅을 탐내어 국경의 근심이 되려고 한다면 동쪽의 감주(甘州)와 양주(涼州)로 침입하지 어찌 만리 밖에서 이익을 탐구하겠습니까? >---- >[[자치통감]]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656년 출생]][[분류:713년 사망]][[분류:한단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