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민국의 산성)] ---- ||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의 사적}}}]]''' '''{{{#f39100 제48호}}}''' || || {{{+1 {{{#fff '''관문성'''}}}}}} {{{-1 {{{#fff 關門城}}}}}} {{{-1 {{{#fff Gwanmunseong Fortress}}}}}} || || {{{#!wiki style="margin: 0 -12px; border-right: 2px solid transparent; border-left: 2px solid transparent"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1px; margin-top: -6px; margin-bottom: -5px" || '''{{{#fff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산업로 1739-6[br] [[울산광역시]] [[북구(울산)|북구]] [[달천동]], [[중산동(울산)|중산동]], [[천곡동(울산)|천곡동]] 및 [[범서면]] (모화리) || || '''{{{#fff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 || '''{{{#fff 면적}}}''' || 991,774㎡ || || '''{{{#fff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 || '''{{{#fff 제작시기}}}''' || [[통일신라]] [[성덕왕]] || ||<-2> '''{{{#fff 위치}}}''' || [include(틀:지도, 장소=관문성, 너비=100%, 높이=224px)]}}}}}}}}}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cha.go.kr/c0048000037003.jpg|width=100%]]}}} || || {{{#fff ''' 관문성 터[* [[http://www.cha.go.kr/unisearch/imagefiles/history_site/c0048000037003.jpg|사진 출처 - 문화재청.]]] '''}}} || [목차] [clearfix] == 개요 == [[울산광역시]] [[북구(울산)|북구]] [[중산동(울산)|중산동]]에 있는 [[신라]]시대의 [[산성]]이다. [[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48호. == 역사 == >'''성덕왕 21년, 모벌군(毛伐郡)에 성을 쌓아 일본이 노략질하는 길을 막았다.''' >---- >《[[삼국사기]]》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02&cid=49615&categoryId=49615&expCategoryId=49615#TABLE_OF_CONTENT21|제8권 신라본기 제8]] [[성덕왕]] 21년 ---- >개원(開元) 10년 임술(서기 722)에 비로소 '''보화군(毛火郡)에 관문(闕門)을 쌓았다.''' 지금의 모화촌(毛火村)으로 경주(慶州) 동남쪽 경계에 속하는데, 일본(日本)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요새였다. 둘레가 6,792보 5자였으며, 동원된 인부는 39,262명으로 감독자는 원진(元眞) 각간(角干)이었다. >---- >《[[삼국유사]]》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33594&cid=62146&categoryId=62146|제2권 기이 제2]] [[효성왕]][* 삼국유사의 오기.] ---- >'''관문성'''은 본부 동쪽 4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6,799척이다. 지금은 허물어졌다. > >(중략) > >임관군 부의 동쪽 45리에 있다. '''[[성덕왕]] 때에 모화군에 성을 쌓아 일본이 침략해 오는 길을 막았는데, [[경덕왕]]이 임관이라 고쳐 불렀다.''' 고려시대에 주에 예속시켰다. 석성의 남은 터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데, 사람들이 관문이라 한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경주부 성곽조(城郭條)와 고적조(古跡條). [[통일신라]] [[성덕왕]] 시대에 수도 [[서라벌]] 남쪽을 [[왜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지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모벌군성(毛伐郡城)혹은 모벌관문(毛伐關門)이라 불렸으며 각간 원진이 감독하에 건설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름대로 경주 외곽을 막는 [[관문]] 역할을 했던 성으로 꽤나 유명한 요새였는지 당나라 기록에도 관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신라|그 나라]]의 산은 수십리씩 연결되어 있는데, 입구의 골짜기에 튼튼한 쇠문짝을 만들어 달고 '''관문(關門)'''이라 한다. 신라는 이 곳에 항상 궁사 수천명을 주둔시켜 지킨다. >---- >《[[신당서]]》 권220 열전 제145 [[http://db.history.go.kr/item/level.do;jsessionid=AF18B2C466D02F4369F05103C0254800?levelId=ko_035_1850_0030|신라전(원문)]]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경주와 울산의 경계지점인 여기는 울산항으로 왜군이 상륙했을 때 지나쳐야 하는 좁은 협곡 지형으로 척 봐도 방어하기 좋은 요충지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현 경주 외동읍까지 왕경 경주 범위로 간주되었던 것을 볼 때[* 예를 들어 [[신라왕릉]]은 망국의 왕이란 특수성이 있는 [[경순왕릉]] 외에는 전부 수도 [[서라벌]] 범위 안에 있는데, [[원성왕릉]]이 외동읍에 있다.] 이 관문성이 왕경 경주와 지방인 울산을 구분하는 경계선으로 기능했던 것으로도 추정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bd91840f4a92efd1b3803ca989242abeb881679d20a75a3a8a5d89094f0c2b85.jpg|width=100%]]}}} || || {{{#fff ''' 관문성을 '신라의 만리장성'으로 소개한 뉴스 영상 '''}}} || 성벽 12km가 산능선을 따라 쭉 이어져 있어서 ''''신라의 [[만리장성]]''''~~삼십리장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관문성을 설명할 때 거의 언급되는 편으로 반쯤 공식 별명수준. 그런데 상당히 오버스런 별명인 것 같고 사실 그렇긴 하지만(...), 가리는 나무가 산에 별로 없었던 옛날에 찍은 사진들을 보면 그럭저럭 장성스러운 느낌은 난다. 사실 [[조선시대]]부터 이미 이 성을 만리성(萬里城)이라고 불러왔다고 하니까 현대에 급조한 별명은 아니다. >관문성(關門城) >부의 동쪽 45리 울산 경계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6799척이다. '''지금은 만리성(萬里城)이라 부른다.''' 【이상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데 사이사이에 빠진 것을 보충했다.】 >---- >《[[동경잡기]]》. 1845년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farm2.staticflickr.com/25490545366_8db88b992d.jpg|width=10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PYH2015072800570005700_P2.jpg|width=100%]]}}} || || {{{#fff ''' 관문성 옛 사진'''}}} || 성 안에 [[성문(건축)|성문]]과 건물터가 여럿 있지만 위 사진을 보다시피 본격적인 복원은 시작되지 않은 상태다. == 외부 링크 == * [[https://ko.wikipedia.org/wiki/관문성|한국어 위키백과: 관문성]]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23985&cid=46656&categoryId=46656|한국민족문화대백과: 관문성]]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787653&cid=64865&categoryId=65326|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관문성]]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055018&cid=42840&categoryId=42846|답사여행의 길잡이 2 - 경주: 관문성]]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056919&cid=42840&categoryId=42844|답사여행의 길잡이 14 - 경남: 관문성]]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64429&cid=40942&categoryId=33380|두산백과 : 관문성]] == 사적 제48호 == *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3,00480000,37&pageNo=1_1_1_0|문화재청 홈페이지: 관문성 (關門城)]]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경주를 보호하기 위해 신라 성덕왕 21년(722)에 쌓은 산성이다. > >원래 이름은 모벌군성(毛伐郡城)·모벌관문(毛伐關門)이었는데, 조선시대에 관문성으로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박천이라는 냇물을 사이에 두고 동해를 향하여 쌓았으며, 673년에 쌓은 북형산성과 함께 경주의 동쪽을 지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 >관문성은 경주의 다른 산성들과 다르게 산과 산을 연결하며 길게 쌓은 특수한 방식의 산성으로, 그 규모가 12㎞에 달해 신라의 만리장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성 안에는 성문자리로 보이는 곳과 창고자리·건물자리 등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 >잘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산성으로, 경주의 남산성과 비교해볼 때 성쌓기 방식에서 훨씬 발달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분류:신라]][[분류:산성]][[분류:대한민국의 사적]][[분류:울산광역시의 문화재]][[분류:경주시의 문화재]][[분류:성채/대한민국]][[분류: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