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972년 범죄]][[분류:1973년 범죄]][[분류:1974년 범죄]][[분류:제3공화국/살인사건]][[분류:제4공화국/살인사건]][[분류:대한민국의 강도살인 사건]] [include(틀:사건사고)] [목차] == 개요 == || [[파일:worst criminals.jpg|width=100%]] || || 왼쪽이 문도석, 오른쪽이 이종대 || [[1972년]]부터 [[1974년]]까지 이종대(향년 38세), 문도석(향년 31세) 2인이 탈취한 [[M1 카빈]] 소총을 사용해 연쇄강도 및 살인을 저지른 사건. 적어도 4건의 범행이 일어났고 당시 돈으로 496만원 가량이 탈취되었으며 3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https://v.daum.net/v/20230825052801865|교도소서 만나 살해 또 살해…끝내 아들과 자신까지 죽였다]] == 범인은 어떤 인물인가 == 주범 이종대는 불우한 가정 출신으로 20살이었던 [[1955년]]부터 상습적으로 [[강도죄|강도]]를 저지르다가 [[1957년]]에 체포되어 군산교도소에 수감되었으나 [[1958년]] [[7월 9일]] [[교도관]]을 [[폭행]]하고 [[권총]]을 탈취한 후 교도소를 [[탈옥]]했다가 2시간 만에 다시 검거되는 등의 [[전과(범죄)|전과]]가 있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출소한 것이 1968년이다. 문도석도 이종대처럼 불우한 가정 출신으로 [[대한민국 해병대]]에 입대했으나 [[탈영]]을 저질러 [[불명예 전역]]하고 운전사 일을 하다가 [[교통사고]] 및 그 외 폭력, 횡령, 업무상과실치상 등 죄목으로 옥살이 [[안양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 여기서 이종대를 만나 의기투합했다. 이후 둘은 여러 건의 범죄를 저지른다. 본인들은 범죄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으로 직장을 구하지 못해 그랬다고 주장했지만 결국은 변명일 뿐이다. 우선 [[1972년]] [[7월 27일]] 은행에서 직원 월급을 찾아 나오는 서울 상명초등학교 직원을 납치 강도한 후 총이 있으면 더 크게 범죄를 저지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1972년 9월에 경기도 [[평택시|평택]]의 예비군 무기고에서 [[M1 카빈]] 소총 3정과 120발의 실탄을 절취했다.[* 당시 [[향토예비군]]을 갓 창설하면서 각 마을에 무기고를 두었는데 무기고 관리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허술해서 이렇게 총기가 손쉽게 털리는 일이 가능했다. 1971년 8월에는 '''10대 소년''' 2명이 '''못'''을 이용해 자물쇠를 따 무기고에서 카빈 소총을 훔쳐 다방에서 난사한 일이 있었다.] 범인 중 문도석이 열쇠 관련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문도석은 그 능력을 범죄에 사용한 것이다. [[파일:external/file1.bobaedream.co.kr/DQJ523b01ea1cb26.jpg]] 범인들이 사용한 M1 카빈 [[소총]]. 은닉이 편하도록 [[개머리판]]과 [[총열덮개]] 등을 제거하고 권총손잡이를 만들어 붙여 대형 권총 수준으로 크기를 줄여 개조했다. [[https://m.youtube.com/watch?v=WXyXGpKZLh4|당시 사용된 총기를 에어소프트 건으로 재현한 영상]] == 범행 == [youtube(_aarvkuVS5A)] 이들은 [[1972년]] [[9월 12일]] 은행에서 돈 66만원을 찾아 나오던 이모 씨[* 당시는 [[계좌이체]]가 없던 시대라 돈을 찾거나 보내려면 무조건 현금을 싸들고 [[은행]]을 드나들어야 했고 월급을 현금뭉치로 봉투에 담아 줬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에서는 이 피해자의 이름을 '박현우'라는 가명으로 내보냈다.]를 [[납치]]한다. 대낮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이들이 경찰복 차림을 하고 [[포드 코티나|가짜 관용차]] 번호판을 단 차량으로 범행했기에 목격자들은 범죄자 연행인가 보다 하고 넘어갔고 말리지 않았다고. 납치 5분 만에 공덕동 부근에서 4발의 총성이 들렸다는 제보가 들어온 후 차가 발견되었지만 범인들과 피해자 모두 어디에도 없었다. 싸운 흔적과 피해자로 보이는 사람의 혈흔만이 남아 있었고, 피해자는 그대로 실종되고 만다. 범인들이 피해자의 반항이 심하자 사살한 뒤 경기도 용인의 [[경부고속도로]] 인근 야산에 [[암매장]]했기 때문이다. [[1973년]] [[7월 27일]]에는 산구에 위치한 은행에서 교직원을 납치해 55만260원을 빼앗기도 했다. [[8월 25일]]에는 [[구로공단구|로동 제1수출공업단지]]에 소재한 한 회사를 노렸다. 당시 24살 경리 직원은 은행에서 직원들의 월급을 찾고 회사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종대는 직원에게 다가가 소총을 겨누고 이내 직원의 하복부에 쐈다. 직원은 숨졌고 범인은 378만1500원(현재 가치로 약 6339만 원)이 든 현금 보따리를 뺏어 차를 타고 달아났다. 그날 밤 '''"여기 [[성산동(서울)|성산동]]인데요. 골목길에 [[포드 코티나|수상한 차]]가 한 대 있어요, 번호판도 없고요."'''라고 신고 전화가 들어왔다. 경찰은 바로 출동했고 차 안을 수색하던 도중 두 명이 놓고 간 노트가 발견됐다. 경찰이 단서가 있을까 해서 확인해 봤더니... >'''지문 채취 열심히 해보슈''' 라고 조롱하는 글이 남겨져 있었다. 당연하지만 이걸 본 경찰은 완전히 [[극대노]]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 '''3만 명'''이 동원되었고 현상금도 22만원에서 '''200만원(현재 가치로 3340만원)'''으로 올라갔다. 차량 정비소, 차량 절도범들, 운전면허 소지자들까지 전부 수사 대상으로 올랐다. 바로 그때 [[엽서]] 한 장이 경찰서에 날라왔다. 수신인이 수사본부장이라고 적혀 있어 내용을 확인했더니... 이 또한 실로 가관이었다. >'''필적 감정 열심히 해보슈[br]좆빠지게 됐구나[br]진범으로부터''' 하지만 그들은 잡히지 않았고 꼬박 1년 가까이가 흐른 [[1974년]] [[7월 23일]] 또 추가 범행을 저질렀다. 승용차를 빌려 지방으로 내려가던 중 승용차 운전사 최모 씨가 이들이 숨긴 총을 발견하자 역시 살해한 후 [[경상남도]] [[산청군]]의 야산에 암매장하고 그 승용차를 탈취한 것이다. 이후 [[오산시]], [[성남시]] 일대를 이동하던 중 [[7월 25일]] 새벽 경기도 오산시 죽미령 인근에서 승용차가 고장나자 범인 중 하나가 등산복 차림으로 시내까지 내려와서 [[택시]]를 잡았는데 이때는 새벽이었다. 당시는 승용차가 귀했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장난 차량을 두고 서울로 가자는 요구와 당시 죽미령은 인적이 드문 장소였다는 점이 이상했던 [[택시 기사]]는 '자신이 피곤해서 기사를 한 명 더 태우고 가자'고 했으나 이를 완강히 거부하자 승차를 거부했다. 이를 수상히 여긴 택시 기사가 인근 [[파출소]]에 신고했지만 경찰은 범인(문도석)의 인적사항을 파악했으나 별다른 특이점은 없어서 그냥 보냈다. 범인이 탄 다른 택시의 기사는 고장난 승용차까지 데려다준 후 자신이 수리를 해 주겠다며 자리를 피하고 택시를 타고 시내로 왔다. 방금 전 상황을 수상히 여긴 그는 경찰 둘을 데리고 돌아왔고 검문했는데 이 과정에서 뒷좌석 쪽에서 개조한 카빈 소총을 발견했다. 이에 범인 중 하나가 총격을 가했고 택시 기사와 경찰은 황급히 도망쳤다. 다행히 이때는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범인들은 택시를 타고 도주했다. 방금 전 일로 문도석의 인적사항을 파악했던 경찰이 이들의 연고지[* 현재 구로구 개봉로5길 48.]에 급파되었다. 어찌어찌 집으로 돌아갔지만 꼬리를 밟힌 둘은 [[자포자기]]하여 죽기로 결심했고 문도석은 그날부로 바로[* 밤 9시 30분.] '''7살 아들을 살해하고 [[자살]]했다.'''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 오자 문도석이 이종대에게 자신은 남자답게 죽겠다면서 '''내 아이는 내가 데려가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말을 그대로 실행에 옮긴 것.[* 참 안타까운 게 문도석의 아내는 "자수하고 싶었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고 말하는 남편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끼고 몸을 피했지만 어린 아들은 그저 아빠가 좋아서 아버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가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다고.] "이 같은 범행을 저지르고 어찌 살겠다고 발버둥치겠소"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이종대는 여성 1명, 어린이 2명을 [[인질]]로 삼고 날짜가 바뀌어 다음날인 7월 26일이 될 때까지 꼬박 하루 가까이를 버티며[* 문도석이 자살한 지 1시간 만인 밤 10시 반부터 다음날 8시 2분경까지.] 경찰과 대치했다. 그곳이 어디냐면 인천에 있는 자기 집이었고, 그 인질들이 누구였냐면 바로 이종대의 아내와 아이들. 바로 자신의 '''가족들'''이었다. 경찰이 집을 포위하자 4시간 만에 이종대는 '''자기 아내를 총으로 쏴 죽였다.''' 총성이 들리자 '가족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는 경찰을 향해 '가족들 얘기는 꺼내지 마라. 내 마누라, 내 새끼들 죽이고 살리는 건 내가 결정한다'는 [[망언]]을 내뱉기도 했다.[* 다만 1970년대는 [[가부장제]]가 극심했던 시절임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얼마 후 또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무슨 일인지 묻는 경찰에게 이종대에게서 나온 답은 충격적이었다. >'''[[영구차]]를 준비해라. 두 아들을 죽였다...''' 이후로도 장장 17시간 동안이나 농성이 이어졌다. 경찰뿐 아니라 온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이때 모인 인파가 약 2천명에 달했다.] 하루종일 가슴 졸이며 지켜보고 이종대의 가족, 친척, 지인들이 총동원되어 설득했으나[* 당시는 경찰에 [[협상]] 전문가가 없었던 시절이라 어쩔 수 없었겠지만 실제 베테랑 위기 협상 요원에 따르면 이렇게 범인의 친족과 지인을 협상자로 투입하는 것은 사실 사태가 악화될 가능성만 더 높아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한다. 실제로 이 사건이 비극으로 끝난 것만 봐도 그렇고. 4년 전인 1970년 [[일본]]에서 발생한 [[아사마 산장 사건]]에서도 경찰이 인질을 잡고 대치 중이던 범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가족들을 투입했다가 오히려 범인들을 더 자극하는 [[역효과]]만 불러왔고 급기야 이들이 당시 투입된 [[패륜|자기 어머니에게까지 총을 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종대가 '어차피 자신은 지은 죄가 너무 많아 [[사형]]을 당할 사람'이라며 요지부동이라 모든 시도가 실패했다. 실제로 사형이 집행되던 시절이기도 했고. 위에 언급된 범죄 행각의 내용이 바로 이 경찰과 대치 중이던 상황에 자백한 것들이다. 그러다 8시 2분경, 또다시 총성이 들렸다. 경찰이 이종대를 불렀지만 이번에는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 후 경찰이 창문을 향해 작은 돌을 던져 보며 반응을 살펴보았지만 역시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이에 조심스레 안에 들어간 경찰들은 좁은 방에 '''이종대와 아내, 그리고 겨우 3살과 6살인 어린 두 아들들까지 온 가족이 모두 시체가 되어 누워 있는 실로 비참한 광경을 목도한다.''' 큰 아들 태양이 가슴에는 장난감 기타가, 막내아들 큰별이 품에는 장난감 자동차가 안겨져 있는 모습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나마 다행인 건 피해자들의 시신은 찾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종대가 자살하기 전 피해자들의 암매장 장소를 경찰에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벽걸이 [[달력]]을 뜯어서 그 뒷면에 글을 쓰고 약도를 그린 뒤 창문 너머로 던져 주었다고 한다. 유서도 이 남은 달력에 작성했는데 그 내용이 가관이다. >'''태양아 큰별아 미안하다[br]여보 당신도 용감했소[br]너희들 뒤를 따라간다[br]황천에 가서 집을 마련해서 호화롭게 살자[br]이 냉혹한 세상 미련없다''' 마치 자기 가족들이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처럼 쓴 것이다. 결국 범인 본인들과 그들의 가족을 포함해 9명이나 되는 사람이 사망하는 참극이 벌어지고 나서야 사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끝이 난다. == 창작물 == [[10월 유신]] 체제 하의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총기 강도사건이라는 점에서 당시 사회의 큰 이목이 쏠렸으며 이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은 각종 창작물도 여러 차례 만들어졌다. * 소설가 [[최인호(작가)|최인호]]는 1979년 이 사건을 소재로 《[[지구인]]》이라는 [[소설]]을 썼다. 이 책은 현재도 절판되지 않아 구할 수 있다. 2005년 개정판 서문에서 작가는 "산업사회가 시작되던 1970년대 초 두 사람에 의해서 저질러진 연쇄살인은 지금껏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었던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괴리현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보인 사회 범죄였다. 이종대를 그 사회악의 하수인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썼다. * [[이장호]] 감독이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라는 제목으로 1982년 [[영화]]화했다. * [[KBS 2TV]]에서 [[1990년]] 6월 27일부터 1990년 8월 16일까지 매주 수, 목 밤 9시 50분에 '지구인' 이라는 제목으로 TV [[미니시리즈]]화하여 방송하였다. [[임성민(남배우)|임성민]]이 이종대 역을 맡았고 아우인 이종세는 [[선우재덕]](아역은 [[임창정]])이 맡았다. 문도석은 [[정승호]]가 맡았다. * [[이명세]] 감독의 데뷔작 [[개그맨(영화)|개그맨]]은 이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남주인공 2명의 이름부터 이종'''세'''[* 이명세 감독이 알고 지은 이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이종대의 이복동생의 이름이 진짜로 '이종세'다.]와 문도석이다. * [[이현세]]의 [[만화]] "며느리 밥풀꽃에 대한 보고서"의 초반부 무장강도 사건도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주인공의 인생이 무너지는 첫 계기가 된다. * [[이본토]]의 [[만화]] 《개머리판 없는 칼빈강도》는 이 사건을 만화로 그린 것이다. * [[연극]] '등신과 머저리'는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1980년 대한민국연극제 문공부장관상 및 남자 연기상, 1981년 [[백상예술대상]] [[희곡]]상을 수상했다. == 기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HTLubIP9KVw)]}}} || || {{{#000000,#ff0 ''''동반 자살'이 아닌 '살해 후 자살'인 이유 | 꼬꼬PICK'''}}} || * 2021년 7월 15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에서 다루며 재조명되었다. 해당 방영분에서는 사건의 전체적인 전개 과정과 함께 '주범들이 어린 자식들을 포함한 가족 구성원들을 살해하고 자살하기까지의 행적'[* 심지어 위 문단에서 인용된 바와 같이 [[피해자 코스프레|자신이 무슨 각박한 세상 때문에 의롭고 억울한 죽음을 맞았고]] 가족들(어린 자식들 포함)은 각자 자신의 죽음에 스스로 동의했다는 식으로 [[유서]]를 써 놨다. 이야기 친구로 출연한 정성호는 이 유서의 내용을 보기도 전에 '값어치 없는 유서'라며 분개했다.]을 자세하게 다뤘다. * '''특히 오직 부모를 잘못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너무도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된 무고한 아이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과 그 아이들의 시신이 운구되는 장면'''[* 이종대의 아들들의 시신이 들것에 실려 옮겨지는 장면이 포착된 당시의 영상과 사진을 (아무래도 시체 사진이다 보니 어느 정도 [[블러]] 처리되기는 했지만) 그대로 인용하였는데 아이들이 너무 어려 그만큼 몸도 작다 보니 들것 하나에 두 아이를 모두 눕힌 채 옮겨지는 모습이었다. 당시는 개인정보나 인권을 보호한다는 개념이 거의 전무해서 사건사고가 터지면 가해자건 피해자건 이름 석 자에 심하면 주소까지 그대로 까발려지는 시대였기에(이 사건에서도 범인들에게 살해 및 암매장당한 사람들의 실명이 모두 공개되었다) 천 하나 덮이지 않은 채 시신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다.]에서 이야기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전 출연진이 눈물을 펑펑 쏟으며 분노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였다.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 19회에서 이 이야기가 다뤄졌는데 출연진 중에서도 자녀가 있는 [[이현이]]와 [[정성호(코미디언)|정성호]]가 특히 크게 분노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이야기꾼(진행자)인 [[장성규]]도 이종대가 아내와 자식들을 죽인 직후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두 아들이 방에 쓰러져 있는 모습을 말하기 직전에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현이처럼 슬하에 2남을 두고 있는지라 차마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던 모양.] 심지어 정성호가 이종대의 유서 내용을 읽고 나서 "말도 안 되는 새끼네, 이거."라며 욕까지 하는 모습이 여과 없이 그대로 전파를 탔는데 본인 문서에도 언급되어 있듯 정성호는 슬하에 2남 2녀를 두고 있다. 그렇다 보니 강도범들이 자기 품 안에 안기려는 자식을 비정하게 살해한 뒤 자살했다는 얘기를 듣고 더더욱 가슴이 찢어질 수밖에 없는 것.[* 그 전에는 들고 있던 자료사진을 화풀이하듯 던져 버리기도 했다. 그는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잠시 남한 측 패널로 출연했을 때는 [[북한]]의 열악한 아동 인권 실태를 주제로 다룬 방영분에서 북한 당국의 아동 인권 유린에 대한 증언을 들으면서 대놓고 '미친 거 아니냐'고 비난했을 정도로 아동 대상 범죄나 인권 유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 두 아들의 어머니인 이현이도 아이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할 정도로 흐느껴 울었다.[* 특히 후반부에 나온 [[살해 후 자살]]에 대해서 보도한 뉴스 영상에서 이현이의 슬픔은 제대로 폭발했다.] 그 밖에도 어떻게 제 자식에게 그럴 수가 있느냐, 무고한 아이들의 생사를 왜 부모가 멋대로 정하느냐며 울분을 토로하기도 했다. 특히 이현이는 [[장도연]]이 '''"잠시 후"'''라는 말을 하자 '''"거짓말..."'''이라며 부정하다 마침내 '''"두 발의 총성이 울렸어."'''라는 말이 나오자 '''"거짓말. 어떻게 그래? 어떻게 자기 자식을."'''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 방송의 후반부에는 언론에 보도된 [[일가족자살]] 사례 몇 가지를 함께 언급하면서[* 2000년부터 2019년까지 19년간 언론에 보도된 수만 무려 '''247건이었다.''' 그리고 보도되지 않은 사건도 있을 것임을 생각하면 실제로는 더 많았을 것이다. 피해자는 대부분 평균적으로 9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이며 당연하지만 자의로 죽음을 택한 아이들이 절대로 있을 리 없다. 참고로 뉴스 자료 중에는 [[인천 일가족 자살사건]]을 다룬 뉴스도 나왔다.] 부모가 아직 의사결정 능력이 없는 어린 자식을 살해하고 자신도 죽는 것을 [[동반자살]]로 치부하는 잘못된 사회적 인식과[* 사건을 보도한 당시의 신문 기사 중 주범들이 아이들을 살해하고 자살한 것에 대해 '(그래도 아비 없이 세상 살기 힘들테니 데려가겠다는 부정이 느껴진다며) 마냥 나무랄 수만은 없다'고 서술한 부분에서 [[김선재(아나운서)|김선재]] 아나운서는 차마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하는 표정을 보였고 정성호는 대놓고 '이 사람들 한글 다시 배워야겠다'고 깠다. 김선재는 자신도 뉴스를 진행하고 있지만 뉴스에서도 종종 나오는 '동반자살'이라는 단어 자체가 너무나 많은 상황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 같다고 평함과 동시에 '분노해야 할 것 같다'는 의견을 말했다.] 존속살해에 비해 비속살해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법적 장치까지 비판했다.[* [[장항준]]이 이 때 '''"[[법]]도 그래."'''라고 씁쓸하게 말하기도 했다.] *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것은 [[존속살해]]라는 죄목이 있고 일반 살인보다 더 중한 처벌을 내리지만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경우는 형법으로 규정한 가중처벌 사유도 없을 뿐더러 심지어 부모가 오죽하면 그랬겠냐며 [[정상 참작]]의 사유로 감형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똑같이 [[패륜]]인데도. 한 마디로 그간 [[사법부]]의 관행이 자식을 한낱 부모의 소유물 정도로 여기며 독립된 인격체로 대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반대로 부모의 [[아동 학대]]에 시달린 자식들이 살기 위해 부모를 살해하는 존속살해가 벌어졌을 때 [[이은석(범죄자)|형량을 낮추는 일 따위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심각한 일이다.]] 사실상 [[아동 학대]] 피해자들이 [[법]]에 대해서 심한 반감[* 반대하거나 반항하는 감정을 뜻하는 단어다.]과 [[사법불신]]을 품게 되는 원인을 갖게 된 결정적인 이유로 볼 수 있다. 심지어 심하면 [[자국 혐오]]까지 이어질 정도로 [[대한민국]]의 [[사법부]]가 아이의 목숨보다 어른의 목숨을 소중하게 대하면서 방치한 끝에 얻은 참혹한 [[대가]] 중 하나라고 보면 된다. * [[민법]]에서 부모의 징계권, 즉 합법적으로 자식을 [[체벌]]할 수 있는 [[권리]]가 삭제된 게 '''[[2021년]]'''이니 말 다한 셈이다. 해당 회차에 언급된 기사 중에는 고작 육아 스트레스로 자식을 살해한 경우도 [[집행유예]]를 선고한 예가 나오는데 [[이은석(범죄자)|이은석 사건]] 같은 경우 부모의 필설로 다 쓰기 힘든 오랜 학대 끝에 참다 못해서 부모를 살해한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당시 언론에서는 끔찍한 패륜 범죄로만 보도되었고 검사는 사형을 구형했으며 친형의 적극적인 변호로 그나마 정상참작 되어 무기징역을 받았다. * 출연진들 모두 '동반자살'이라는 말 자체를 쓰지 말아야겠다는 견해를 보였으며 '동반자살'이라는 단어 자체가 한국과 일본 정도 외에는 거의 사용되는 예가 없다는 사실도 함께 언급했다. 서양권에서는 구성원이 모두 동의하에 자살한 Joint suicide와 위 사건과 같은 Murder suicide(살해 후 자살)라는 용어로 구분한다. [[머큐리]] 같은 수사물 요소가 있는 미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종종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꼬꼬무에서는 '[[살해 후 자살]]'이란 표현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