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자위대 역대 통합막료장)] [include(틀:자위대 역대 육상막료장)] [[파일:external/www.geocities.co.jp/13kurisu.jpg]] 栗栖弘臣 (くりす ひろおみ) [[1920년]] [[2월 27일]] ~ [[2004년]] [[7월 19일]] [목차] == 개요 == 일본의 [[군인]], [[자위관]]. == 생애 == [[일본육군사관학교]]가 아닌 [[도쿄대학]] 출신이다. [[1920년]]에 [[구레시]]에서 태어났다. 구레(呉) 제1중학교, 도쿄 [[구제고등학교|제1고등학교]]를 거쳐 [[1943년]]에 [[도쿄대학]] 법학부에 진학하였다. [[고등문관시험]]을 수석 합격해 [[일본제국 내무성]]에 입성했으나 [[일본 해군]] 단기장교를 지원해 [[군법무관]]이 되었다. 1945년 [[일본]]의 패전 당시 계급은 [[대위]]였고, [[전범]] 재판 등에서 변호인을 맡았다. 귀향 후에 [[변호사]]로 근무하던 중에 [[1951년]] [[경찰예비대(일본)|경찰예비대]]에 입대했고 주프랑스 일본[[국방무관|방위주재관]], 제13[[사단장]], [[동부방면대]] 총감 등을 거쳐 [[1976년]]에 [[미요시 히데오]]에 이어 [[육상막료장]]에 올랐다.[* [[소령|1등육좌]] 시절에 일본의 [[핵]] 보유를 주장하는 논문을 쓰기도 했다.] [[1977년]]에 육막장은 [[다카시나 다케히코]]에게 이임하고 [[사메시마 히로이치]]에 이어 10대 [[통합막료회의의장]]에 올랐다. 의장으로 재직하던 당시에 "지금의 자위대 관계법으로는 침략한 군대가 자위대원들에게 발포를 하게 되어도 총리의 출동명령이 내려올 때까지는 자위대원들은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즉각응전조차 할 수 없다. 결국 자위대원들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초법규대응으로 전투를 하게 된다. 따라서 이를 해결할 유사법제의 제정의 필요하다"라고 발언하여 '''초법규 대응''' 문제를 일으켰다. 자위관이 정견을 밝히는 것은 [[문민통제]]에 중대한 도전이었기에 자위대의 [[장성급 장교|장관급 장교]]들을 두둔하던 [[가네마루 신]] 당시 방위청장관은 그를 사임시켰다. 후임자는 육막장과 마찬가지로 [[다카시나 다케히코]]였다. 어쨌거나 [[2003년]]에 관련 유사법제는 정리되어 이 문제는 일단락 되었고 자위대 관련 주요 이슈로 유명하다. 구리스는 방위청장관을 방위대신으로 격상시킬 것을 요구하기도 했고 [[2007년]]에 북핵 실험의 여파로 방위청은 [[방위성]]이 되었다. [[1980년]]에 참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2004년]]에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분류:일본의 변호사]][[분류:일본의 자위관]][[분류:일본 제국의 군인]][[분류:일본의 남성 정치인]][[분류:구레시 출신 인물]][[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1920년 출생]][[분류:2004년 사망]][[분류:고등문관시험 출신]][[분류:도쿄대학 출신]][[분류:군인 출신 정치인]][[분류:법조인 출신 정치인]][[분류:심근경색으로 죽은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