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사)]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2e8b57 0%, #2e8b57 0%, #2e8b57 80%, #2e8b57)" '''{{{#ece5b6 {{{+1 북송의 충신[br]내충민공(萊忠愍公)[br]{{{+1 寇準 | 구준}}}}}}}}}'''}}} || || '''{{{#ece5b6 시호}}}''' ||충민(忠愍) || || '''{{{#ece5b6 작위}}}''' ||내국공(萊國公) || || '''{{{#ece5b6 성}}}''' ||구(寇)|| || '''{{{#ece5b6 이름}}}''' ||준(準) || || '''[[자|{{{#ece5b6 자}}}]]''' ||평중(平仲) || || '''{{{#ece5b6 생몰연대}}}''' ||961년 ~ 1023년 || || '''{{{#ece5b6 출신}}}''' ||화주(華州) 하규(下邽) || || '''{{{#ece5b6 주군}}}''' ||[[태종(송)|송태종]][br][[진종(송)|송진종]] || [목차] [clearfix] == 소개 == '''[[정강의 변]]을 100년 뒤로 늦춘 인물''' 구준(寇準, 961년 ~ 1023년)은 북송시대 명재상이자 시인, 정치가이다. 자는 평중(平仲)이며, 시호는 충민(忠愍). 화주(華州) 하규(下邽) 사람으로 요나라(거란) 침입 당시 수 많은 공을 세운 까닭에 내국공(萊國公)에 봉해져 구래공(寇萊公)이라고도 불린다. [[진종(송)|송진종]]을 섬기면서 [[전연의 맹]] 당시 강경론적인 주장을 펼쳐 송나라의 평화를 지키는 큰 공을 세웠으나 강직한 성품으로 한직으로 밀려난 인물이다. == 초반 생애 == 오늘날의 산시성 태곡현 출신으로 어릴때에는 호쾌하고 대범했지만, 술을 즐기며 잔치에 가길 좋아하고 동네에서 사고를 치고 다니던 소년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날 어머니 조씨(趙氏)가 집에 들어온 아들을 혼내면서 던진 물건이 구준의 발등에 맞은 뒤, 정신을 차리고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태평흥국(太平興國) 5년(980) 진사가 되었는데, 워낙 총명해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과거를 볼 때도 나이가 너무 어린지라 나이를 보태서 과거를 보라는 권유를 받을 정도였고 송 태종은 이런 그를 아껴 당나라 시절 명재상 위징에 비유했다. 33세의 젊은 나이에 참지정사가 되어 국정에 참여했지만 문제는 성격이 강직했다는 것.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관철시키는 것은 훌륭했으나 동료나 상사뿐만 아니라 태종에게까지 양보하려 하지 않아 결국 태종말년에는 지방의 지주(知州)로 좌천되었다. 그러다가 진종이 즉위하면서 중앙으로 복귀하여[* 구준의 복귀는 그의 능력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태종이 진종에게 내린 유지가 즉위하면 구준에게 요직을 맡기라는 것이었다.] 43살의 나이에 삼사사에서 재상으로 승진하였다. == 중원을 지키다: [[전연의 맹]] == 1004년, 동북방에 있는 요나라가 20만 대군을 일으켜 송나라를 공격해 오자 왕흥약과 진도수 등은 '''수도를 남쪽 금릉(남경)이나 사천으로 옮기자'''고 주장하지만 구준은 그것에 반대하고 맞서 싸움과 동시에 송 진종의 친정을 건의했다. 구준의 말대로 직접 진종이 친정을 하자 송군의 사기는 올랐다. 요나라와의 전투가 벌어지고 1년 뒤인 1005년 [[야율사진]]의 밑에서 북송의 명장 [[양업]]을 생포하는 공을 세웠던 요나라의 명장이자 남경 통군사로 임명된 [[소달름]](蕭撻凜)이 송의 대장 이계륭과 맞서 싸우다 정찰 도중 송나라 군사들이 쏜 쇠뇌에 맞아 화살독으로 인해 영채로 옮겨져 그날 밤 사망했다. 요나라 군사는 진종의 친정으로 송나라 군사의 사기가 올랐는데 지휘관인 소달름이 죽자 사기도 떨어졌고, 황제가 친정한 송군을 격멸할 자신이 없어져 화의를 요청했다. 그렇기에 구준이 진종의 친정을 건의해 요나라에게 강한 모습을 보여준 것은 현명한 일이었다. 만약 황제가 성도나 금릉으로 수도를 옮겼으면 요나라군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요나라는 대대적인 침공을 해 오대십국 후진 때처럼 다시 한번 중원을 차지했을 것이고 '''요나라로 인하여 100년 앞서 정강의 변이 일어나 [[위진남북조]] 이래 제 2의 북방민족의 중원 정복이 이뤄졌을 것이다.''' 송나라 역시 서북쪽에서 [[탕구트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계속 전쟁을 끌고 가기는 어려워 요나라의 화의 요청을 받기로 했다. 구준은 이에 반대해 '''끝까지 싸워 [[연운 16주]]까지 탈환하자'''고 주장했으나 얼마 후 그가 전쟁을 이용해 자신의 세력을 키우려 한다는 비난의 소리가 올라왔고, 결국 구준도 강화에 찬성했다. 요나라의 진영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은 조리용(曹利用)이었는데, 요나라 진영에 사신으로 가기 전 진종은 그에게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라면 세폐를 100만이라도 허용해도 좋다"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조리용이 궁을 나서자 옆에 있던 재상 구준이 조리용에게 "폐하께서 비록 백만의 세폐를 허용하셨을지라도 그대는 30만을 초과해서는 안 되오. 만약 30만을 초과하면 그대가 나를 보러 올 필요 없소. 내가 그대를 죽일 테니까."고 엄포를 놓았다.[* 한편, 송사 조리용의 열전에서는 위의 내용이 언급되지 않고, 송진종이 '''"요나라가 땅을 요구한다면 그것만큼은 내줄 수 없다"'''고 당부하였고 조리용도 '''"그쪽에서 과분한 요구를 한다면 신 역시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는 각오를 비췄다고 한다.] 거란과의 교섭 끝에 은 10만냥과 비단 20만 필. 즉 30만 선에서 합의를 본 조리용이 보고를 하기 위해 진종이 있었던 전주의 행궁으로 귀환하자 마침 식사를 하고 있었던 진종은 내시를 시켜 조리용에게 세폐가 얼마인지를 묻게 했다. 그러자 조리용은 '''"이건 기밀사항이니까 내가 직접 황제께 아뢰겠다."''' 말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이 대답을 들은 내시가 진종의 방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뒤 다시 나와서 "먼저 대략의 숫자를 말하시랍니다"고 황명을 전했다. 그러자 조리용은 여전히 말하지 않고 단지 3개의 손가락만 펴고 손짓으로 표시했다.이걸 본 내시는 진종에게 "3개의 손가락을 편 것을 보니 대략 3백만이 아닌가 합니다"라고 전했고 진종은 멘붕하여 "너무 많다! 많아!"라며 큰 소리로 말하다가 잠시 후 "아냐. 이 정도로 일을 처리할 수 있다면 괜찮은 편이다"라며 정신줄을 놓은 혼란스런 반응을 보였다. 당시 진종이 묵던 행궁이 작아서 조리용 역시 진종이 너무 많다고 소리친 것을 들을 수 있었고 진종을 알현할 때 "잘못했습니다. 신이 수락한 액수가 너무 많사옵니다" 라고 용서를 빌었다. 진종이 30만도 너무 많다고 소리친 줄 알았기에 두려움에 떤 것이다. 정신줄을 수습한 진종이 다시 한 번 얼마나 되느냐고 묻자 조리용은 벌벌 떨며 30만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진종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조리용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또 요나라는 송과 군신의 관계를 맺지는 않았지만 송을 형으로 함으로써 송은 체면을 유지했고 대신 송이 요나라의 황태후를 숙모라 부르기로 했다. == 말년 == 그 후 구준은 지나치게 강직한 성품때문에 적을 많이 만들었다.[* 그것도 상대가 딱히 악인이었거나 한 것도 아니다. 구준에게 공격 당한 사람들 중에는 [[왕단]] 같은 명재상도 있었다. 그나마 왕단은 대인배라서 오히려 구준을 칭찬하고 감싸주었지만.] 끝내 황태자를 모시던 정위와 [[전유연]] 두 사람을 아첨꾼이라 하고 이들에게 소주(少主)[* 훗날의 인종을 말한다.]를 맡기게 할 수 없다고 한 일이 정위에게 알려져 중상모략을 받은 끝에 도주사마로 좌천되었고 진종이 죽은 후에는 뇌주의 사호참군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 대중매체에서 == 1997년 드라마 구로서아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인종시대에 포청천이 있었다면 진종시대에는 구준이 있었다라는 정도로 충신이며 청렴한 것으로 표현된다. 2021년 드라마 대송궁사에 등장한다. 충신이며 송나라에서 지략으로는 견줄 자가 없다. 청렴하고 곧은 성격이라 다른 신하들에게 견제당하고 옳은 말만 해서 황제도 구준의 말을 듣기 싫어하는 편이다. 구준은 나랏일을 하려면 민심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황제가 민심을 멀리해서 안타까워 한다. [[강조의 정변]]으로 인한 [[성종(요)|요성종]]의 고려정벌에 대해 조정에서 논의할 때 [[반미(북송)|반미]]는 송태종이 북벌하던 시절에 고려가 지원군을 보내기로 해놓고 약속을 어겼으므로 이참에 요나라와 합세해 고려로 쳐들어가 복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구준은 고려지원군이 왔어도 송태종의 북벌은 성공가능성이 없었다고 말하며 차라리 이번에 고려와 국교를 회복하는 것이 어차피 영원하지 못할 [[전연의 맹]]을 대비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진종은 구준의 의견을 채택했다. 재상의 자리에 올랐으나 [[왕흠약]]과 정위의 모함으로 지방한직으로 좌천된다. 나중에 치매에 걸린 진종은 어전회의에서 구준을 찾기도 했다. [[분류:송나라/인물]][[분류:961년 출생]][[분류:1023년 사망]][[분류:역대제왕묘 배향자]][[분류:웨이난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