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제국의 신문)] ---- ||<-4> {{{#fff {{{+1 '''국민신보'''}}}}}}[br]{{{#fff {{{-1 國民新報}}}}}} || ||<-2> '''국가''' ||<-2> [include(틀:국기, 국명=대한제국)] || ||<-2> '''소재지''' ||<-2> [[한성부]] 중서 미동 제30통 4호 || ||<-2> '''창간''' ||<-2> [[1906년]] [[1월 6일]] || ||<-2> '''종간''' ||<-2> [[1910년]] [[10월 11일]] || ||<-2> '''설립''' ||<-2> [[일진회]] || ||<-2> '''사장''' ||<-2> [[이용구]][br][[송병준]][br]한석진[br]최영년 || ||<-2> '''종류''' ||<-2> 일간신문, 기관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국민신보.jpg|width=100%]]}}} || || {{{#fff '''《국민신보》'''}}} || [목차] [clearfix] == 개요 == [[1906년]](광무 10년) 1월 6일에 창간한 신문. 친일단체 [[일진회|일진회(一進會)]]의 기관지였다. == 상세 == [[이용구]], [[송병준]] 등이 [[일진회]] 기관지로 만든 신문이다. 1대 사장은 이용구가 맡았고, 자본은 일진회 간부 김세기가 담당했다. 이용구의 후임으로 송병준이 사장으로 취임했다가 1907년(광무 11년) 5월에 농상공부대신이 되면서 한석진이 후임 사장을 맡았다. 마지막 사장은 최영년으로, 4대 사장이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만든 주체들이 주체인만큼]] 일제 침략에 대해 굉장히 호의적이고 [[한국통감부|통감부]]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래서 일반 민중들에게 외면받았다. 당연히 구독자가 거의 없어 재정난을 겪었고, 이에 정간하는 경우가 많았다. 첫 정간은 창간 불과 5일 만에(...) 1주일 간 한 것이었고, 두 번째 정간은 1906년(광무 10년) 6월 초반에 했다. 나중에 다시 속간했음에도 독자들이 많지 않아 명맥만 겨우 유지했다. 속간 후에도 친일 논조는 계속되었고, 그래서 《[[황성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같은 민족지와의 대립이 매우 심했다. 특히 《[[대한매일신보]]》의 사장 [[어니스트 베델]]과 [[양기탁]]이 [[국채보상운동]]으로 모은 금액을 횡령했다는 등의 [[가짜 뉴스]]를 퍼뜨리기도 했다. 이렇듯 백성들과 민족지의 어그로를 끌던 《국민신보》의 사옥과 시설들은 고종 퇴위 무렵에 동우회 및 항일 시위대의 습격을 받아 [[인과응보|전부 파괴당했고 직원들은 구타당했다.]] 그럼에도 《국민신보》는 [[반어법|참 꿋꿋하게]](...) [[친일]] [[매국]] 행위를 꾸준히 했다. 1909년([[융희]] 3년) 10월에 [[안중근]] 의사의 의거로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하자 자사 기자를 [[도쿄]]에서 열리는 장례식에 참석시키는 한편, 그해 12월에는 [[경술국치|한일합방]]을 재촉하는 상주문을 [[순종(대한제국)|순종황제]], [[이완용]] [[대한제국 총리|내각총리대신]], [[소네 아라스케]] [[한국통감부#s-2|통감]]에게 제출한 뒤 백성들에게 공포하는 성명서를 신문에 실었다. 당연히 이에 대해 민중들이 비판했는데 당시 사장이었던 최영년은 [[개소리|"국가와 백성을 위한 것인데 사람들이 오해하여 반대하는 것이 슬프다"]](...)는 망언을 했다. 그래서 어느 학교 선생님에게 불로 공격을 받기도 했다. 1910년([[융희]] 4년) 8월 29일에 이들이 원하던 대로(...) [[경술국치|일본이 한국을 병탄했다.]] 그 후 일제가 조선 내 모든 사회단체들을 해산시켰는데, [[토사구팽|일진회도 그 중 하나였다.]] 《국민신보》는 [[시천교]]의 기관지로 잠시 남아있다가 그해 10월 11일에 폐간되었다. [[분류:1906년 설립]][[분류:1910년 해체]][[분류:대한제국의 신문]][[분류:일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