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고려 추존 및 비정통 국왕)]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color: #670000" '''고려 추존 대왕[br]{{{+1 국조 | 國祖}}}'''}}} || || '''본관''' ||[[개성 왕씨]] || || '''배우자''' ||[[정화왕후]] || || '''자녀''' ||3남 || || '''묘호''' ||'''[[국조]](國祖)''' 또는 '''[[시조]](始祖)''' || || '''시호''' ||'''원덕대왕(元德大王)'''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려 왕조의 [[추존]] 왕. 일반적으로 알려진 [[묘호]]는 '국조(國祖)', [[시호]]는 '원덕대왕(元德大王)'. [[왕건|태조 신성대왕]]이 등극한 뒤 추존한 세 임금 중 한 명이다. 자녀로 장남 왕박일(王朴一), 차남 왕박이(王朴二), 3남 [[의조(고려)|왕박삼]]을 낳았다. == 모호한 기록 == 현존 기록을 보다 보면 모든 게 꼬여 있고 확실한 게 없다. 보통 한 왕조의 건국자는 자신으로부터 4대조를 군주로 추존하는데[* 조선왕조의 [[이안사|목조]], [[이행리|익조]], [[이춘|도조]], [[이자춘|환조]], 대한제국의 [[사도세자|장조]], [[정조(조선)|정조]], [[순조]], [[효명세자|문조]]가 대표적이다.] 고려는 이상하게 세 명만 추존했다. 그 이유를 추정해보자면 '''제대로 된 기록이 없어서 왕건 자신조차도 고조부의 이름조차 모르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왕건의 가문은 결과적으로 왕건이 고려의 왕으로 올랐으니까 주목받은 것이지, 그 조상은 신라 중앙([[서라벌]])에서도 한참 거리가 있는 북방 변경 지방의 세력가였으므로, 비슷한 수준의 다른 호족 가문들에 비해서 더 자세한 기록이 많이 있었던 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송악 근처 다른 패서지역 호족들, 평주 호족 [[박지윤(고려)|박지윤]], 정주 호족 [[유천궁]], 황주 호족 [[황보제공]] 등의 가문 내력 기록은 3대 조상의 이름이나 칭호, 출신지 딱 이 정도가 대부분이다. 왕건 가문의 조상들도 조상대에는 비슷한 급의 일개 호족 가문이었으므로 원래 남아있던 기록의 양도 비슷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당장 태조 왕건의 3대조 중 그나마 기록이 확실한 건 세조 왕륭뿐이고, 작제건은 [[거타지]] 설화 [[복붙]]이나 [[숙종(당)|당숙종]]과 혈연을 연결시키는 등 윤색하다가 생긴 빈틈이 많이 보인다. 그러다보니 [[조선 왕조]]는 태조 왕건 이전의 족보를 기록한 《[[고려사]]》의 '<고려세계(高麗世系)>'에 '기록이 없어서 모름!' 이라고 깔끔하게 시작한다. 대신 고려시대에 전해지던 여러 기록들을 싸그리 모아 적고 그에 대한 종합 평론을 썼다. 《고려사》는 '《태조실록》', '《편년통록》', '《편년강목》', '[[이제현]]의 <논평>', 이제현이 인용한 '《왕대종족기》와 《성원록》의 단편적 기록'을 모아 놓았다. === 태조실록 === || '''{{{#670000 묘호}}}''' ||'''[[시조]](始祖)''' || || '''{{{#670000 시호}}}''' ||원덕대왕(元德大王) || || '''{{{#670000 이름}}}''' ||? || || '''{{{#670000 아내}}}''' ||[[정화왕후]](貞和王后) || ||<-2> '''{{{#670000 태조와의 관계: 증조부}}}''' || 《고려사》가 인용한 이 《태조실록》은 고려가 직접 편찬한 《[[고려왕조실록]]》 중 태조의 실록을 의미한다. 즉 그나마 정설에 가장 가까운 기록이라고 볼 수 있는데 문제는 국조에 대해 딱 한 줄만 썼다. >'''(태조) 즉위 2년, 왕의 3대조고(三代祖考)를 [[추존]]하니 책(冊)을 올려 시조(始祖)의 시호를 원덕대왕(元德大王)으로, 비(妣)는 정화왕후(貞和王后)라 하였다.''' >---- >《고려사》 <고려세계>가 인용한 《고려 태조 실록》. 《태조실록》엔 '국조'의 [[묘호]]를 '시조(始祖)', 시호를 '원덕대왕(元德大王)', 아내를 '정화왕후(貞和王后)'라고 했다. 태조와의 관계는 나와있지 않다. 3대조고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증조부일 가능성이 높지만. === 편년통록/편년강목 === [include(틀:고려 건국설화 등장인물)] || '''{{{#670000 묘호}}}''' ||'''[[국조]](國祖)''' || || '''{{{#670000 시호}}}''' ||원덕대왕(元德大王) || || '''{{{#670000 이름}}}''' ||손호술(損乎述) → 보육(寶育) || || '''{{{#670000 아내}}}''' ||덕주(德周) || ||<-2> '''{{{#670000 태조와의 관계: 증외고조부}}}''' || 《고려사》가 인용한 '《편년통록(編年通錄)》'이란 [[의종(고려)|의종]] 때 김관의란 신하가 쓴 설화 형식의 책이다. 《편년통록》은 진실과 전설, 고려의 의도적 포장까지 모조리 다 담고 있어 매우 논란이 많다. 어쨌든 《고려사》는 이걸 인용해 보다 상세한 족보를 서술했다. 족보는 문단 상단의 틀 참조. * 우선 [[백두산]]에서 [[개성시|부소산]]으로 내려온[* 부소산의 부소(扶蘇)는 고구려 때 송악의 이름이다.] '[[호경(신라)|호경]](虎景)'이란 남자가 있다. 호경이 이름이 남지 않은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들 '강충(康忠)'을 낳았다. * 강충은 당시 송악의 부잣집 딸 '구치의(具置義)'와 결혼해 맏아들 '이제건(伊帝建)'과 막내아들 ''''손호술(損乎述)''''을 낳았다. '''손호술'''은 나중에 ''''보육(寶育)''''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 '''보육(寶育)'''은 형 이제건의 딸 '덕주(德周)'와 결혼해 두 딸을 낳으니 맏딸의 이름은 남지 않았고, 막내딸의 이름은 '진의(辰義)'였다. 여기까지가 《편년통록》의 기록이다. 이후의 이야기는 《고려사》가 인용한 《편년강목(編年綱目)》에서 그대로 이어지는데 이는 [[충렬왕]] 때 민지(閔漬)라는 신하가 쓴 책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민지는 [[1317년]]([[충숙왕]] 4년)에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을 저술했는데 총 42권이었으며, ''''국조 문덕대왕(國祖 文德大王)''''부터 [[고종(고려)|고종 안효대왕]]까지의 역사를 기록했다고 한다. 《고려사》는 《편년통록》의 이야기를 《편년강목》에서 이어가는데 《편년통록》과 《편년강목》은 같은 설화를 기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 '[[당숙종]]' 혹은 '[[당선종]]'이 진의와 사랑에 빠져 아들 '[[작제건]](作帝建)'을 낳았다. 이후 보육은 '국조 원덕대왕(國祖 元德大王)', 진의는 '[[정화왕후]]'로 추존되었다. 《편년강목》의 기록상 [[정화왕후]]는 국조의 딸로 표현된다. 그리고 국조는 태조 왕건의 외고조부다. 게다가 《편년강목》은 당숙종이 태조의 직계 증조할아버지란 설을 집어 넣어 고려가 '''당나라 천자의 직계 혈통'''이라는 정통성 아닌 정통성을 만들어 냈다... ---- 우선 위에 적힌대로 국조의 할아버지는 '호경', 아버지는 '강충', 어머니는 '구치의'다. 형으로 이제건이 있었다. 이름은 원래 손호술, 나중에 ''''보육(寶育)''''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매우 똑똑했다고 하며 [[지리산]](智異山)에 도를 닦으러 갔다가 곧 할아버지 호경이 신으로 있는 평나산(平那山)의 북쪽에 잠시 머물렀다. 그후 다시 가족이 있는 마아갑(摩訶岬)으로 돌아왔다. 어느날 잠 좀 때리다가 꿈을 꿨는데 곡령(鵠嶺)(지금의 송악산) 남쪽에다가 오줌을 싸니 천하가 은빛바다로 잠겼다.[* 신라 태종 [[무열왕]]의 비인 [[문명왕후]] 김문희 전설과 비슷하다. [[현종(고려)]]도 이 전설을 가졌는데 당시 고려에서 즐겨 활용된 설화인 듯하다.] 깨어나 형 이제건에게 썰을 푸니 형은 >"넌 분명히 하늘을 지탱할 기둥(支天之柱)을 낳을 것이다." >---- >《고려사》의 《편년통록》 중. 라고 말하며 자신의 딸 덕주(德周)와 결혼시켰다. 조카인 덕주와 결혼한 보육은 환속한 승려, 즉 거사(居士)가 되어 움막을 짓고 살았다. 어느날 한 신라 술사(新羅術士)가 와서 말하길: >"이 곳은, 대당천자(大唐天子)가 사위가 될 곳이다." >---- >《고려사》의 《편년통록》 중. 라고 한 뒤 떠났다고 한다. 그 뒤 보육은 딸 둘을 낳았는데 첫째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고 둘째의 이름은 진의(辰義)였다. 진의는 매우 아름다웠으며 똑똑했다고 한다. 첫째딸도 제 아버지처럼 꿈을 꾸니 이번엔 오관산(五冠山)에 올라가 오줌을 누어 천하가 뒤덮혔다. 역시 일어나 동생 진의에게 썰을 푸니 진의는 언니의 꿈을 치마를 주고 사겠다고 했다. 그러자 언니는 꿈을 던지는 시늉을 세 번하며 진의에게 팔았고, 진의는 그걸 받는 시늉을 하니 무언가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고 한다. 어느 날, 당나라의 숙종이 난을 피해 신라의 송악까지 와 잠시 머물렀다. 보육은 당숙종을 모시게 됐는데 당숙종이 딸을 보고 반했다고 한다. 당숙종이 옷을 기워달라고 부탁하자 보육은 첫째를 시켰으나 첫째는 가다가 넘어져 코피를 흘렸고, 둘째 진의가 대신 가 당숙종과 있게 되었다. 1년이 지나 당숙종은 다시 당나라로 돌아갔고, 진의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작제건, 즉 고려 의조 경강대왕이다. 《고려사》가 인용한 《편년강목》엔 국조의 이야기가 이게 끝이다. 《편년강목》엔 국조의 외손자인 '작제건'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자세한 건 [[작제건]] 문서 참조. 《편년통록》, 《편년강목》의 보육에 대한 기록은 여기까지이다. 보면 알겠지만 신라의 전설, 전통신앙, 중화사상에 불교까지 다 섞어 놓았다는 걸 알 수 있다. 《편년통록》의 기록은 신라 [[문명왕후|문희]], [[보희]]의 전설([[김유신]]의 여동생)을 두 번이나 베껴오고[* 다만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8670|보육 쪽은 대체적으로 후대에 가필된 것으로 본다.]]] 평나산 여신, 신라의 술사(術士) 등 전통신앙과 거사(居士) 같은 [[불교]] 이야기까지 융합되어 있다. === [[고려사]] 지리지 === [include(틀:고려 건국설화 등장인물)] || '''{{{#670000 묘호}}}''' ||'''[[국조]](國祖)''' || ||'''{{{#670000 칭호}}}'''||'''성골장군(聖骨將軍)''' || >우봉군(牛峯郡)은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우잠군(牛岑郡)【우령(牛嶺)이라고도 하고, 수지의(首知衣)라고도 한다.】으로,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9년(1018)에 평주(平州)의 속현(屬縣)이 되었고, 문종(文宗) 16년(1062)에 내속(來屬)하였다. 예종(睿宗) 원년(1106)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구룡산(九龍山)【'''국조(國祖) 성골장군(聖骨將軍)'''의 사당(祠堂)이 있는데 그래서 성거산(聖居山)이라고도 한다.】 >牛峯郡本高句麗牛岑郡【一云牛嶺, 一云首知衣.】. 新羅景德王, 改今名, 顯宗九年, 爲平州屬縣, 文宗十六年, 來屬. 睿宗元年, 置監務. 有九龍山【國祖聖骨將軍祠在焉, 故又號聖居山.】 >고려사 권56 지 권제10 지리1(地理) 왕경 개성부 우봉군 中 고려사 지리지 개성부 우봉군 조에서는 성골장군 [[호경(신라)]]을 국조로 기록되어 있다. 호경 설화에 대한 내용은 항목 참조. === [[이제현]] 논평 === || '''{{{#670000 묘호}}}''' ||'''국조(國祖)''' || || '''{{{#670000 시호}}}''' ||원덕대왕(元德大王) || || '''{{{#670000 이름}}}''' ||?[* 이제건(伊帝建)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 || '''{{{#670000 아내}}}''' ||[[정화왕후]](貞和王后) || ||<-2> '''{{{#670000 태조와의 관계: 증조부}}}''' || 《고려사》가 인용한 이제현의 <논평>은 여러 방면에서 위의 《편년통록》, 《편년강목》을 비판했다. * 《편년통록》을 쓴 김관의의 말대로라면 국조는 태조의 직계가 아닌 외가 조상인데 왜 국조, 즉 나라의 조상이라고 불러주냐? * 김관의의 말대로라면 왜 우리 태조가 통상하는대로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순으로 추존안하고 굳이 외고조부를 가져다가 [[태묘]]에 넣냐? 라고 우선 비판을 던졌는데 전부 맞는 말이다... 그래서 이제현은 이하 《왕대종족기》, 《성원록》을 인용해 '''고려가 추존한 '국조 원덕대왕'과 설화 속 '보육'이 서로 다른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제현이 정리한 국조의 가계도는 이렇다. * '보육성인(寶育聖人)'이란 사람이 이름 모를 딸을 낳았다. * '[[당숙종]]' 혹은 '[[당선종]]'이 이 딸과 사랑에 빠져 아들을 낳았다. * 이 아들이 바로 ''''국조 원덕대왕''''이며 그의 아내는 '정화왕후'이다. * 그래서 '[[의조(고려)|의조 경강대왕]]' 작제건은 국조의 아들이다. 그러니 국조는 '태조'의 증조부다.[* 국조 이제건(?)-의조 작제건-세조 용건-태조 왕건] 사실 이제현의 주장대로 하면 얼추 맞는다. 여전히 당나라의 숙종이 태조의 직계 조상이란 건 유지되지만. 이제현의 논평이 인용한 '《왕대종족기(王代宗族記)》'는 '《왕씨종족기(王氏宗族記)》', '《종족기(宗族記)》'라고도 불리며 이젠 대체 뭔지 알 수 없는 기록이다. 이제현은 단편적으로 인용했다. >'''국조(國祖)는 태조(太祖)의 증조(曾祖)다. 정화(貞和)는 국조(國祖)의 비(妃)다.''' >---- >이제현이 인용한 고려 《왕대종족기》. 이제현은 《왕대종족기》엔 국조의 성씨가 왕(王) 씨로 기록되있다고 하였다. 이제현은 더불어 '《성원록(聖源錄)》'이란 기록도 인용해 자신의 주장을 밑받침했다. 《성원록》은 두 줄이 남아있다. >'''보육성인(寶育聖人)이란 자는 원덕대왕(元德大王)의 외조(外祖)다.''' >---- >이제현이 인용한 고려 《성원록》. 이제현의 주장은 사실상 《성원록》과 《왕대종족기》에 기초하고 있다. == 조선왕조의 결론 == 조선왕조는 고려의 '''정사(正史)'''라고 할 수 있는 《태조실록》을 수중에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태조실록》의 단편적 기록을 정설로 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단편적이니 자세한건 다른 사서를 찾아볼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편년 시리즈, 이제현의 <논평>이다. 세 기록에 대한 평가는: * 김관의는 의종에게 《편년통록》에 대해 답할 때 고려 사람들이 각자 자기집에 모아둔 문서를 합친 것이 《편년통록》이라고 했다. * 이제현이 당대 유명한 학자이니 뭐 나름 생각이 있겠지만 당숙종이니 당선종이니 하며 당나라 황제가 고려까지 갔다는 소릴 믿냐?[* 다만 [[당숙종]]의 아우 중 하나인 영왕 이교가 [[안동도호부]]의 도호를 역임하기는 했다. 문제는 이게 727년의 일이라 시간 차이가 더 벌어져서 그렇지... 하여튼 이 영왕 이교라는 사람은 718년부터 783년까지 살았던 사람이라 임명 이후 죽을 때까지 실제 안동도호부에 상주했다면 당나라 이씨 황족 중 그나마 왕건의 직계 조상일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 우리가 가진 《태조실록》은 앞선 설화에 대해 아무런 기록이 없음. * 결론.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이지만 일단 다 모아서 기록함. == 기타 == * 《[[고려사]]》의 <지리지>에서는 성골장군([[호경(신라)|호경]])이 국조라고 했다. * 고려 말인 1335년 만들어진 왕온처김씨묘지명(王昷妻金氏墓誌銘)에서는 [[태조(고려)]]가 국조 신성왕(國祖 神聖王)으로 등장한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국조,version=86)] [[분류:고려의 추존 왕]] [include(틀:포크됨2, title=국조(고려), d=2023-02-06 19: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