龔心湛(공심담) [[1871년]] ~ [[1943년]] [[12월]] [목차] == 개요 == [[중화민국]]의 정치인. 초명은 공심영(龔心瀛), 호는 선주(仙舟). 중화민국 대리 국무총리, 재정총장 등을 역임했다. == 생애 == 1871년 [[청나라]] [[안휘성]] [[허페이시|합비현]](合肥縣)에서 태어났다. 금릉동문관을 졸업하고 상해제조국 서기로 근무하다가 영국으로 유학했다. 이후 주일 청국 공사관, 주미 청국 공사관, 주불 청국공사관, 주러 청국 공사관 등 주요 국가의 청나라 공사관의 수행원으로 파견되었다. 귀국 후 광동지부 안찰사 서리에 임명되었으며 염흥병비도(廉欽兵備道)를 겸하였다. 이후 운남 임안개광도(臨安開廣道), 운남 제법사(提法使) 등을 역임했다. 중화민국 건국 후 무창제조창 창장, 한구 중국은행장, 진무국(賑撫局) 독판, 안휘 국세주비처 처장, 안휘 재정국장 등을 역임했다. 1914년 5월, 안휘 재정청장에 임명되었으며 1915년 1월 광동 재정청장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원금국(援金局) 총판을 지냈다. 6월에 재정차장 겸 염무서(鹽務署)을 맡았다. 12월 경계국(經界局) 독판에 임명되었고 1916년 4월 참정원 참정에 임명되었다. 1918년 11월, 안휘성장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1919년 1월, [[첸넝쉰]] 내각에서 재정총장 겸 폐제국(幣制局) 독판 겸 조폐국(造幣廠) 총재에 임명되었다. [[5.4운동]]으로 첸넝쉰 내각이 붕괴되자 국무총리 대리를 맡았다. 하지만 재정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3개월 만인 9월 24일에 국무총리 대리에서 사퇴하여 육군총장 [[진윈펑]]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1924년 11월, [[돤치루이]] 임시집정 정부가 수립되자 내무총장 겸 양자강 수도토론위원회 회장 겸 진무독판(賑務)에 임명되었다. 1925년 11월 교통총장에 임명되었으나 1926년 4월, 대고구 사건으로 돤치루이 정부가 붕괴되면서 사직했다. 이후 톈진의 영국 조계지에서 사업에 종사하다가 1927년 6월, 요화파리공사(耀華玻璃公司) 총동(總董)을 맡았다. 12월 경도사의(京都事宜) 독판을 맡았으나 [[국민혁명]]으로 [[북양정부]]가 붕괴되면서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고 톈진으로 돌아갔다. 이후 중국실업은행 이사장, 대륙은행, 중부은행(中孚) 이사, 계신양회공사(啟新洋灰公司) 총리 등 실업계의 거물로 재직했다. 이렇게 곱게 일생을 마무리했으면 좋았겠지만 [[중일전쟁]] 발발 후 [[왕징웨이 정권]]에 투항하여 1942년 3월 화북정무위원회 자의회의(諮議會議) 위원에 초빙되었다. 1943년 12월, 7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 주요경력 == ||||||||||||||||<:><#00001b> '''[[중화민국 역대 국무총리|{{{#white 중화민국 역대 국무총리}}}]]''' ||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장.svg|width=200]]|| ||<:> 14대 ||<:> {{{+1 → }}} ||<:> 대행 ||<:> {{{+1 → }}} ||<:> 대행 || ||<:> [[첸넝쉰]] || {{{+1 → }}} ||<:><#dcdcdc> 궁신잠 [BR] ([[1919년]] [[6월 13일]] ~ [[1919년]] [[9월 24일]]) || {{{+1 → }}} ||<:> [[진윈펑]] || == 참고문헌 == * 곽정이, 『中華民國史事日誌』 1권(대북: 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 1979). * 서우춘, 『民國人物大辭典』(석가장: 하북인민출판사, 1991). * 신승하, 『중화민국과 공산혁명』(서울: 대명출판사, 2004). [[분류:중화민국 국무총리]][[분류:중화민국 재정총장]][[분류:중화민국의 외교관]][[분류:한간]][[분류:허페이시 출신 인물]][[분류:1871년 출생]][[분류:1943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