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613년 출생]][[분류:1699년 사망]][[분류:안동시 출신 인물]][[분류:안동 권씨 추밀공파]][[분류:조선의 문관]][[분류:영의정]][[분류:좌의정]][[분류:우의정]][[분류:호조판서]][[분류:예조판서]][[분류:병조판서]][[분류:형조판서]][[분류:남인]] [include(틀:역대 조선 영의정(인조-경종))] ---- || '''{{{#f0ad73 권대운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조선 정승(인조-경종))] ---- [include(틀:남인)]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60420, #b82642 20%, #b82642 80%, #960420)" '''[[영의정|{{{#fff 조선 영의정}}}]][br]{{{+1 권대운}}}[br]權大運'''}}} || ||<|2> '''출생''' ||[[1613년]] [[2월 10일]][br](음력 [[1612년]], [[광해군]] 4년 12월 21일)|| ||[[경상도]] [[안동시/역사#조선시대|안동대도호부]][br](현 [[경상북도]] [[안동시]])|| ||<|2> '''사망''' ||[[1699년]] [[12월 12일]] (향년 86세)[br](음력 [[숙종(조선)|숙종]] 25년 10월 22일)[* [[세는나이]] 88세.]|| ||[[경기도]] [[시흥군|금천현]]|| || '''[[본관|{{{#fff 본관}}}]]''' ||[[안동 권씨]] (추밀공파)|| || '''[[자(이름)|{{{#fff 자}}}]]''' ||시회(時會)|| || '''[[아호|{{{#fff 호}}}]]''' ||석담(石潭)|| || '''부모''' ||부친 - 권근중(權謹中)[br]모친 - [[전주 이씨]] 이숙희(李淑姬, {{{-3 1588 ~ ?}}})[* 이유혼(李幼渾)의 장녀로 족보상 [[담양군(1439)|담양군]]의 6대손이나, 담양군은 자식이 없어 형 [[계양군]]의 차남을 양자로 들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계양군의 6대손이다.[[http://royal.aks.ac.kr/Ge/JokboPageData?bookId=JSK_WJ_K21047&pid=44364|#]]]|| || '''부인''' ||[[단양 우씨]] - 우정(禹鼎)의 딸|| || '''자녀''' ||장남 - 권위(權瑋)[br]차남 - 권규(權珪, {{{-3 1648 ~ 1722}}})[br]장녀 - 신양(申暘)의 처[br]차녀 - 허담(許湛)의 처[br]3녀 - [[전주 이씨]] 이운징(李雲徵)의 처||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남인]] 출신으로 [[예송논쟁#s-3|제2차 예송논쟁]] 후 [[송시열]]을 처형할 것을 주장한 [[허목]], [[윤휴]]에 반대하여 [[허적]]과 함께 [[탁남]]의 지도자가 되었다. == 생애 == [[예조판서]]를 지낸 권협의 손자로, 1612년 경상도 안동대도호부(현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아버지 권근중(權謹中, 1586 ~ 1650. 2. 7.)[* 음양력 불분명]과, 이유혼(李幼渾)의 딸인 어머니 [[전주 이씨]] 이숙희(李淑姬) 사이의 4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642년([[인조]] 20) 식년 [[생원|생원시]]에 2등 10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b_1642_010936|입격한 뒤]] 1649년(인조 27) 별시(別試) [[과거 제도#문과|문과]]에 을과 3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b_1649_006070|급제했다.]] 같은 해 [[효종(조선)|효종]] 즉위 후 [[사간원]] 정언이 되고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청요직#s-4]]과 [[이조(조선)|이조]] 정랑을 지냈다. [[현종(조선)|현종]] 즉위 후에는 [[형조]], [[병조]], [[예조]]의 참의를 지낸 뒤 [[한성부]] 우윤, [[개성시/역사#조선시대|개성]] 유수를 거쳐 1667년([[현종(조선)|현종]] 8) 대사간, [[함경도#조선]] [[관찰사]]가 되었다. 1670년(현종 11) [[호조판서]], 1673년(현종 14) [[형조판서]]를 거쳐 1674년(현종 15) [[우참찬]] 겸 [[의금부|판의금부사]]가 되었다. [[예송논쟁#2차 예송논쟁(갑인예송)|제2차 예송논쟁]] 후 1674년([[숙종(조선)|숙종]] 즉위) [[예조판서]]를 거쳐 1675년(숙종 1) [[병조판서]]가 되었고 같은 해 [[우의정]]으로 승진했다 얼마 안 되어 [[좌의정]]이 되었다. 1679년(숙종 5) [[중추부|판중추부사]]로 물러났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파직되고 좌천되었다가 결국 [[포항시/역사#조선|영일]](지금의 [[포항]])에 [[유형#종류|위리안치]]되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집권하자 복귀하여 [[영의정]]이 되었다. 이후 궤장을 하사받았으나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다시 파직되고 섬에 안치되었다가 형벌 완화로 경기도 일대에 마련한 셋집으로 들어갔다. 1699년(숙종 25) 죽고 복권되었다. [각주][include(틀:표절, version=1~11, source=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