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1 권대직}}}[br]權大稷'''}}} || || '''자 / 호''' ||순백(舜伯) / 만포(晩圃) || || '''본관''' ||[[안동 권씨]][* 부정공파(副正公派) 기(玘)계 32세 대(大) 항렬.] || ||<|2> '''출생''' ||[[1853년]] || ||[[경상도]] [[의성군|의성현]] 점곡면 서변동[br](현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서변리)[* [[안동 권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권휘연]]도 이 마을 출신이다.] || || '''사망''' ||[[1930년]] [[4월 3일]][* 음력 3월 5일.] || || '''묘소'''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명고리 || || '''상훈''' ||건국포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853년 경상도 의성현 점곡면 서변동(현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서변리)에서 아버지 권철(權澈, 1818 ~ 1869. 10. 23)과 어머니 [[전(성씨)|용궁 전씨]](龍宮 全氏, ? ~ ?. 8. 18)[* 전상록(全相祿)의 딸이다.]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896년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691|김상종]](金象鍾)과 함께 의성군을 중심으로 의병진을 조직하고 중군장(中軍將)에 선임되었다. 그 밖에 소모장에 김수욱(金壽旭), 선봉장에 김수담(金壽聃), 관향장에 김수협(金壽莢) 등이 선임되었다. 그는 중군장으로서 직접 전투를 지휘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의성 의병진은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4626|김도화]](金道和)를 중심으로 결성된 안동 의병진을 비롯한 경상북도의 여타 다른 지역에 비해 다소 늦은 시기에 창의했는데, 안동 의병진에서는 이를 의성군수 김낙기(金洛耆)의 농간으로 보고 그해 3월 13일 의성군수를 처단하고자 했다.[[http://uiseong.grandculture.net/uiseong/toc/GC05201006|#]] 이에 김상종 의병진에서는 우선적으로 권대직과 이돈유를 보내 의성군수의 구출을 시도하는 한편, 3월 25일 본격적으로 봉기하여 의성군 옥산면 금학동 황학산(黃鶴山)을 점거하여 일본군에 대한 항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해 3월 29일 [[대구광역시|대구군]]·[[군위군]] 소속 관군과 이에 합세한 일본군과의 접전 끝에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분패했고, 이때 선봉장 김수담과 관향장 김수협, 권휘연,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62226|서상부]](徐相孚) 등 27명의 의병이 전사, 순국했다. 그 뒤 을미의병이 종결되고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그는 김상종 등과 함께 영남 각지 유림들에게 통문을 보내는 등 재궐기를 도모하기도 했으나 이마저도 시원치 않아 결국 향리로 돌아와 은거했고, 1930년 4월 3일 별세했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안동 권씨 부정공파]][[분류:의성군 출신 인물]][[분류:1853년 출생]][[분류:1930년 사망]][[분류:건국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