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파일:정부상징.svg|width=30&height=30]] '''[[대한민국의 보물/601~800호|{{{#fff 대한민국의 보물}}}]]''' || || 668-3호 ||<|2> ← || '''668-4호''' ||<|2> → || 668-5호 || || 권응수 장군 유물-태평 회맹도 병풍 || '''권응수 장군 유물-장검''' || 권응수 장군 유물-유지 및 장군 간찰 || ||<-4><:>
[[파일:external/dbscthumb.phinf.naver.net/GC042P56689.jpg?type=m4500_4500_fst_nce&wm=Y.jpg|width=100%]]|| ||<-4><:>권응수 장군 유물 장검(權應銖 將軍 遺物 長劍) || ||<:><#E0E0E0> '''도공''' ||<:> 불명. ||<:><#E0E0E0> '''도파''' ||<:> 불명 || ||<:><#E0E0E0> '''제작 시기''' ||<:> [[전국시대(일본)|전국시대]] ||<:><#E0E0E0> '''종류''' ||<:> [[우치가타나]] || ||<:><#E0E0E0> '''길이''' ||<:>73 ㎝ ||<:><#E0E0E0> '''현존 여부''' ||<:> [[국립진주박물관]] || ||<:><#E0E0E0> '''명문''' ||<:> 大永元年 ||<:><#E0E0E0> '''문화재 등록''' ||<:> [[대한민국의 보물|보물]] 제 668-4호 || [목차] == 개요 == [[임진왜란]] 때 [[의병|의병장]]으로 활약한 [[권응수]](權應銖, 1546-1608) 장군이 노획해 사용한 [[일본도]] 장검. == 상세 == 키하치(喜八)라는 왜장으로부터 노획했다고 한다. 외국 유물, 그 중에서도 일본도로서 한국의 문화재로 지정된 것으로는 보기 드문 사례이다.[* 외국에서 만들어 한국의 문화재로 지정된 다른 유물으로 [[대한민국의 국보|국보]] 제193호 [[경주 98호 남분 유리병 및 잔|유리봉수병(琉璃鳳首甁)]], 보물 제393호 [[전등사]] 범종, 보물 제440호 [[통영]] [[충렬사(통영)|충렬사]] 팔사품 일괄, 보물 제624호 [[황남대총 북분 유리잔]], 보물 제635호 [[경주 계림로 보검]], 보물 제904호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 등이 있다.] 1973년 12월 26일에 권응수 장군의 다른 유품과 함께 발견되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312260032920701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3-12-26&officeId=00032&pageNo=7&printNo=8693&publishType=00020|당시 기사(7면) <壬亂때 作戰記錄 발견>]] 당시 기사에서 '일본도의 名門(명문)인 祐定(우정)의 銘門(명문)이 새겨진'이라는 글귀가 있다고 나왔다. 그러나 문화재청과 국립진주박물관에 올라온 여러 정보에서는 명문에 관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고, 손잡이에 대영원년(大永元年, 서기 [[1521년]])이라는 글귀가 새겨졌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다. [[1980년]] 8월 23일에 <권응수 장군 유물>이라는 목록 아래 장군의 다른 유물들과 함께 [[대한민국의 보물|보물]]에 지정되었다. 현재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분류:일본도]][[분류:대한민국의 보물]][[분류:국립진주박물관 소장품]][[분류:진주시의 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