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남조 군주)] ||<-2>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Dalisanta.jpg|width=300]] || || '''[[시호]]''' || 소성왕(昭成王) || || '''[[성씨|씨]]''' || 몽사(蒙舍) || || '''[[휘]]''' || 권풍우(勸豊祐) || || '''생몰년도''' || ???년 ~ 859년 || || '''재위기간''' || 823년 ~ 859년 || [목차] == 개요 == [[남조(왕국)|남조]]의 제11대 군주. 시호는 소성왕(昭成王). 심각권의 아들이자, 권리성의 동생. == 생애 == 823년, 형 권리성(勸利晟)이 죽자, 그 뒤를 이어서 동생 권풍우가 즉위했다. [[당목종]]이 경조소윤(京兆少尹) 위심규(韋審規)를 남조에 파견해 권풍우를 책봉했다. 829년, 서천절도사 두원영(杜元潁)의 가혹한 수탈로 민심이 이반하자 권풍우가 군사를 일으켜 촉을 공격했다. 두원영은 군사를 보내 남조군과 교전했으나 패배하고, 공주(邛州)가 함락되며 성도성까지 밀렸다. 당 조정에서는 크게 분노해 두원영을 소주(邵州)자사로 좌천시켰다. 뒤늦게 당군이 퇴각하는 남조군을 쫓았으나 강을 건너지 못했다. 전쟁에서 당의 공인과 기인 등 기술자를 많이 사로잡았는데, 이 영향으로 남조는 무늬있는 작물을 만들게 되었다. 이듬해에 남조는 표를 올려 사정을 진술하고 사죄를 청했다. 더불어 두원영의 과실도 함께 언급했다. 왕차전이 올린 표문은 아래와 같다. >“만(蠻)이 줄곧 조공의 직무를 이행하였는데 어째서 감히 변경을 침범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두원영이 군사들을 구휼하지 않았기에 [그들이] 원영을 원망하고 다투어 길잡이가 되었으며 저희들의 이번 원정을 통해 포악한 원영을 주벌하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주벌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촉지역 군사들의 마음을 위로할 길이 없으니 폐하께서는 바라옵건데 그를 벌주십시오.” >---- >[[자치통감]] 「당기」 60 이에 당 조정에서 이미 강등된 두원영을 순주사마(循州司馬)로 한번 더 강등시켰다. 이후에 남조는 836년까지 해마다 사신을 보내 입조하였다. 839년, 840년, 842년에도 당에 조공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Dalisanta.jpg|width=300]] 숭성사삼탑(崇聖寺三塔) 권풍우는 [[불교]]에 큰 힘을 쏟아 남조의 문화를 꽃 피우는데에 앞장섰던 숭불군주였다. 단적인 예가 바로 숭성사삼탑을 건립한 것이다. 숭성사삼탑은 현재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에 지정되어 있는데, [[윈난 성]]을 여행가는 사람은 이곳을 꼭 방문한다고 한다. 따라서 숭성사삼탑은 윈난 성 사람들의 대표적인 문화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남조인들에게도 숭성사삼탑은 불교활동의 중심지이자 관음 숭배를 받들던 곳이었다. 권풍우는 성격이 강인했으며, 통치력 또한 뛰어났다. 특히 권풍우는 [[중국]]을 사모해 적극적을 중국 문물을 수용했다. 또한, 오래전부터 관습적으로 내려왔던 부자연명의 [[전통]]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859년, 권풍우가 붕어하고, 아들 세륭(世隆)이 남조의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분류:남조의 군주]][[분류:859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