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기원전 1세기 집정관]][[분류:기원전 119년 출생]][[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1세기)] ||||<#800080> {{{#ffffff {{{+3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 }}}[br]{{{-1 [[라틴어]]: Gnaeus Octavi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기원전 119년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노빌레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국]] || ||<#800080> {{{#ffffff '''가족''' }}}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조부)[br]마르쿠스 옥타비우스(아버지)[br]마르쿠스 옥타비우스(아들)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76년 || ||<#800080> {{{#ffffff '''전임''' }}} ||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기원전 77년 집정관)|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br][[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 || ||<#800080> {{{#ffffff '''동기''' }}} ||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기원전 76년 집정관)|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 || ||<#800080> {{{#ffffff '''후임''' }}} || [[루키우스 옥타비우스]][br][[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기원전 3세기부터 로마 정계에서 활약한 [[노빌레스]] 가문인 옥타비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는 그나이우스, 아버지는 마르쿠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학자들은 그의 조부는 기원전 165년 집정관을 역임한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이고, 아버지는 기원전 133년 [[호민관]]을 역임하면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에 대적했던 마르쿠스 옥타비우스라고 추정한다. 기원전 87년 집정관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기원전 87년 집정관)|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와 기원전 75년 집정관 [[루키우스 옥타비우스]]는 그의 사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학자들은 고위 행정관의 취임 가능 연령 기준을 설정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법에 의거해 그가 기우너전 119년에 출생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기원전 79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76년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기원전 76년 집정관)|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두 사람은 호민관 그나이우스 시키니우스가 술라가 민회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실시한 정책을 폐지하려는 시도를 저지했다.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는 이 호민관이 귀족들에게 포위되었고, 무고한 호민관의 죽음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지만, 다른 역사서엔 그런 내용이 없어서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 것을 볼 때 그저 침묵했을 뿐이라고 추정된다. 그는 집정관을 맡으면서 통풍에 시달렸기 때문에 의자에 앉아있을 때도 붕대를 감고 습포제를 발라야 했다. 키케로에 따르면, 쿠리오가 평소처럼 좌우로 머리를 흔들며 긴 연설을 하고 있을 때, 호민관 시키니우스가 이렇게 농담했다고 한다. >"기억하시오, 옥타비우스. 당신은 동료에게 목숨을 빚지고 있다는 것을. 그가 여기서 앞뒤로 흔들지 않았다면 파리가 당신에게 다가와 물었을 거요!" 키케로는 그를 공화국의 수호자이자 훌륭한 연설가라고 호평했다. 그러나 집정관을 맡은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마르쿠스 옥타비우스]]는 기원전 50년에 조영관을 역임했고, [[카이사르의 내전]]에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편에 서서 카이사르에 맞서 항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