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1세기)] |||| {{{+3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br]{{{-1 [[라틴어]]: Gnaeus Calpurnius Piso }}} || || '''생몰년도''' ||미상 ~ 서기 20년 || || '''출생지''' ||[[로마 공화국]] 이탈리아 로마 || || '''사망지'''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 || '''지위''' ||[[노빌레스]] || || '''국가''' ||[[로마 공화국]] → [[로마 제국]] || || '''가족'''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조부)[br][[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기원전 23년 집정관)|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아버지)[br]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형제)[br]무나티아 플란키아(부인)[br][[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27년 집정관)|그나이우스(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아버지가 자살한 후 [[티베리우스]] 황제의 명령으로 이름을 루키우스로 변경.](장남)[br]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차남) || || '''직업''' ||[[로마 제국]] [[집정관]] ||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7년 || || '''전임''' ||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br][[가이우스 아시니우스 갈루스]] || || '''동기''' || [[티베리우스]] || || '''후임''' || 데키무스 라일리우스 발부스[br]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제국]]의 군인, 정치인. 제2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친구이자 지지자로, 티베리우스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여러 고위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시리아 총독으로서 [[게르마니쿠스]]와 심한 갈등을 벌이다 게르마니쿠스를 독살했다는 의혹에 휩싸였고, 부패 및 내란을 꾸민 등의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가 판결이 내려지기 전에 자살했다. == 생애 == === 가문 === 칼푸르니우스 씨족은 로마의 전설적인 두번째 왕 [[누마 폼필리우스]]의 아들 칼푸스를 시조로 둔 평민 귀족([[노빌레스]])이다. 이 가문에는 여러 분파가 속해 있었는데, 그중 가장 저명한 분파가 기원전 2세기 초부터 [[집정관]]을 역임하면서 엄청난 위세를 떨친 피소 가문이었다. 조부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는 기원전 65년 재무관을 역임했으나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의 쿠데타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처형되었다. 아버지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기원전 23년 집정관)|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는 [[옵티마테스]]파 인사로, [[카이사르의 내전]] 때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와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 휘하의 히스파니아군에서 재무관으로 근무했다. 두 장군이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패배한 뒤 아프리카 속주로 도망쳐서 [[메텔루스 스키피오]] 휘하에 들어가 누미디아 기병대를 지휘했다. 기원전 46년 [[탑수스 전투]] 패전 후 카이사르에게 귀순하여 용서받고 로마로 돌아갔다.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발발한 후 2차 [[삼두정치]]파와 '해방자'파 간의 전쟁([[해방자 내전]])이 발발했을 때, 그는 해방자파의 편에 들어가 [[필리피 전투]]에 참여했다. 이후 삼두정치가들의 용서를 받고 로마로 돌아갔고, 평범한 원로원 의원으로 지내다 기원전 23년 아우구스투스의 설득을 받아들여 집정관을 맡았다. 그해 6월 아우구스투스가 병세가 악화되어 죽을 지경에 몰리자 가장 신임하는 친구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에게 인장 반지를 넘겨주며 후계자로 지명했을 때, 그는 로마의 병력 및 재원 관련 기록물을 넘겨받으며 아그리파와 공동으로 로마를 이끌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을 수호하기 위해 오랫동안 싸웠던 피소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제스처를 통해 왕정이 세워지는 걸 두려워하는 [[원로원]]을 안심시키려 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가 병마를 이겨내고 회복하면서 이 조치는 무효가 되었다. 이렇듯 명문가에 아우구스투스의 인정을 받을 정도로 명망 높은 공화정 수호자였던 피소에게는 두 아들 그나이우스와 루키우스가 있었다. 큰아들 그나이우스가 바로 이 문서의 주인공이며, 차남 루키우스는 제사장을 맡았고 기원전 1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 티베리우스의 친구 === 그나이우스의 생년월일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기 20년 자살하기 직전에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45년간 당신에게 순종했습니다"라는 구절이 있는 걸 볼 때 기원전 25년 정계에 입문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42년생인 티베리우스와 비슷한 연배였을 것으로 보인다. [[세네카]]에 따르면, 그는 사악한 면은 없지만 경직성을 지조로 혼동하는 결점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처럼 공화정의 이념을 심정적으로 지지했으며, 조상들의 관습을 따르는 걸 중시했다. 이는 아우구스투스로부터 후계자로 공인되었지만 내심 과거 로마를 강대국으로 육성시킨 원로원을 동경하던 티베리우스의 호감을 샀고, 그는 일찍부터 티베리우스의 친구가 되었다. 기원전 7년 티베리우스와 함께 집정관을 맡아 아우구스투스를 기리는 경기를 조직했으며, 콩코르디아 신전을 재건했다. 그러나 콩코르디아 신전 재건은 로마 평민들의 반발을 샀다. 과거 원로원 보수파가 농지법을 주창한 [[그라쿠스 형제]]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추종자 수천 명을 학살해 테베레 강에 내던진 뒤, 이 일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전이 바로 콩코르디아 신전이었기 때문이다. 티베리우스는 평민들의 반발에 유감을 표하면서도, 원로원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조상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고, 원로원의 이익을 주의 깊게 지키며, 위험 앞에서는 용기있게 행동하고, 공공의 선을 위해서라면 불쾌감 주는 일도 마다하지 않겠소." 서기 9년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총독을 역임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그는 히스파니아 총독을 맡으면서 속주민들에게 잔인하게 행동했다고 한다. 서기 20년 재판에서 히스파니아 속주민을 핍박한 혐의가 제기되었지만, 그 일을 따지기엔 너무 오래되었고 다른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이유로 철회되었다. [[스트라본]]에 따르면, 그는 아프리카 총독을 역임하면서 스트라본에게 "리비아는 물이 없고 사막으로 둘러싸인 거주 지역으로 덮어 있어서 표범 가죽과 같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는 14년 임종하기 전에 티베리우스와 사적인 대화를 나눌 때 피소를 언급했다는 설이 있다. 황제는 그가 최고의 권력을 가질 자격이 있으며 기회가 오면 감히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했다고도 하는데, 피소의 자리에 [[루키우스 아룬티우스(6년 집정관)]]를 언급했다고도 한다. 그 후 티베리우스가 황위에 올랐고, 그는 황제의 친구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5년, 티베리우스가 불경죄로 기소된 그라니우스 마르켈루스의 사건에 대해 발언하려 했다. 그러자 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물었다. >"카이사르여, 언제 말을 하실 겁니까? 만약 첫번째로 하실 거라면, 저는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만약 맨 나중에 말씀하신다면, 저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티베리우스는 이 질문에 당황했고, 마르켈루스에 대한 고소를 취하했다. 16년, 그는 로마의 점성가들을 처벌하려는 황제의 의중에 반대했지만, 티베리우스가 호민관의 특권인 거부권을 발동하자 물러나야 했다. 같은 해 황제가 로마를 떠나 있을 때 원로원이 황제를 대신하여 정국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갈루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한편, 피소는 자꾸만 의원들에게 면박을 주는 티베리우스에게 의원들의 체면을 너무 깎아내린다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이렇듯 피소로부터 여러 비판을 받았지만, 티베리우스는 오히려 그의 이런 행동을 좋아했다. 의원들이 노예처럼 복종하기 보다 정당한 비판을 자유롭게 제기하길 바랬던 그는 피소의 이러한 언행이 의원들의 모범이 되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피소는 자신을 총애하는 황제의 치하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이어갔다. 그러던 17년, 그는 시리아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당시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에게 동방의 통수권을 부여하여 [[아르메니아 왕국]]의 지배권을 놓고 [[파르티아]]와 벌어진 갈등 등 동방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도록 했다. 하지만 혈기왕성한 게르마니쿠스 혼자에게만 맡기면 불안한 점이 많다고 여겼다. 그래서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피소를 시리아 총독으로 삼아 게르마니쿠스를 보조하게 했다. 그러나 피소는 황제가 단순히 게르마니쿠스를 보조하는 것만이 아니라 견제하기를 원한다고 여겼다. 그는 황제의 뜻대로 게르마니쿠스를 철저하게 견제하기로 마음먹었고, 이로 인해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 게르마니쿠스와의 갈등 ===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한 피소는 게르마니쿠스와 사사건건 충돌을 벌였다. 게르마니쿠스가 어떤 지시를 내릴 때마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며 이의를 제기했고, 게르마니쿠스의 동의도 받지 않고 속주 주둔군에 적용되던 엄격한 규율을 풀어주고 막대한 보너스를 하사해 그들로부터 "군단의 아버지"라는 칭송을 받았다. 게다가 피소의 아내 무나티아 플란키아는 게르마니쿠스의 아내 [[대 아그리피나]]에 대한 라이벌 의식을 공공연히 드러내며 군사 작전이 벌어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군대의 복지에 관심을 보였다. 급기야 아르메니아로 증원군을 보내라는 게르마니쿠스의 지시를 피소가 거부하면서 양자의 대립은 최고조로 치달았다. 게르마니쿠스는 피소의 항명에 화가 났지만 아르메니아 왕국을 둘러싼 파르티아와의 갈등을 해결하는 데 집중하고 싶었기에 묵인했다. 이후 게르마니쿠스는 군대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탁월한 외교 실력을 발휘해 파르티아 샤한샤 [[아르타바노스 2세]]와 성공적인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는 시리아로 돌아와 한 군단의 겨울 숙영지에서 피소와 만나 형식상으로 화해했다. 그러나 타키투스에 따르면, 두 사람은 적대감을 품고 헤어졌다고 한다. 얼마 후 [[나바테아 왕국]]의 군주가 게르마니쿠스 일행을 초대해 게르마니쿠스에게 무거운 금관을 증정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가벼운 금관을 주자, 피소는 불쾌감을 표시했다. >"게르마니쿠스가 대체 누구인가? 파르티아인이라도 되는가?" 그 후 게르마니쿠스가 티베리우스 황제의 허락을 받지 않고 이집트로 들어가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에게 정중하게 대해 환심을 사자,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에게 서신을 보내 꾸짖었지만 더 이상의 언급을 금지했다. 그러나 피소는 티베리우스의 경고를 무시하고 게르마니쿠스의 이집트 방문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심지어 게르마니쿠스가 자신의 부재시에 처리하라고 시킨 명령을 모조리 철회해버렸다. 안티오키아에 도착한 게르마니쿠스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극도로 분노하여 피소를 호되게 질책했다. 그러자 피소는 가족과 함께 안티오키아를 떠났다. 그런데 바로 그날 게르마니쿠스가 앓아 눕더니 얼마 안가 숨을 거두었다. 그는 아내 대 아그리피나를 비롯한 가족에게 피소 부부가 자신을 독살한 게 분명하다며 복수해달라고 부탁했다. === 몰락 === 피소는 안티오키아를 떠나 로마로 가던 중 코스 섬 인근에서 게르마니쿠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이 소식에 무척 기뻐하며 신들에게 감사드리기 위해 희생제를 드렸다고 한다. 이후 총독 관저로 돌아가서 남은 임기를 마저 수행하려 했지만, 원로원은 전직 집정관 출신의 원로원 의원 센티우스를 시리아 신임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러자 그는 무력을 써서라도 법으로 정해진 자신의 총독 임기를 지키기로 마음먹고, 킬리키아로 이동하여 센티우스와 맞섰다가 패배했다. 이후 은신처로 도망갔다가 체포된 뒤 로마로 가는 안전한 통행권을 보장받고, 서기 20년 아내와 함께 로마로 향했다. 촉망받는 황족이었던 게르마니쿠스가 요절한 일에 극도로 분노했고, 피소 부부가 게르마니쿠스를 독살한 게 분명하다고 여긴 로마 시민들은 피소의 처형을 요구했다. 원로원 역시 이를 그냥 넘길 수 없다고 생각해 그를 고발했는데, 원로원이 이런 행동을 하기 전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에서 동생의 장남으로 자기가 입양해 후원을 해준 정식 후계자인 게르마니쿠스를 잃은 상실감과 슬픔을 직접 밝힌다. 따라서 원로원의 고발은 곧 티베리우스의 고발과 같은 의미였다. 이런 상황에서 열린 재판은 피소에게 극도로 불리했다. 더 큰 문제는 최악의 민심에 더해, 게르마니쿠스의 유족들이 피소를 증오해 이를 갈았던 부분이었다. 리비아 드루실라, 소 안토니아, 대 아그리피나, 소 드루수스, 클라우디우스와 같은 아우구스투스 아내 및 직계혈육들은 피소가 고발되자, 원로원 귀족, 시리아로 파견된 장교 등을 연이어 증인으로 내세웠다. 다만, 리비아 드루실라는 자신의 지위가 공고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측근 세력을 보호하고자 이중적으로 영악하게 행동했다. 따라서 피소는 다음과 같은 죄목으로 최종 기소돼, 1급 재판으로 황제와 원로원이 주재한 재판을 받게 된다. * 상관에 대한 명령 불복종 * 관할지 이탈 및 임지 불법 이동 * 군대 규율 위반 * 원로원 규율 위반 * 내전 조장 및 모반 * 부정부패 및 권한 남용 * 약식 재판 판결 조치 결정에 대한 취소 및 허위 재판 결과 강요 * 신격 아우구스투스와 그 일가에 대한 모독 및 불경 * 황제 대리인 자격 남용 및 상관 협박 피소 재판은 단순 재판이 아닌, 반역 및 원로원 명예실추 범죄, 군법 위반이 두루 섞인 까닭에 기소부터 화제성이 대단했다. 따라서 피소가 고발돼 재판을 받게 됐을 때부터 세기의 재판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모든 로마인들의 관심을 모았다. 티베리우스는 재판에 매일 참석해 게르마니쿠스의 양아버지 자격으로 피소를 날카롭게 공격했다. 피소는 게르마니쿠스를 절대로 독살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되풀이했지만, 명령 불복종, 내란 선동 등 다른 혐의에 대해서는 유죄가 명확해 이렇다할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하지만 의원들은 자신들의 동료이며 황제의 대리인이었던 피소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길 주저했다. 일부 의원들은 티베리우스에게 두 사람 간에 오간 서신을 공개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황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판결이 좀처럼 내려지지 않자, 재판을 기다리던 시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피소의 조상을 거꾸러뜨려 카피톨리노 언덕까지 끌고 간 뒤 정상으로 이어지는 게모니아 계단의 층계참에 걸쳐놓고 포룸이 훤히 보이는 곳에서 박살냈다. 이에 티베리우스는 근위대를 보내 피소의 조상을 복구하게 했고, 피소를 가마에 태워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도록 했다. 피소는 이러한 주위의 비난과 압박감에 시달리다가 결국 판결이 내려지기 직전에 단검으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에서 피소가 자살하기 직전에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공개했다. 피소는 이 편지에서 결백을 호소하며 황제에게 오랜 세월 충성을 바친 걸 상기시키며 두 아들을 돌봐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에게 여러 차례 항명하고 그의 조치를 취소시키고, 내란을 선동한 일 등에 대해서는 유죄를 선고했지만, 게르마니쿠스를 독살한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원로원은 피소가 죽었어도 그 유죄는 집행되어야 했기에, 그에게 [[기록말살형]]를 내린다. 하여 피소에 대한 애도는 범죄 행위로 규정되었고 그의 초상은 불태워졌으며, 재산의 절반이 몰수됐다. 다만 함께 기소된 피소의 장남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27년 집정관)|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는 이름을 루키우스로 개명하는 조건으로 용서받았고, 피소의 다른 아들들은 형과 함께 원로원 의석과 명문가인 칼푸르니우스 피소 가를 유지할 재산을 빼앗기지 않고 균등상속받는 조치가 허락됐다. 출가한 딸 칼푸르니아 역시 결혼지참금을 빼앗기지 않았으며, 피소의 압류 재산들은 피소 아들들과 딸 부부가 4,000,000 세스테르티우스를 국고 환수금으로 추가납부한다는 조건으로 모두 처벌을 받지 않았다. 주술을 부리고 동방 마술사들에게 저주를 요청해 게르마니쿠스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혐의를 받던 피소의 아내 플란키나는 처음엔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와 매우 친했던 [[리비아 드루실라]]는 티베리우스에게 강하게 압력을 행사해, 리비아와 그 측근들에게 강력한 압력을 받은 티베리우스는 어쩔 수 없이 무죄로 정정했다. 그러나 리비아가 사망한 후인 33년, 그녀는 티베리우스에 의해 재차 기소되었고, 재 판결이 내려지기 전 자살했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그녀가 자기 혈육을 독살해 세야누스가 벌인 가문의 비극을 불렀다며, 서한을 통해 아주 잘 죽었다고 찬사를 늘어 놓고, 이에 대한 각 의원들의 입장을 적어 바치게 했다. 재판 결과가 공개되자 로마 민중은 피소가 티베리우스의 사주를 받고 게르마니쿠스를 독살한 게 분명하며, 피소 가족에게 너그럽게 처분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여겼다. 이는 게르마니쿠스의 원수를 갚고 싶어했던 대 아그리피나도 비슷했다. 다른 유가족들은 재판결과를 뒤집을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해 수긍했지만, 그녀는 민중들이 제기한 티베리우스 배후 의혹을 진실로 믿었다. 이로 인해 그녀와 티베리우스 간의 갈등은 점점 깊어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일가가 [[세야누스]]에게 몰살당하는 계기로 작용하고 만다. == 사후 평가 == > 피소는 유별나게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 ----- > 원로원 결의(서기 20년 12월) 서기 20년 12월, 원로원 정식 회의 소집에서 통과된 원로원의 결의 및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에 대한 판결문은 제국 전역에 세워졌다. 이 동판들에는,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피소가 "유별나게 잔인한 성격", "야만적인 성격", "인간성을 결여한 자" 등으로 공개적으로 비난받고, 노골적으로 도덕적으로 결함이 뚜렷한 사람으로 실렸다. 아울러 그는 공개석상에서 원로원 동료, 친척들에게도 맹비난받고, 리비아 드루실라의 용서로 살아남은 아들, 손자들에게도 흑역사 취급을 넘어, 있는 것보다 못한 아버지, 할아버지로 평가됐다. 피소가 이렇게 비난받은 이유는 로마인의 사고, 현대인의 사고 모두에서 인격적으로 큰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피소는 그가 게르마니쿠스 사건의 피고로 기소된 순간부터 본인 스스로 논란을 일으켰다. 그의 아내, 아들, 딸 등은 게르마니쿠스의 죽음을 애도하고, 최대한 반성의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피소는 이런 그들을 다그치면서, 게르마니쿠스 죽음 속에서도 그의 죽음 소식을 듣자마자 망자의 넋을 애도하기 보다는 노골적으로 기뻐하면서 비이냥거렸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이는 재판 과정에서 고스란히 반영됐고, 피소의 이런 행동은 그가 기소 순간부터 원로원 전체가 피소 지지파, 피소 처벌파로 갈라진 상황에서 피소 처벌로 성격이 바뀐 이유가 됐다. 이런 까닭에 법정에서 증언, 증거 등으로 피소가 게르마니쿠스 죽음에 환호한 이야기는 그 사실이 밝혀진 순간, 게르마니쿠스 죽음에 오열하던 황실 식구들과 로마사람 모두 분노한 이유가 됐다. 오죽했으면, 최대한 객관적으로 재판을 보려고 한, 티베리우스 황제조차 피소를 인간 이하로 취급했다. 그러면서 티베리우스는 죽은 게르마니쿠스의 법적 아버지였고 망자의 유족 대표를 맡으면서, 피소를 인간적으로 도덕적인 상식조차 없다고 탄핵까지 했다. 이는 아우구스투스 가문으로 원로원이 강조한 황실 역시 비슷했는데, 인격자로 유명한 소 드루수스는 피소에게 큰 분노를 품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 생전인 서기 4년 이래, 원로원의 여론을 실제적으로 장악 중이었는데, 게르마니쿠스의 죽음 소식에 피소가 기뻐하고, 재판 중에도 큰 반성 없이 결백함만 호소하자, 이 결의 통과 후 그 동판을 제국 각지에 설치하는 것 등을 실질적으로 주도해, 피소가 악인임을 광고하게 했다. 따라서 그가 사후 기록말살형에 처해지면서도, 원로원 결의 아래에서 이름을 온전히 남기면서 인간 이하로 선포 아래 확정된 것에는 피소가 벌인 논란과 그 태도가 결정적이었다고 평가받는다. 다음으로 피소는 사회적으로 볼 때, 상관과 동료 모두에게 사랑받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건이 터졌을 때, 피소는 더 크게 비난받았고, 이 부분은 그가 근대 이후 게르마니쿠스 죽음이 독살이 아님이 확인됐음에도, 피소가 재평가받지 못한 원인이 됐다. 그는 본인의 편지에서 고백했듯이, 45년 동안 티베리우스를 따른 대표적인 티베리우스 지지자였다. 하지만 피소는 그의 혈연상 친척들인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3세의 양자, 조카인 크라수스 프루기 등이 끝까지 그를 변호해주지 않은 것 그대로 원로원 안팎과 로마군 내부에서 "유별나게 잔인하고 독특하고 인간성을 결여한 귀족"으로 평가받았다. 그 이유에는 권위적이고, 필요이상으로 잔혹한 처벌을 명령한 로마 귀족들조차 경악할 만큼, 잔인했기 때문이다. 피소는 총독, 군단장으로 있으면서, 사람을 재판 없이 처형하고, 군단장 시절에는 백인대장이 단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그를 십자가형에 처해 죽이는 일을 벌였다. 따라서 게르마니쿠스 요절 후에 벌어진 피소 재판에서 이 부분이 사실로 확인되자, 티베리우스와 소 드루수스, 원로원 의원 동료들은 "ferirate morvm"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이를 제국 전역에 피소가 벌인 잘못을 영구히 세워 알리며 계속 강조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ferirate morvm는 야만적인 성격을 뜻하는데, 로마에서 이런 평을 듣는다는 것은 야만적이고 전투력이 강해 로마에게 복속되지 않은 강인한 게르만족 전사들에게조차 로마군이 경멸적인 투로 말하지 않은 악평 중 악평이었다. 아울러 피소는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아버지와 일가 친인척 어른들조차 다루기 어려워 한 '사나운 성격'을 가지고 있어 평가가 좋지 못했다. 이는 그의 일가가 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의 차남 칼푸스를 시조로 둔 명문가였고, 그의 증조부와 집안 어른인 칼푸르니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내로, 아우구스투스의 외종조모이자 양모.]의 위엄 아래 조부를 시작으로 3대에 걸쳐 공화정 아래의 원로원,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원로원에서 끗발 날리는 귀족으로 평가됐던 것 때문이 아니라, 진짜 피소가 사나운 성격 때문이 컸다. 그는 신경질적이고, 인간관계 역시 폐쇄적이고 고압적이었다. 또 피소는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티베리우스의 친구이며 추종자임에도 고분고분한 인물이 결코 아니었고, 사소한 잘못조차 절대 인정하지 않아, 고집이 강하기로 유명했다. 이런 이유로 피소는 가족 질서의 관념을 보호하는 [[모스 마이오룸]]을 어긴 것을 넘어, 인간성 자체가 말살된 사람이자 사악하고 야만적인 사람으로 사후 로마인과 원로원에게 비난받았다. [[분류:기원전 1세기 집정관]][[분류:20년 사망]][[분류:로마 출신 인물]][[분류:로마 제국 집정관]][[분류:이탈리아의 자살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