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기원전 1세기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1세기)] ||||<#800080> {{{#ffffff {{{+3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br]{{{-1 [[라틴어]]: Gnaeus Cornelius Dolabella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파트리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국]] || ||<#800080> {{{#ffffff '''가족''' }}}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조부)[br]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아버지)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81년 || ||<#800080> {{{#ffffff '''전임''' }}} || [[소 가이우스 마리우스]][br][[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기원전 85년 집정관)|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 ||<#800080> {{{#ffffff '''동기''' }}} || [[마르쿠스 툴리우스 데쿨라]] || ||<#800080> {{{#ffffff '''후임''' }}}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br][[메텔루스 피우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로마 공화국의 저명한 귀족 가문인 [[코르넬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 모두 그나이우스라는 프라이노멘ㅇㄹ 사용했다. 독일의 신학자이자 고전 역사가 빌헬름 카를 아우구스트 드루만(Wilhelm Karl August Drumann, 1786 ~ 1861)은 그의 아버지는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의 동지로 기원전 100년 12월 [[원로원]]이 사투르니누스 일당을 국가의 적으로 규정한 뒤 벌어진 시가전 때 사망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여부는 불명확하다. [[술라의 내전]]이 한창일 때 친척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편에 섰다. 술라는 그에게 [[소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상대할 분견대 지휘권을 맡겼다. 기원전 82년 11월 콜리네 성문 전투에 참여한 그는 전투 직전에 술라에게 병사들이 급히 행군하느라 지쳤으니 휴식을 취하고 내일 싸우자고 제안했다. 술라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다가 하마터면 전투에서 패배할 뻔했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분전으로 콜리네 전투에서 승리한 뒤, 술라는 돌라벨라를 기원전 81년 집정관에 [[마르쿠스 툴리우스 데쿨라]]와 함께 선임했다. 당시 집정관 선거는 술라가 원하는 대로 통제되었다. 술라의 뜻에 반하여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던 퀸투스 루크레티우스 오펠리아는 술라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들에게 피살되었다. 그 후 두 집정관은 어떠한 권한도 없었고 [[독재관]] 술라의 의사에 순종하기만 했다. 이후 마케도니아 총독으로 부임해 트라키아 부족들과 전쟁을 벌여 승리한 뒤 기원전 78년 로마로 귀환해 [[개선식]]을 거행했다. 그 직후 당시 정치 경력을 막 시작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총독을 맡는 동안 속주민들을 착취한 혐의로 고발되었다. 돌라벨라의 변호를 맡은 이는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와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로 둘다 당대 최고의 변호사로 손꼽혔다. 그는 재판 내내 자신이 무죄로 풀려날 거라 확신하고 고발자인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향해 모욕을 퍼부었다. 특히 카이사르의 경력 내내 줄곧 따라다니는 "비티니아 왕비"[* 이 말은 [[비티니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 [[니코메데스 4세]]와 카이사르가 [[동성애]] 관계를 맺었다는 소문에서 비롯되었다. 정적들은 카이사르가 왕에게 '삽입당하는' 입장이었을 게 분명하다며 인신공격을 퍼부었다.] 실제로 재판은 무죄로 끝났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재판이 끝난 뒤 재판정에서 한 연설문을 출간한 것이 오랫동안 많은 독자들에게 읽히면서, 장기적으로는 카이사르의 명성이 드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