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로마 제국 집정관]][[분류:기원전 1세기 집정관]][[분류:25년 사망]][[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1세기)] |||| {{{+3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아우구르''' }}}[br]{{{-1 [[라틴어]]: : Gnaeus Cornelius Lentulus Augur}}} || || '''생몰년도''' ||미상 ~ 서기 25년 || || '''출생지''' ||[[로마 공화국]] 로마 || || '''사망지''' ||[[로마 제국]] 로마 || || '''지위''' ||[[파트리키]] || || '''국가''' ||[[로마 공화국]] → [[로마 제국]] || || '''가족'''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아버지?) || || '''직업''' ||[[로마 제국]] [[집정관]] ||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4년 || || '''전임''' ||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br][[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기원전 15년 집정관)|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 || || '''동기''' ||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기원전 14년 집정관)|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 || '''후임''' || [[티베리우스]][br][[푸블리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제국]] [[집정관]]. == 행적 == 고대 로마의 저명한 [[파트리키]] 가문인 [[코르넬리우스]] 씨족의 일원이지만 가족 관계는 알려지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기원전 59년 [[법무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그는 명망은 높았지만 몹시 가난해서 정계에 이름을 올릴 수 없었지만,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지원 덕분에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14년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기원전 14년 집정관)|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와 함께 집정관이 되었으며, 집정관이 되기 몇 년 전에 [[아우구르]]에 선임되었고, 아르발리 사제단에 선출되었다. 그는 기원전 10~6년 동안 [[다키아]]와 [[사르마티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개선 훈장을 아우구스투스에게 수여받았다. 이후 기원전 2년부터 서기 1년까지 아시아 총독을 역임했다. 서기 14년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도나우 전선군으로 파견되어 드루수스가 새 황제 [[티베리우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군인들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다. 22년 [[폰티펙스 막시무스]] 직책을 역임 중인 티베리우스가 부재 중인 상황에서 현직 [[플라멘|플라멘 디알리스]]인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말루기넨시스를 아시아 총독으로 선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 관철시켰다. 같은 해에 아시아 총독 가이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의 재판에서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속주민들을 상대로 착취를 일삼은 혐의가 입증되면서 유죄가 선고되자, 그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실라누스의 재산을 몰수에 국고에 넣되 실라누스의 아내 아티아가 친족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별도로 분리해서 실라누스의 자식들에게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티베리우스가 이 제안에 동의하면서,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졌다. 24년, 누메리우스 비비우스 세레누스, 마르쿠스 카이킬리우스 코르누투스, 루키우스 세이우스 투베루스와 함께 티베리우스 암살을 공모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그에게 걸린 모든 혐의를 면제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렌툴루스도 나를 미워한다면, 나는 살 가치가 없다"라고 밝혔다고 한다. 1년 후인 25년에 사망했고, 그동안 모은 재산을 티베리우스에게 물려줬다. 타키투스는 이것이 자발적인 행위라고 주장했지만, [[수에토니우스]]는 그가 티베리우스에게 전 재산을 물려주라는 유언장을 작성하고 자살하라는 압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세네카]]는 그가 "메마른 가슴과 그에 못지 않게 연약한 정신을 가졌으며, 구두쇠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말보다 동전에 더 자유로웠기에 웅변 능력이 너무 가난했다"라며, 그의 성공은 아우구스투스 덕분이라고 못박았다. 반면 타키투스는 그가 가난을 불굴의 의지로 견뎠고, 큰 부를 얻었을 때 아주 절제 있게 사용했다며 칭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