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기원전 1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감찰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1세기)] [include(틀:역대 로마 감찰관)] ||||<#800080> {{{#ffffff {{{+3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 }}}[br]{{{-1 [[라틴어]]: Gnaeus Cornelius Lentulus Clodianus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jpg|width=100%]]}}}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플레브스]] → [[파트리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국]] || ||<#800080> {{{#ffffff '''가족''' }}}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양아버지)[br]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72년 || ||<#800080> {{{#ffffff '''전임''' }}} ||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쿨루스]][br][[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기원전 73년 집정관)|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 ||<#800080> {{{#ffffff '''동기''' }}} || [[루키우스 겔리우스]] || ||<#800080> {{{#ffffff '''후임''' }}}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수라]][br][[그나이우스 아우피디우스 오레스테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플레브스]] 집안인 클로디우스 씨족의 일원이었지만,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라는 귀족에게 입양되면서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파트리키]] 가문인 [[코르넬리우스 가문]]에 입적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저서 <연설가에 대하여>에서 '그나이우스 렌툴루스'라는 귀족을 언급했는데, 학자들은 이 인물이 클로디아누스를 가리킨다고 추정한다. 키케로에 따르면, 렌툴루스는 가진 능력보다 연설을 전달하는 기술로 웅변술을 부풀렸다. 총명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외모와 표정이 그렇게 보였고, 언어는 풍부하지 않았지만 그러한 인상이 생겼다. 다만 웅변 도중 말을 능숙하게 끊고 목청이 좋았으며, 유쾌하고 경쾌한 목소리로 부족한 자질을 충분히 가렸다고 한다. 기원전 75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72년 [[루키우스 겔리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두 집정관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로부터 로마 시민권을 약속받은 속주민들에게 그대로 시민권을 주자고 제안해 통과시켰다. 또한 특정 형사 사건이 발생했을 때 속주민들을 비난하는 팜플렛을 배포하는 것을 금지하자는 법안도 통과시켰다. 이 무렵, 이탈리아는 [[제3차 노예 전쟁]]에 휘말렸다. 원로원은 [[스파르타쿠스]]의 세력이 갈수록 강해지는 것에 위협을 느끼고 두 집정관에게 각각 2개 군단을 줘서 노예군을 토벌하게 했다. 그는 아펜니노 산맥에서 티부르티나 가도를 따라 남하했고, 겔리우스는 캄파니아와 아풀리아에서 스파르타쿠스를 추적했다. 이에 스파르타쿠스는 주력군을 이끌고 북상했고, 렌툴루스의 2개 군단을 공격해 타격을 입힌 뒤 고지대에 자리를 잡았다. 렌툴루스는 즉각 그들의 진영을 공격했으나 크게 패하여 상당량의 보급품을 적에게 헌납하고 패주했다. 그 후 스파르타쿠스는 자신을 추격하는 겔리우스를 요격해 대승을 거둔 뒤 갈리아 키살피나로 갔다가 기원전 72년 가을에 재차 남하했다. 그는 겔리우스와 연합해 피케눔에서 스파르타쿠스와 맞붙었으나 또다시 패배했다. 로마 시민들은 두 집정관이 스파르타쿠스에게 완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공황 상태에 빠졌고, 원로원은 두 집정관이 임기가 끝날 때까지 스파르타쿠스를 이길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하고 수석 법무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에게 [[임페리움]]을 넘기기로 했다. 이렇듯 스파르타쿠스에게 완패하고 로마로 소환되어 임페리움을 넘기는 굴욕을 맛보았지만, 기원전 70년 동료 집정관이었던 루키우스 겔리우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두 감찰관은 전체 원로원 의원의 8분의 1에 달하는 64명을 원로원에서 제외시켰다. 이는 역대 감찰관 중 가장 많은 수치였다. [[테오도르 몸젠]]은 이에 대해 두 사람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구축한 체제를 해체하고 자신들의 이권을 관철시킬 새 체제를 구성하길 희망했던 당해 집정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크라수스의 의중에 따랐을 것이라 추정했다. 또한 두 감찰관은 [[동맹시 전쟁]] 중에 공식적으로 로마 시민권을 받은 이탈리아인들을 처음으로 포함시킨 시민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91만 명에 달하는 시민이 확인되었다. 기원전 67년, 동료 집정관이자 감찰관 겔리우스와 함께 폼페이우스 휘하 [[레가투스(로마)|레가투스]](Legatus: 군단장)에 발탁되어 [[지중해]] [[해적]]을 소탕하는 일에 종사했다.기원전 66년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임페리움을 폼페이우스에게 이양할 것을 제안한 호민관 가이우스 마닐리우스의 법안을 지지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는 기원전 59년 [[법무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