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2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기원전 112년 사망]][[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2세기)] ||||<#800080> {{{#ffffff {{{+3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br]{{{-1 [[라틴어]]: Gnaeus Papirius Carbo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112년 || ||<#800080> {{{#ffffff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플레브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조부 또는 아버지)[br][[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형제)[br]마르쿠스 파피리우스 카르보(형제)[br][[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기원전 85년 집정관)|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장남)[br]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차남)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113년 집정관 || ||<#800080> {{{#ffffff '''전임''' }}} ||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발부스(기원전 114년 집정관)|마니우스 아킬리우스 발부스]][br][[가이우스 포르키우스 카토]] || ||<#800080> {{{#ffffff '''동기''' }}} || [[가이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카프라리우스]] || ||<#800080> {{{#ffffff '''후임''' }}} ||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br][[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기원전 112년 집정관)|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킴브리 전쟁]]에서 처음으로 킴브리족과 맞붙었다가 참패한 인물이다. == 생애 == 평민([[플레브스]]) 씨족인 파피리우스 가문의 일원이다. 할아버지 또는 아버지인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는 기원전 168년 [[법무관]]을 역임했다. 형제로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와 마르쿠스 파피리우스 카르보가 있었다. 가이우스는 기원전 120년에 집정관을 역임했고, 마르쿠스는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안티오코스 8세]]가 [[델로스]] 섬에 그에게 비문을 헌장했다는 사실이 고고학 연구를 통해 확인되었는데, 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그가 기원전 116년 법무관을 역임한 뒤 아시아 총독으로 부임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기원전 113년 [[가이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카프라리우스]]와 함께 집정관을 맡은 그는 킴브리족이 이탈리아 국경에 접근해 노리쿰을 침공하자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고개를 장악한 뒤 킴브리족에게 당장 떠나지 않으면 무력으로 응징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킴브리 측이 "우리는 정착할 땅을 원할 뿐 로마와 싸울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해명하자, 카르보는 정착할 곳을 주겠다고 속여 그들을 노레이아로 유인한 뒤 이들이 쉬고 있을 때 기습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로마군은 오히려 킴브리족에게 완패했다. [[아피아노스]]는 짙은 안개와 뇌우로 인해 킴브리족이 추격을 중단하지 않았다면 카르보의 군대가 완전히 파괴되었을 거라고 밝혔다. 그 후 킴브리족은 [[갈리아]]로 향했고, 로마인들은 숲에 숨었다가 사흘 만에 집결했다. 기원전 112년, 로마에 귀환한 카르보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 탁월한 웅변술을 갖췄기에 오라토르(Orator, 연설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제2차 [[삼두정치]]의 일원이며 [[옥타비아누스]]의 라이벌이기도 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조부이기도 하다.]의 고발을 받고 재판에 회부된 후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막대한 벌금을 내고 추방형에 처해질 위기에 몰리자 독약을 먹고 목숨을 끊었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장남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기원전 85년 집정관)|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편에 서서 기원전 85년과 기원전 84년, 기원전 82년에 집정관을 맡았다. 그러나 [[술라의 내전]]에서 패한 뒤 망명했다가 시칠리아에서 [[폼페이우스]]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는 기원전 89년에 [[호민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