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기원전 3세기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3세기)] ||||<#800080> {{{#ffffff {{{+3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켄투말루스''' }}}[br]{{{-1 [[라틴어]]: Gnaeus Fulvius Centumal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노빌레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막시무스 켄투말루스]](조부)[br]그나이우스 풀비우스 켄투말루스(아버지)[br][[그나이우스 풀비우스 켄투말루스 막시무스]](아들)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229년 || ||<#800080> {{{#ffffff '''전임''' }}}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바르불라]][br][[마르쿠스 유니우스 페라]] || ||<#800080> {{{#ffffff '''동기''' }}} ||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기원전 234년 집정관)|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 ||<#800080> {{{#ffffff '''후임''' }}} ||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 루가]][br][[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기원전 4세기 중반에 투스쿨룸에서 로마로 이주한 뒤 로마 정계에서 활약한 [[노빌레스]] 가문인 풀비우스 가문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는 그나이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학자들은 그의 조부는 기원전 298년 집정관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막시무스 켄투말루스]]라고 추정한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기원전 229년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기원전 234년 집정관)|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두 집정관은 [[아드리아 해]]에서 해적행위를 일삼는 일리리아 해적들과 이들을 지원하는 [[테우타(아르디아이)|테우타]]를 무찌르기 위한 원정을 준비했다. 알비누스는 20,000명의 보병과 2,0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육군을 이끌었고, 켄투말루스는 200척 함대 사령관을 맡아 브룬디시움에서 아폴로니아로 수송했다. 아폴로니아와 에피담누스는 별다른 저항없이 귀순했다. 그 후 로마군은 일리리아 본토 깊숙이 침투해 여러 마을을 공략하여 약탈한 뒤 대부분의 영토를 로마와 동맹을 맺은 [[파로스의 데메트리오스]]에게 양도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켄투말루스는 연말에 160척의 함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돌아갔고 알비누스는 일리리아에서 겨울을 보냈다. 이듬해 봄, 테우타는 자신의 선박이 리수스 강 남쪽으로 항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공물 지불을 보장하며 로마가 통제하는 도시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는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그 후 알비누스와 켄투말루스는 로마로 돌아와서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켄투말루스 막시무스]]는 기원전 211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나, 기원전 210년 [[한니발 바르카]]를 상대로 [[2차 헤르도니아 전투]]에서 맞붙었다가 참패를 면치 못하고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