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개요 == [[마비노기 영웅전]]의 캐릭터 [[그림덴]]의 배경을 설명하는 문서. == 배경 == >"여신의 축복이 늘 당신과 함께하길." > >꾀죄죄한 차림의 소년은 얼굴이 달아올라 씩씩거리는 남자에게꾸벅 인사를 건넸다. > >"감히 이단자 주제에 여신을 입에 올리다니! 이단자 놈들. 이방인 놈들. 거지 부랑자 놈들. 이 마을에서 썩 꺼져라!" > >날 선 고함을 뒤로 한 채, 소년은 가족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먼발치서 날아온 크고 작은 돌들이 그의 몸에 부딪혀 이리저리 튕겨나갔다. > >"아버지, 저런 사람에게도 여신님의 축복이 함께 할까요?" > >소년은 부어오른 팔을 문질렀다. > >"물론이지. 여신께서는 자비로운 분이셔서, 그 어떤 인간의 과오도 끝없는 사랑으로 감싸고 용서하신단다." >"하지만 어머니, 저는 여신님의 가르침에 따라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을 뿐이에요. 그런데 저 사람은 고맙다는 말은커녕 우리를 욕하는걸요." > >어머니는 잔뜩 부아가 치민 아들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 >"그림덴, 여신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실 때 우리에게 무언가를 바라거나 요구하셨었니?" >"…아니요." >"대가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베푸는 마음. 그 마음이 바로 여신께서 우리에게 베푼 사랑과 자비의 본질이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군가를 도우려 하는 마음 자체야. 마음을 다해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한다면, 언젠가 이 세상은 고통도 슬픔도 없는 낙원 같은 곳이 될 거야.” >“하지만….” > >소년은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 >“돌을 맞은 건 여전히 분한걸요.” >“후후, 너도 언젠간 깨닫게 될 거란다. 이리 오렴.” > >소년의 부모는 미소 지으며 작은 몸에 묻은 먼지를 조심스레 털어주었다. >어쩐지 머쓱한 기분이 든 소년은 연신 머리를 긁적였다. > >그림덴의 가족은 전 대륙을 방랑하는 ‘방랑 수행자’들이었다. >가족의 구성원들은 나이, 출신, 피부색이 모두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애로운 여신의 뜻 아래 모여 조화롭게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서로를 진정한 가족으로 여기고 영원한 수행 길의 동반자로서 의지하며 지냈다. >비록 행색은 초라하고 가진 것도 없었지만, 그들 사이에는 늘 행복과 평안이 가득했다. >소년의 부모 또한 수행자였다. >그들은 늘 환한 미소를 띠며 세상의 사람들을 축복했다. >어렵게 구한 음식이 바닥에 내팽개쳐져도, 도움의 손길에 대한 감사 대신 모진 매질이 돌아와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늘 선한 사람들. >소년은 그런 가족들을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여겼다. >자신도 그 모습을 닮아, 언젠가는 그들과 같이 진정한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수행자가 되고 싶다고 늘 생각했다. > >해가 저물면 소년과 가족들은 모닥불 앞에 앉아 현명한 장로 어르신의 이야기를 경청하곤 했다. > >"자비로운 여신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시고, 대가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 두려움과 공포의 근원인 ‘마신’을 봉인하였소. 우리는 여신의 무한한 자비 속에서, 때론 울고 웃으며 소중한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오.” > >정좌한 자세로 알 듯 말 듯 한 이야기를 듣고 있기는 꽤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소년은 가족이 다같이 모여 여신의 이야기를 듣는 이 시간이 좋았다. > >"하지만 아직 이 세상엔 고통받는 사람들이 아주 많소. 그들은 전쟁이 남긴 상처와 배고픔, 두려움과 공포로 여신의 사랑과 자비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오. 우리는 여신과 같이 희생과 사랑을 베풀어, 이 땅의 모든 사람이 여신의 사랑을 깨닫고 ‘낙원’의 평안과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하오. 이것이 우리들의 사명이자 신념, 그리고 끝없는 수행의 지표이외다. 이 순간에도 여신의 사랑이 함께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오. 우리도 여신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사랑하며, 베풀고 또 베풉시다.” > >긴긴 이야기를 마치고 장로가 눈을 감자, 수행자들도 함께 눈을 감고 명상을 시작했다. >소년도 눈을 감고 낮에 있었던 일을 찬찬히 떠올렸다. >귓가에 남아 윙윙대는 고함은 팔의 멍자국을 더 욱신거리게 만드는 것 같았다. >사실은 여전히 분한 마음도 남아있는 채였다. >하지만 자신의 사랑으로서 세상이 더 평안하고 행복해질 수 있다면, 소년은 기꺼이 돌을 던진 자를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히히, 그깟 거. 어렵지 않네.” > >감은 두 눈 사이로 여신의 자애로운 미소가 보이는 것 같았다. >왠지 여신님이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 같아 소년은 제법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 >“녀석, 뭐가 어렵지 않다는 거냐?” > >아차. >소년은 황급히 입을 틀어막고 눈을 떴다. >어느새, 둘러앉은 수행자들의 시선이 모두 그를 향해있었다. >눈 앞에 어른거리던 여신의 얼굴이 어머니의 장난스런 미소라는 걸 깨닫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소년은 그만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 >[[파일:grimden01.jpg]] > >소년의 엉뚱한 행동에 조용한 명상 시간은 삽시간에 웃음바다로변했다. >장로 할아버지도 부모님도 가족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며 한바탕 껄껄 웃었다. >전염이라도 된 듯 놀림거리가 된 소년도 어느 새 가족들과 함께 하하 웃고 있었다. >뜰을 가득 메운 웃음소리가 은은한 모닥불의 연기와 섞여 밤바람을 타고 은은히 퍼져나갔다. > >한 편, 모닥불의 빛이 만들어낸 검은 어둠 속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마치 먹이를 물색하는 맹수처럼 뜰에 모여 웃고 있는 무리를 조용히 응시했다. >무언가를 노리듯, 그들은 몸을 낮추고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 >바스락, 바스락. > >거슬리는 소리에 소년은 고개를 들었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섞여버린 듯 어두운 밤이었다. > >“잘못 들었나?” > >눈을 비비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심한 소년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의 손에는 나무로 만든 작은 여신상이 들려 있었다. >정교하지는 않지만 제법 그럴듯한 형태를 갖춘 이 조각상은 그가 직접 만든 것이었다. >자신의 역작을 완성하고자, 소년은 가족들이 있는 곳에서 몰래 >빠져나와 밤늦도록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던 참이었다. > >바스락, 바스락, 바스락. > >거슬리는 소리가 다시 귓가에 들려왔다. >뭐라도 튀어나올 듯한 으스스한 느낌에 소년은 재빨리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우거진 덤불 뒤로 밤의 어둠과 어우러진 한 ‘그림자’가 보였다. >스산한 밤바람에 흔들리는 풀잎 사이, 검은 형체는 일말의 미동조차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소년은 어쩐지 그림자가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늘 너머의 날카로운 시선이, 자신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고 있음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자신이 거대한 맹수 앞의 생쥐라도 된 듯 섬뜩한 기분이었다. >소년은 주변의 잡동사니들을 챙긴 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 >‘어서 모두에게 돌아가야 해.’ > >작은 여신상을 쥔 손이 긴장으로 덜덜 떨려왔다. >지면에서 발을 떼는 그 순간, 그림자가 자신을 향해 맹렬히 덮쳐오리라는 것을 소년은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어색한 자세로 서 있는 소년과 검은 그림자 사이로 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 >‘지금이다!’ > >소년은 있는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무서운 속도로 그림자가 그 뒤를 쫓기 시작했다. > >별빛 하나 없는 칠흑의 하늘 아래로 생사를 가르는 맹렬한 추격전이 벌어졌다. >절박하게 들판을 내달리는 소년의 호흡은 거칠었고 그 심장은 터질 듯 날뛰었다. >금세 손만 뻗으면 잡힐 만큼 거리는 빠르게 좁혀졌지만, 검은 형체는 유희라도 즐기는 듯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한 채 뒤를 바짝 따라오고 있었다. >가족들에게 어서 돌아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소년은 자꾸만 느려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이내 소년의 머릿속에 아주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 > >‘만일 지금 내가 돌아간다면, 이 자는 가족 모두를 해치고 말 거야.’ > >그랬다. >설령 소년이 가족에게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그들 중 이런 자와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몰고 온 괴한에 의해, 온 가족이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 >‘그렇다면…, 죽는 건 나 하나만으로 족해.’ > >부모님과 가족들의 상냥한 미소가 뇌리를 스쳤다. >그는 한 손으로는 식은땀에 젖은 여신상을, 다른 한 손으로는 작지만 날카로운 조각칼을 꼭 쥐었다. > >‘여신님, 저에게 용기를 주세요.’ > >소년은 달리던 발을 멈추었다. >동시에 검은 그림자도 자리에 멈춰 섰다. >둘 사이로 오래도록 길고 긴 침묵이 흘렀다. > >일시에, 소년과 그림자는 서로를 향하여 몸을 날렸다. >힘껏 공중으로 도약한 소년은 검은 형체의 등에 조각칼을 내리꽂았다. >하지만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형체는 어느새 그의 뒤에 나타나, >너무도 간단하다는 듯 작은 등을 강하게 내리쳤다. >소년은 맥없이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커다란 천 속에서 발버둥 치던 기억을 마지막으로, 소년의 의식은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 > >바닥에 부딪히는 충격에 소년은 신음하며 눈을 떴다. 전신이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듯 아팠다. >몸을 일으키자 발치에서 묵직한 사슬이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돌바닥에서는 한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소년은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마지막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분명, 자신은 그 괴한에 의해 이곳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 >불현듯 그의 머리에 가족이 떠올랐다. >자신만 말려든 것인지 아니면 결국 가족까지 모두 말려든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제발 그들만은 무사하기를, 소년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갇혀 있는 곳을 둘러보았다. >등불의 어슴푸레한 빛이 닿는 곳마다 알 수 없는 표식들이 새겨져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출입구로 보이는 커다란 철문을 제외하고는 작은 창문이나 빈틈조차 없었다. >완벽히 밀폐된 방의 모습은, 마치 사회에서 격리된 흉악한 죄수나 짐승을 가두는 감옥을 연상케 했다. >소년은 족쇄에 묶인 발을 끌고 녹슨 철문으로 다가가려 했지만, 이내 사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주저앉고 말았다. >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열린 문 사이로, 가면을 쓴 세 사람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특이한 가면과 의복으로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있었다. >동일한 복식을 한 채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이들이 인간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서 파생된 분신이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게 했다. >머리에 드리운 천 너머로 드러난 비틀린 입꼬리 만이 그들이 유령이나 그림자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소년은 자신이 마주했었던 괴한의 가면과 눈앞의 가면이 같은 것임을 곧 눈치챘다. >그들 중 가운데에 있던 자가 소년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 >"두려워 말아라. 너는 선택 받았다.” > >수상한 자는 소년의 주위를 돌며, 그의 신체와 수족 곳곳을 꼼꼼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 >“흠, 오늘 들어온 '자원' 중 가장 최상급이야. > 정말 보기 드물게 강건한 신체로군. >좋은 무기가 될 재목이야.” > >소년은 경계심과 적대감을 담아 눈앞의 형체를 노려보았다. > >“네 이름은 뭐지? 겁내지 말고 대답해 보거라.” >“……” >“나는 너를 더 나은 삶으로 이끌어 줄 ‘인도자’다. >내 옆에서 수족이 되어주는 이 자들은 ‘사역자’라 부른다.자, 다시 묻겠다. 네 이름은 뭐지?” > >소년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 >“…흠, 좋다.” > >인도자는 흥미롭다는 듯 소년에게서 한 발짝 물러섰다. > >“이제 너는 비참하고 열등한 빈민의 삶을 벗어나, 아주 강하고 아름답고 충성스러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내가 인도하는 길로 잘 따라오기만 한다면 우리는 곧 '가족'처럼 지내게 되겠지." > >자신을 가족에게서 떼어낸 악한의 입에서 ‘가족’이란 말이 나오자, >소년의 마음 깊은 곳에 분노가 치밀었다. >그는 절대로 이자에게 굴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 >“자, 그럼 또다시 묻겠다. 네 이름이 뭐지?” >“대답 안 해. 절대로.” > >일순간, >인도자의 손이 소년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 >강한 충격에 휘청이는 소년은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을느꼈다. >터진 입술에서 흘러나온 피가 비릿한 내음을 풍기며 입안에서 천천히 퍼져나갔다. >소년은 두려웠다. >다음번에도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면 이번엔 손이 아니라 인도자의 허리춤에 걸린 칼이 날아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서는 순간, 다시는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게 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의지를 다잡은 소년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두 눈은 분노와 저항이 뒤섞여 이글거렸다. >방 안을 울리는 커다란 목소리가 소년을 향해 되물었다. > >“답하라. 네 이름은 뭐지?” >"......." > >인도자가 가볍게 고갯짓을 하자 옆에 늘어서 있던 사역자들이 재빨리 소년을 포박했다. >소년은 거세게 몸부림쳤지만, 그들의 완력을 이겨내기엔 역부족이었다. > >"보통의 ‘자원’들은 이런 상황을 오래 버텨내지 못한단다. >공포가 그들의 정신을 뿌리째로 갉아내기 때문이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들은 시작도 하기 전부터 일찌감치 자신을 포기하고 먼저 굴종한단다. 그런 녀석들은… 너무 쉽지. 가치가 떨어져.” > >그가 다시 고갯짓하자 사역자들은 소년을 강제로 짓눌렀다. >소년은 무릎을 굽히지 않기 위해 있는 힘껏 버텼다. > >“하지만 너는 다른 자원과는 확실히 다르다. >최상의 육체에 어울리는 강한 정신을 가지고 있어.” > >무릎 꿇은 소년을 향해 인도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소년은 가면 너머로 그가 씩 웃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널 ’교육’ 하는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겠구나. 하지만 너도, 나도 금방 적응하게 될 것이다." > >[[파일:grimden02.jpg]] > >그는 소년의 얼굴을 거칠게 잡아채 무언가를 씌웠다. >그리고 품에서 작은 병을 꺼내어, 안에 든 액체를 소년의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발버둥 치던 작은 몸의 움직임이 점차 둔해지기 시작했다. > >"자, 이제 답해 보거라." > >축 처진 채 초점 잃은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소년을 향하여 한층 드높아진 목소리가 물었다.. > >“네 이름은 뭐지?” >“나…나는…그림덴….” > >인도자는 만족한 듯 소년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 >"그럼, 시작해보자꾸나. 그림덴." > >그 날 이후, 소년은 인도자의 감시 아래 매일 강도 높은 교육과 신체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의 목적은 그를 오직 하달된 명령에 복종하는 강력한 ‘인간 병기’로 만드는 것에 있었다. >소년을 납치한 집단은 일종의 암살 집단으로, 빈민이나 무연고자어린이를 납치한 후 살육에 최적화된 인간 병기로 재생산했다. >그리고 이를 필요로 하는 자들의 의뢰를 받거나 병기를 대여해주며 막대한 재물을 축적해왔다. >철을 담금질하듯 그들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소년의 육체를 극한까지 몰아붙이며, 약물 주입과 세뇌를 통해 정신을 해체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오래지 않아 소년은 아직 다 성숙하지 않은 신체로도 성인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타고난 신체 능력에 힘입어 그의 힘은 다른 ‘자원’들보다 빠른 속도로 강해졌다. > >하지만 나날이 강해지는 육체와 정반대로, 그의 정신은 점점 피폐해져만 갔다. >매일 소년에게 투입되는 엄청난 양의 약물은 기억과 추억, 성격과 감정, 미래에 대한 꿈 등 그를 그답게 만들어주는 것들을 차츰차츰 지워나갔다. >그리고 그 빈 자리에는 교묘하게 명령에 대한 복종과 충성, 그리고 폭력을 향한 갈증과 충동이 채워졌다. >인도자는 숙련된 장인이 도자기를 빚어내듯 안으로부터 무너져 내려가는 소년을 정교한 폭력과 세뇌로 다듬어나갔다. >오직 최상급의 우월하고 냉혹한 인간 병기 ‘그림덴’을 만들어내기위하여. >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소년은 온 힘을 다해 버티며 싸웠다. >어둠과 망각에 잠식되지 않기 위하여 인도자를 향해서, 정신을 지배하는 약물을 향해서 온 힘을 다 해 저항했다. >‘그림덴’이라는 자신으로서 남아있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결코 꺾이지 않는 소년의 의지 너머에는, 약물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그가 애써 붙들고 있는 작은 기억의 파편이 있었다. > >‘이 순간에도 여신의 사랑이 함께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오.’ > >이제는 누가 말했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는 말 한마디.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수렁 속에서도 누군가 나와 함께 한다는 따스한 한마디가, 소년에겐 너무나도 큰 위안으로 다가왔다. >고통스러운 순간마다 그는 절박하게 이 기억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물론 소년이 이렇게 버티면 버틸수록, 그에게 가해지는 약물과 세뇌의 강도 또한 더욱 무자비해졌다. >완벽한 복종과 충성을 위하여 인도자는 저항하는 소년을 더욱 지독하게 학대했다. > >그렇게 인도자와 소년 사이에 팽팽한 줄다리기가 계속되던 어느 날, 소년은 우연히 탈출할 기회를 잡게 되었다. >어떤 이유에선지 알 수 없지만, 머릿속을 쥐어짜는 듯한 짧은 통증 이후 아주 잠시나마 세뇌 상태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곧 가족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부푼 그는, 자신을 추격하는 자들을 피해 미로와도 같은 통로를 내달렸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도달한 탈출구 앞에서 그는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제는 더 이상 돌아가야 할 곳도 가족들의 얼굴조차도 기억해낼 수 없었다. >단 몇 발짝 앞에 그토록 원하던 자유가 있었지만, 돌아갈 곳을 잃은 소년의 의지는 그 자리에서 산산이 조각나버렸다. >그렇게 그저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그는, 결국 인도자에게 잡히고 말았다. >인도자의 손에 이끌린 채, 소년은 다시 깊은 어둠 속으로 돌아갔다. > >탈출에 실패한 이후, 인도자는 소년을 굴복시키기 위해 지독하리만치 교육의 강도를 높였다. >이미 부스러져버린 소년의 마음은 더욱 빠른 속도로 해체되어, 인도자가 이끄는 그림자 속으로 침잠했다. >그렇게 꼬마 수행자 소년은 어둠 속에 잠들고, 강하고 완벽한 ‘인간 병기’가 새로이 눈을 떴다. >-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숲길로 호화로운 외형의 마차가 달리고 있었다. > >"이런 날씨에 갑자기 소집령이라니, 우리를 무시해도 이렇게 무시할 수가 있소? 그자의 변덕에 맞추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하군." >"쉿,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마시오. 조금이라도 심기를 거슬렀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관 짝에 갇힌 사람이 부지기수라는 걸 모르시오?” >"어차피 나의 협력이 없다면 그도 결국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지. 걱정하지 마시오. >모든 것이 계획한 대로 잘 준비되고 있소." > >덜컹. >달리던 마차가 갑자기 휘청거리며 멈춰 섰다. > >"밖에 무슨 일이야? 젠장." >"내가 나가보겠소." >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자가 마차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남자는 불안한 시선으로 밖을 조심스레 내다보았다. >그때, 창밖에 검은 잔상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곧이어 육중한 것이 쓰러지는 듯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 >"무, 무슨 일이오!" > >남자는 황급히 자신의 검을 들고 마차 밖으로 뛰쳐나왔다. >마차의 주위로 눈조차 감지 못한 시체 두 구가 널브러져 있었다. >습기를 머금은 끈적한 공기 사이로 서늘하게 흐르는 살기를 감지한 그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 >"제... 제... 젠장!! 습격인가. 누가...?" >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빗줄기 가운데로, 검고 커다란 형체가 자신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짓눌릴 듯한 위압감에 그의 호흡이 점차 가빠졌다. >저 짐승 같은 놈에게 등을 보이는 순간 그대로 베이리라는 것을, 남자는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손에 쥔 검을 들어 그림자에게 겨누었다. >하지만 그 검 끝은 가엾어 보일 정도로 초라하게 달달 떨리고 있었다. >연신 마른 침을 삼키며 그는 다가올 최후를 기다렸다. > >갑자기, ‘그림자’의 움직임이 수상했다. >놈이 한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더니 이내 무릎을 꿇은 것이다. >고통에 신음하며 내뱉는 거친 입김이 공포에 질린 남자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 >‘빈틈이다!’ >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그는, 자신에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 >"하... 하하하, 허술하구나! 고작 저런 놈을 가지고 이 나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나. 허술하구나, 허술해!" > >남자는 실성한 듯 웃으며 허공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쳤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의복이 비와 진흙으로 더럽혀지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남자는 몇 번이고 넘어지고 일어나면서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 >엉망이 된 모습의 남자는 달리고 달린 끝에 비로소 숲길을 벗어났다. >멀지 않은 곳에 도시로 진입하는 성문이 보였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살았다는 안도감에 환호성을 질렀다. > >“…아하하하! 억!” > >하지만 어느새 후방에서 날아온 길고 예리한 칼날이 그의 배를 깊게 관통했다. >환희의 웃음이 채 가시기도 전, 남자는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 >검은 그림자는 최후를 확실히 확인 해두려는 듯 쓰러진 표적에게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여전히 한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은 채였다. >목숨을 거두는 자의 정체를 눈에 각인시키려 남자는 남은 힘을 짜내 그림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얼굴을 감싸 쥔 손가락 사이로 내비치는 살의 어린 눈빛. >하지만 그 눈빛은 죽어가는 자신의 것보다도 한없이 공허하게만> 느껴졌다. > >"...암살자여. 왜…. 어째서…. 누가...." > >남자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무의미한 질문을 뱉어냈다. >그림자는 대답 없이 그저 자신의 검을 고쳐 잡았다. > >잠시 뒤, 비 갠 하늘의 구름 사이로 햇빛이 어슴푸레 비추었다. >빛에 닿아 녹아버리기라도 한 듯 그림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던 풀이나 바위처럼, 말라붙은 진흙과 나뭇잎의 잔해로 뒤덮인 한 남자의 몸뚱이만이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풀 사이로 덧없이 누워있을 뿐이었다. > > >"정말 만족스럽군. 뛰어난 무기를 가졌다고 하더니 정말 의심의 여지가 없구먼." > >호화로운 차림의 의뢰인은 흡족한 표정으로 방을 둘러보았다. >방 한구석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긴 ‘무기’의 존재가 그에게도 느껴졌다. > >"언젠간 이 무시무시한 칼날이 나를 향할지도 모르겠군. 그렇지 않은가?" > >의뢰인의 질문에 온몸을 로브로 둘러싼 인도자가 고개 숙여 공손한 자세로 답했다. > >"저희를 그저 부에 휘둘리는 집단으로 보지 말아주십시오. >비록 피 값을 받으며 살아가는 무뢰배들이지만 명예와 충성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껄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게나. >그저 자네들이 가진 최강의 무기를 칭송하고자 첨언하였을 뿐이니. 그럼, 다음에도 잘 부탁하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모쪼록 또 찾아주십시오." > >보수가 담긴 궤짝을 옮기도록 하인들에게 지시한 의뢰인은 곧 돌아갔다. >궤짝 속에 가득 담긴 금화를 확인한 인도자는, 고개를 떨군 채 우두커니 서 있던 검은 그림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 >"오늘도 수고가 많았다. 내가 만들어낸 가장 강하고 잔혹한 병기여. 이제 네 노고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줄 시간이구나." > >자신의 작품을 자랑스러운 듯 바라보며, 그는 무기의 손에 사슬을 채웠다. > >"자, 어서 네 방으로 돌아가자꾸나." > >길고 복잡한 통로를 지나 그림덴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긴 시간 수많은 암살 임무를 완벽하게 처리해낸 인간 병기의 방은, 그저 그가 납치되어 오던 날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가 방에 들어서자 사역자들은 재빨리 그의 양발에 족쇄를 채웠다. >일말의 저항조차 없이 초점 잃은 눈빛으로 족쇄를 찬 그의 모습은 마치 실이 끊어진 인형을 연상시켰다. >인도자는 그림덴의 입에 천천히 약물을 흘려 넣은 뒤 나지막이 구절을 외웠다. > >"아버지는 나를 네 번 버렸네. 불사의 비밀은 영원한 어둠으로.” >“붉은 꽃은 알고 있네. 죽음이 어디에서 왔는지.” >“너는 누구냐.” >“나는 네 번 죽은 자의 사념입니다.” >“네 소임이 무엇이냐.” >“나는 그림자. 명령에 따라 베는 것이 나의 소임입니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오직 복종. 복종뿐입니다." > >그림덴은 익숙한 듯 막힘 없이 대답을 이어갔다. >이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듯, 인도자는 그의 고개를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 >"잘했다. 곧 향을 피울 테니 이만 쉬거라." > >철문을 잠그는 소리가 나자 그림덴은 비로소 고개를 떨구었다. > 인도자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써 참아냈던 두통이 일시에 몰려왔다. >이내, 환풍구를 통해 방 안으로 역한 냄새를 풍기는 연기가 들어왔다. > >"......후." >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종일 그를 괴롭히던 통증은 약물로도 향으로도 진정되거나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약물이 몸에 주입되면 될수록, 고통은 더욱 심해져만 갔다. >오랜 시간 훈련을 거쳐온 그의 육체는 이미 온갖 수준의 고통을 견딜 수 있도록 충분히 강화된 상태였다. >하지만 늘 강도 높은 세뇌와 기억 조작에 시달리며 약물의 부작용을 감당해야 했던 그의 정신은, 육체와 달리 너덜너덜하게 망가진 지 오래였다. > >어느 순간부터 종종 미약한 두통이 느껴졌던 건 그 자신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심한 고통을 느꼈던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칫하다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을 뻔할 아찔했던 상황. 어쩌면 오늘이 그가 처음으로 임무를 실패한 날이 될 수도 있었다. >주어진 명령을 이행하지 못하는 것은 그림자에게 있어서 최악의 수치였다. >그렇지만, 그는 인도자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이미 모든 것이 잠식당해버린 그였지만, 무의식 너머에는 여전히 가냘픈 저항의 의지가 남아있었는지도 몰랐다. > >"으윽...." > >점차 심해지는 통증을 견디기 위해 그림덴은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쌌다. > >[[파일:grimden03.jpg]] > >그는 고통을 잊기 위해 다른 생각을 해보려 애썼다. >간신히, 그의 머릿속에 무언가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그동안 자신이 직접 베어낸 자들의 최후였다. >인간, 마족…. 종을 가리지 않는 수많은 생명이 그의 눈앞에서 스러져갔다. >죽어가는 자들이 남긴 의문과 원망, 그리고 저주를 그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기대어 있는 돌벽에 새겨진 음각처럼, 모든 죽음의 순간이 그의 뇌리에 강렬히 각인되어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거나, 감정을 불러일으키진 않았다. >그는 늘 무덤덤하게 죽은 자들의 기억을 받아들였다. >어설픈 감정은 무기에게 결코 허락되지 않았다. > >여전히 머리가 욱신거렸다. >어느새 그의 몸은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어있었다. > >‘…이 순간에… 여신… 함께… 기억하….’ > >순간,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잡음이 뒤섞인 목소리가 때로는 또렷하게, 때로는 나지막하게 귓전에 울려 퍼졌다. > >‘…여신… 함께… 기억하….’ >‘여신?’ > >그림덴은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을 쳤다. >여신이라는 두 글자를 떠올릴 때마다 고통으로 머리가 터져나갈것 같았다. >통증을 견디려 바닥을 긁어대던 손끝에 크고 작은 핏방울이 맺혔다. >진정하려 할수록 오히려 머릿속은 더욱더 혼란해져만 갔다. > >수상한 움직임을 감지한 사역자들과 인도자가 방에 들이닥쳤다. > >“무슨 일이냐.” >“갑자기 이성을 잃은 듯합니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서 진정제를 가져와라. 어서!” > >인도자는 제압당한 채 쓰러져 있는 그림덴의 입에 재빨리 약물을 흘려 넣었다. >약효가 돌자 그는 곧바로 정신을 잃은 채 깊은 잠에 빠졌다. > >“이런 불안정한 상태로 내일 임무를 이행할 수 있을까요. >다른 그림자를 사용하시는 게….” >“아니, 이 정도면 내일까지는 충분히 버틸 거다. >모든 것이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다.” > >바닥에 누워있는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며, 인도자는 분한 듯 내뱉었다. > >“…아직도 꺾이지 않은 것인가.” >- >다음 날, 검은 무리가 밝은 햇빛이 만들어 낸 그림자 사이로 질주>하고 있었다. >은둔하고 있는 표적들을 모조리 섬멸하는 것이 그들이 받은 명령이었다. >표적들의 은신처는 숲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리라고 자신한 듯 방치된 그곳은 은신처>라기엔 그야말로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그림자들은 때를 기다리며 조용히 포위망을 좁혀나갔다. >그림덴 또한 자신의 자리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수신호가 떨어지자, 그는 숨소리를 낮춘 채 진입할 태세를 갖추었다. > >그때, 갑자기 그의 귓가에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 >‘… 여신… 여신…. 기억….’ >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머리에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몰려왔다. >이를 참아내기 위해 그는 재빨리 날붙이로 자신의 허벅지를 찔렀지만 소용없었다. >지금 느껴지는 고통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눈에 닿는 빛들이 날뛰는 심장박동에 따라 제멋대로 증폭되고, 보이는 모든 것들이 과장된 형태로 왜곡되어 빠르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림덴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는 더 이상 피아를 구분할 수 없었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이곳에 있는지조차 떠올릴 수 없었다. >혼란에 빠진 그는 신음하며 대형을 벗어나 무작정 전방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수상한 소리를 듣고 낌새를 눈치챈 표적들이 이내 은신처에서 하나둘 다급히 빠져나왔다. >그림자의 무리는 이탈해버린 낙오자의 뒤를 쫓는 대신,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도망치는 표적들을 향하여 달려갔다. > >그림덴은 달리고 또 달렸다. >그의 이성은 이미 강렬한 환각과 이명, 그리고 지독한 통증에 의해 완전히 마비된 상태였다. >폭주하는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누군가를 베어야 한다는 강한 충동, 그뿐이었다. > >"카아악!" > >문득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환청의 틈새를 비집고 들려왔다. >간신히 고개를 들자 그의 눈앞에 두 형체가 보였다. >왜곡된 시각으로 인해 정확히 알아볼 수는 없지만, 분명 그것은 마족이 인간과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마족이 내뿜는 살의가 그를 자극했다. >전신의 감각이 저놈을 베어야 한다고 종용하고 있었다. >머릿속에 인도자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 >‘… 숨통을 끊어라…!’ >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마족에게 다가간 그는 놈의 머리를 향해 일격을 날렸다. > >무너져 내린 형체가 내뿜는 피를 뒤집어쓴 채 숨을 헐떡이던 그림덴은, 힘을 다해버린 듯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점차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걸 보았다. >하지만 그게 누구인지 채 알아보기도 전, 그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불현듯, 그림덴은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관자놀이가 지끈거렸지만 이제 환각이나 환청은 완전히 잦아든 상태였다. >그는 문득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카타마르가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무장 해제가 가능할 정도로 무방비 상태였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포근한 이불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너무나도 생경했다. >작은 오두막의 창문에 저무는 햇살이 은은히 걸쳐 있고, 아기자기한 장식이 놓인 벽난로에는 따뜻한 장작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소박한 풍경화 한구석에 검은 물감을 칠해놓은 듯, 그 자신의 모습만이 평온한 집의 정경에 어우러지지 못한 채 이질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벽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재빨리 적당한 크기의 가구 뒤로 몸을 숨겼다. >상대를 단숨에 제압하기 위하여 그는 숨죽인 채 태세를 갖추고 주방 쪽을 응시했다. > >잠시 후, 웬 노파가 나타났다. >손에 들린 접시 위에는 갓 구운 듯한 빵이 놓여있었다. >노파는 비어있는 침대를 보고 깜짝 놀란 듯 보였다. > >"어머나, 벌써 일어났나? 어디로 갔지?" > >들고 있던 접시를 탁자 위에 둔 노파는 콧노래를 흥얼대며 바닥에 떨어진 이불을 주워 정돈하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상대의 등장에 그림덴은 내심 놀랐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이던 그는, 곧 노파가 자신의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는 조용히 노파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아이고, 거기 있었군요. 내가 요즘 눈이 좀 어두워서. 거기에 있는 줄 꿈에도 몰랐어요." >"...." >“청년, 몸도 성치 않을 텐데 거기 서 있지 말고 어서 이리 와 앉아요. 내가 빵을 좀 구워봤는데 입에 맞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 >주름진 손이 그림덴의 팔을 덥석 잡았다. >마치 익숙한 손님을 맞이하듯이 노파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그를 자연스럽게 이끌어 의자에 앉혔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상처투성이 얼굴을 보며 그녀는 안심하라는 듯 미소 지었다. > >"기억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청년이 나를 구했어요. >정말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 마치 그림자처럼 순식간에 나타났다오.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좀 그렇지만, 영영 깨어나지 못하는 건 아닌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안색도 너무 좋지 않고 계속 신음을 하고 있어서, 이러다 큰일이 나는 것 아닌가 싶었지요." > >노파는 그림덴 가까이 접시를 옮겼다. >노릇노릇한 갓 구운 빵에서 나는 냄새가 그의 코끝을 자극했다. >사실 그는 병기가 된 이후로, 한 번도 제대로 된 ‘음식’이란 것을 먹어보지 못했었다. > >"자, 이걸 먹으면 기운이 좀 날 거에요. >부담 가지지 말고 어서 하나 들어봐요." > >그는 이 모든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모든 것이 너무나 낯설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도 익숙했다. >수상한 존재인 자신을 이렇게 경계심 없이 받아들이는 노파가 꺼림칙하다가도, 동시에 이 따스함에 기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탁자에 놓인 접시를 향해 그의 손이 조심스레 움찔거렸다. >하지만 이내 그는 들었던 손을 거두고 말았다. > >‘그림자가 속해야 할 곳은 오직 어둠뿐이다. >빛 아래의 그림자는 그저 덧없이 소멸해버릴 뿐이니.’ > >인도자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머릿속 저편에서 들려왔다. >그림자인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어둠 속 자신의 방뿐이었다. >그는 이런 곳에 있도록 허락되지 않은 존재였다. >멍하니 앉아있던 그의 눈에, 벽난로 위에 놓인 한 작은 장식이 보였다. >강한 이끌림을 느낀 그림덴은 재빨리 벽난로로 다가가 장식을 조심스레 손 위에 올려놓았다. >날개 달린 여성의 형상을 한 조각, 그것은 나무로 만든 ‘작은 여신상’이었다. >놀란 표정으로 연신 여신상을 어루만지는 그를 보며 노파가 말했다. > >“그건 내가 오래전 무녀 생활을 은퇴할 때 받은 것이에요. > 신전을 떠날 때, 언제든 여신께 기도를 올릴 수 있도록 사람들이 선물해 준 소중한 것이지요. >비록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그 여신상은 아직도 늘 여신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오.” > >그리운 듯한 표정으로 그녀는 창밖의 석양을 바라보았다. > >쿵. >갑자기 청년이 있던 쪽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그를 향해 다가간 노파는 눈앞의 광경에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절대 부러지지 않을 날 선 칼과 같아 보이던 청년이, 여신상을 품에 안고 벽난로 앞에 주저앉은 채 조용히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고 있는 어린아이 같아 노파는 그가 안쓰러웠다. >그녀는 청년의 옆에 앉아 들썩이는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 >“걱정 말아라, 얘야.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 잘될 거란다.” > >그렇게 그가 진정될 때까지, 노파는 몇 시간이고 조용히 그의 곁을 지켜주었다. > > >땅거미가 진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림덴은 안정을 되찾았다. >아까의 상황 이후로, 그의 내면을 구속하던 억압의 벽에 결코 막을 수 없는 커다란 균열이 생겼다. >오랜 시간 어둠 속으로 침잠했던 기억들이 미약하나마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었다. >가족들의 웃음소리, >그들이 들려주던 자애로운 여신의 이야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결심했던 그 날의 각오, >여신의 사랑을 베풀고 싶었던 꿈. >비록 아주 작은 기억의 편린들 뿐이었지만, 그조차도 그에겐 너무나 충분하고 또 소중했다. >잃었던 자신을 되찾게 되었다는 사실이 메말랐던 그의 마음에 엄청난 환희와 기쁨을 안겨 주었다. > >하지만, 그는 이내 깨닫고 말았다. >자신의 손에는 너무나도 많은 이들의 피가 배어있었다. >비록 그가 원한 것은 아니었으나, 자신의 손에 수많은 목숨이 스러져간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온몸에 피 냄새가 나는 자신은 세상의 빛 아래 살 수 없는혐오스런운 존재였다. >그는 ‘그림자’였다……. >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그림덴은 다소 쉰 목소리로 노파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인도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것은 어린 시절 이후 처음이었다. > >“고맙긴요.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답니다.” > >노파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의 커다란 양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기울여, 떨고 있는 투박한 손을 꼭 잡았다. > >“비록 이젠 늙었지만 나도 한때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던 적이 있었답니다. >만일 청년이 허락한다면, 나는 청년을 위해 여신께 기도를 드리고 싶어요.” > >[[파일:grimden04.jpg]] > >상처 가득한 손으로 전해지는 작고 주름진 손의 따스한 온기. >그 온기가 두려워하고 망설이는 그림덴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용기를 주었다. > >짧은 침묵 끝에, 그는 자신의 가장 큰 두려움을 털어놓았다. > >“……저처럼 끔찍한 살인 기계도,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있을까요?” > >절박함과 괴로움이 뒤섞인 눈빛으로 그는 노파를 바라보았다. >뜻밖의 이야기에 그녀는 다소 놀란 모습이었다. >피로 얼룩진 자신의 본모습을 알게 된 노파가 곧 자신을 뿌리치고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보리라 생각한 그림덴은 두려웠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다르게 그녀는 결코 잡고 있는 손을 놓지 않았다. >노파는 그림덴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 >“청년, 나는 청년을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이 없어요. >청년이 끔찍한존재인지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있는 자인지 판단하는 것은 오직 신과 자기 자신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 것 인가에요. 당신이 선한 의지를 갖추고 남은 삶을 살아간다면, 늘 곁에 함께하시는 여신께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길을 인도하실 겁니다. >청년은 그저 주어진 삶을 살아가세요.” > >부드럽고도 결연한 전언. >모든 단어 하나하나가 그의 마음에 와닿아 구원을 안겨주었다. >견고한 갑옷처럼 그를 겹겹이 둘러쌌던 절망이, 마치 알의 껍데기가 깨지듯 초라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 >순간, 오두막 주변으로 수많은 기척이 느껴졌다. >이탈해버린 낙오자의 행적을 좇던 그림자들이 마침내 그가 있는 곳을 찾아낸 것이었다. >그들이 집안의 모든 상황을 지켜보면서, 자신을 완벽히 제압할 수 있는 최적의 순간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재빨리 카타마르가 놓인 위치를 확인했다. >적들은 자신이 무장하기 직전을 틈타 일시에 들이닥칠 것이 분명했다. >그림덴은 노파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 >“몸을 숨기세요.” >“무슨 일….” >“저를 노리고 온 겁니다. 할머니께서 여기에 휘말리셔선 안 돼요. >어서 몸을 숨기세요…!” > >노파가 고개를 끄덕이고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는 재빨리 칼이 있는 쪽을 향해 이동했다. >그와 동시에 오두막의 창문이 일제히 깨지고 검은 무리가 들이닥쳤다. >그림자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일격을 날렸다. >그림덴은 빠르게 후방으로 도약하여 적들의 급소를 베었다. >검은 형체들이 서로 뒤엉켜 오두막 안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 >“아악!” > >어디선가 노파의 비명이 들렸다. >다수의 거친 공세를 막아내고 있던 그림덴은 소리가 난 쪽을 향해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한 그림자가 숨어있던 노파를 발견해 거칠게 끌어내고 있었다. >지체할 새 없이 그림덴은 노파를 향해 달려갔다. >노파를 제압하고 있던 그림자를 단숨에 벤 그는, 정신을 잃은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갑자기, 팔 쪽에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칼에 베여 쓰러졌던 한 그림자가, 가까스로 최후의 일격을 박아 넣은 것이다. >그는 팔에 박힌 작은 단도를 빼냈다. 단도 끝에는 마비 독이 묻어있었다. > >‘젠장….’ > >몸이 급속도로 굳기 시작했다. >그는 노파를 보호하기 위해 애써 몸을 일으켜 자신을 둘러싼 그림자들과 대치했다. >하지만 약효를 버티지 못한 그는 그만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림자들은 그를 단단히 포박하여 둘러멘 후, 황폐하게 변한 오두막을 등진 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그림덴은 사역자들에게 끌려 자신의 어두운 방으로 돌아왔다. >인도자는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방안에 들어서자 인도자는 기쁘게 반겼다. > >“어서 오거라, 나의 냉혹하고 아름다운 무기여. > 네가 집에 돌아온걸 보니 참으로 기쁘구나.” > >그림덴은 오랜 세월 자신을 억압하고 망가트린 장본인을 증오 서린 눈으로 노려보았다. > >“그 눈빛은 마치 네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를 연상시키는구나. >넌 그때도 굽힐 줄을 몰랐지.” > >푸른 가면이 그를 향해 가까이 다가왔다. > >“지금까지 난 네 정신을 굴복시키기 위해 다른 자원에 비해 몇 배의 공을 들였다. >집단의 어떤 자들은 그냥 널 처분하자고 말하기도 했지. >분명, 수지타산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난 너를 포기하지 않았어. >끊임없이 저항하는 널 내 앞에 굴복시키는 것이 너무나도 즐거웠거든.” > >그림덴은 이죽대는 얼굴을 향해 거칠게 몸부림쳤다. > >“하지만 이렇게 긴 시간 공을 들였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널 완전히 복종시킬 수 없었지. >지금 이 순간까지도 네 안에는 여전히 나에게 저항하는 무언가가 남아있어. >그걸 어떻게 하면 영원히 꺾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 >인도자가 허공에 가볍게 손짓을 하자 곧 방 안으로 누군가가 끌려 왔다. >그림덴은 단번에 그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 >끌려온 자는 바로 자신을 도와준 노파였다. >비록 겁에 질린 듯했지만, 노파는 아무 데도 다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마음 깊이 안도하며 떨고 있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시선을 마주한 채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 >[[파일:grimden05.jpg]] > >"이 부인께서 내내 너와 함께 있었다지? 잃어버린 나의 무기를 보관하고, 친절하게 대해준 것에 대해 감사드리오, 부인.” > >인도자는 방 가운데에 내팽개쳐진 채 주저앉은 노파를 향하여 가볍게 묵례를 했다. > >“부인 덕분에, 무뎌져 녹슬어버린 검이 다시 최강의 병기로 태어날 것이오." > >인도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처 저항할 새도 없이 사역자들이 그림덴의 무릎을 꿇리고 목 뒤에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주사하기 시작했다. >강제로 주입된 그것은 혈관을 타고 빠른 속도로 전신에 퍼져 스며들었다. >잠시 뒤, 연옥의 화염에 불타는 듯한 고통이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에게 보이는 모든 것이 강렬하게 타오르는 빛으로, 들리는 모든 것이 저주 섞인 괴성으로 들려왔다. >참다못한 그림덴은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비명을 질렀다. >인도자는 그런 그의 주위를 맴돌며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뱉는 말들은 강렬한 속박이 되어, 엎드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림덴을 사정없이 짓눌렀다. >몸부림치는 그에게 오직 한 가지의 사념이 주입되고 있었다. >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 >노파는 이 끔찍한 광경 전부를 옆에서 생생히 지켜보고 있었다. >괴로워하는 청년의 모습은 차마 두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처절하고 참혹했다. >대체 얼마나 이런 고초를 견뎌온 것인지, 그녀는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문득 청년의 쓸쓸하고도 서글픈 질문이 떠올랐다. > >‘…… 저처럼 끔찍한 살인 기계도,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있을까요?’ > >이제서야, 그녀는 청년이 어떤 마음으로 그 말을 꺼냈을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가 짊어진 짐의 크기를 알지도 못한 채로, 주제넘게 어설픈 위로를 건넨 것이 노파는 못내 미안했다. >지금 당장 이 가엾은 영혼을 구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희생이 그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다면 그녀 자신은 이 자리에서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었다. >노파는 다급히 일어나 쓰러져있는 청년과 그를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는 악랄한 자의 사이를 양손으로 막아섰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자, 그는 마치 이런 상황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되려 청년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 >"자, 그림덴이여. 이 여자를 네 손으로 직접 죽여라!" > >일순간, 비명이 그치고 방안에 섬뜩한 침묵이 흘렀다. >바닥에 엎드려있던 검은 윤곽이 천천히 일어나 자신의 곁에 놓인 칼을 쥐었다. >그림자의 두 눈이 고통과 광기로 희번덕거렸다. >인도자는 희열에 찬 목소리로 다시 외쳤다. > >“그림덴이여, 어서 네 마지막 결함을 베어라. >네 알량한 의지의 잔해를 베어라. 네 진정한 적을 섬멸해라!" > >아무런 저항 없이, 그림자는 비틀대며 노파 앞에 우뚝 선 채 칼날을 높이 쳐들었다. >노파는 거친 숨을 내쉬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는 눈물과 피가 뒤섞여 흘러내리고 있었다. >생애 마지막 순간, 그녀는 가엾은 청년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싶었다. >두 손을 모으고 노파는 고개를 숙였다. > >"...!" >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날카롭게 방안에 울렸다. >그리고 뒤이어 무언가 풀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 >노파는 기도를 멈추고 눈을 떴다. >쓰러진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 > >그림덴은 기괴한 자세로 널브러진 인도자와 사역자들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긴 세월 동안 그를 지배했던 주인과 수하들은, 한 마디 유언조차 남기지 못한 채 자신이 키우던 개의 손에 명줄을 다했다. >그들의 최후는 그저 허무하고 또 허무했다. > >노파는 그림덴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고통의 잔상이 남아 있는 듯 그는 여전히 괴로워 보였다. >노파는 그의 손을 잡았다. > >“자, 돌아가자꾸나.” > >잠시 후, 노파를 등에 업은 채 그림덴은 그가 수백 번도 더 다녔던길고 긴 통로를 달렸다.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그림자들을 그는 무서운 속도로 베고 또 베었다. >그림자들을 섬멸하며 그는 철문들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열었다. >과거의 자신처럼 어딘가에서 납치되어온 아이들이 방에서 쪼르르 뛰쳐나와 밖으로 향하는 문을 향해 달려나갔다. >아이들 모두가 안전하게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후, 그는 주변에 놓여 있던 화톳불을 쓰러트렸다. >불은 기둥을 타고 올라가 삽시간에 공간 전체로 번지기 시작했다. >검고 매캐한 연기가 통로를 가득 메웠다. >그를 추격하던 그림자들이 연기 속에서 우왕좌왕하다 화마에 휩쓸리는 사이, 그림덴은 노파와 함께 탈출구로 향했다. > >탈출구는 활짝 열려 있었다. >열린 문 사이로 따스한 햇볕과 부드러운 바람이 느껴졌다. >이곳에서 겪었던 모든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언젠가의 그 날처럼, 그는 여전히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딘지 기억해낼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망설이는 손을 잡고 빛으로 이끌어주는 사람이 곁에 함께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발을 떼 문턱을 넘어섰다. > >마침내 그는 자신을 속박하던 모든 것에서 벗어났다. > >- >그림덴은 노파와 함께 그녀의 작은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그는 노파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그녀의 곁에 머무르며 오두막을 고치는 것을 도왔다. >갈 곳 없는 그에게 노파는 기꺼이 보금자리를 내어주었고, 곧 노파와 그림덴은 서로를 어머니와 아들처럼 여기며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는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며 망가져 버린 정신을 점차 회복해나갔다. >오랜 기간에 걸쳐 다양한 방법을 통해 세뇌된 만큼, 그가 보통의 사람만큼 회복되어 자신을 찾아가는 데에는 이후로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지만, 노파는 곁에서 늘 함께하며 그가 회복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잃어버린 그의 세월을 보상하기라도 하듯 행복한 추억이 점점 늘어났다. >새로운 경험이 쌓일수록 소실되었던 과거의 기억도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속에 언젠가 잃어버린 가족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싹텄다. > >시간이 더 흘러 몸과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그림덴은, 마침내 자신의 어두운 과거와 마주할 용기를 냈다. >노파의 오랜 설득 끝에 그는 속죄를 위해 자신의 ‘재능’을 이용해 사람들을 돕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오랜 시간 찾지 않았던 자신의 장비와 무기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모두 한때는 그의 몸과도 같았던 것들이었다. >흰 천 사이로 비추는 서늘한 금속은 여전히 피로 벼려져 살기를 띤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칼날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이 칼로 베었던 수많은 생명은 결코 돌아오지 않으며, 저지른 죄 >또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자신은 어린 날의 꿈처럼 여신의 사랑을 베푸는고결한 자가 영원히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칼에 선한 의지를 담아 소중한 것을 구하고지켜낼 수 있다면, 그렇게 자신의 죄가 조금이나마 속죄될 수 있다면 그는 그걸로 족했다. > >마침 그림덴은 근처의 마을 용병단에서 용병을 모집하고 있다는 공고를 보았다. >그곳은 과거는 묻지 않으며 그저 능력 있는 자들이면 가리지 않고 받아 준다고 했다. >그는 용병단에 입단하는 것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할 만한 좋은 기회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 >다음 날, 그림덴은 노파의 배웅을 받으며 정든 오두막을 떠났다. >카타마르를 허리에 단단히 둘러매고 그는 콜헨 마을로 향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는 모르지만, 그는 무엇이든 받아들일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 >>글 : 시트롬 / 그림 : jin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그림덴, version=61, paragraph=2)] [[분류:마비노기 영웅전/캐릭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