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금관총)] [[파일:금관총 금동신발2.jpg]] 금관총 금동신발 완형 [[http://www.ksngn.net/news/articleView.html?idxno=19933|사진 출처 : 전남목포신문 - 43년 만에 경주 신라 고분에서 금동 신발 다시 출토]] [[파일:금관총 금동신발3.jpg]] 금관총 금동식리 바닥 [[http://www.ksngn.net/news/articleView.html?idxno=19933|사진 출처 : 상동]] [목차] == 개요 ==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 [[경상북도]] [[경주시]] 노서동의 [[이사지왕]]의 무덤인 [[금관총]]에서 출토된 고[[신라]]시대 금동 [[신발]] 2쌍. 현재 2쌍 모두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내용 == [[파일:금관총 금동신발1.jpg]] [[https://artsandculture.google.com/asset/_/bAH3h6zBQwieug|사진 출처 : Google Arts & Culture -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노서동 금관총 금동신발]] || [[파일:금관총 금동신발5.jpg|width=450]] || [[파일:금관총 금동신발6.jpg|width=450]] || |||| [[금관총 관모]]와 금동신발 복원품의 모습. [[https://blog.naver.com/vouny/222154922578|사진 출처]] || 길이 342mm 1921년 [[금관총]]에서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 등의 여러 황금 유물들과 함께 발견된 고대 [[한국]]의 금동신발 두 켤레로, 제작 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대략 5세기 경(서기 400년대)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금관총에서는 순금제[[귀걸이]], 금제와 은제 [[팔찌]], [[반지]] 등과 각종 [[구슬]], 금제와 은제의 [[허리띠]], 금동제[[신발]] 등의 각종 장신구를 비롯하여, [[도검]], [[갑옷]](甲胄), 창신(槍身), 쇠화살촉(鐵鏃), 쇠도끼(鐵斧) 등의 무기류와 말안장금구, 말방울, 말띠장식, 교구, 혁대금구 등의 [[말갖춤]]류(馬具類), [[신라토기]], 목칠기, 유리용기, 쇠솥(鐵釜), 금속제용기, 조개제품 등 많은 유물들이 부장되어 있었는데, [[곡옥]](曲玉)을 포함한 각종 구슬류만도 무려 3만 점이 넘었으며, 다른 유물까지 합쳐 약 4만점이 넘는 신라시대 화려한 문화재들이 쏟아져 나왔다.[[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32422&cid=42665&categoryId=42666|한국 미의 재발견 - 고분미술 : 금관총]] [[파일:금관총 금동신발4.jpg]] [[파일:황남대총 북분 고구려식 금동못신3.jpg]] 당시 금관총에는 총 2켤레의 금동신발이 발견되었다. 첫번째로 완형을 이루고 있는 금동신발은 [[황남대총 남분 금동신발]]과 비슷하게 전형적인 신라식 금동신발 형태를 하고 있으며, 내부에는 천을 부착했던 흔적이 있다. 피장자에 발치에서 출토된 것을 볼 때 시신에 직접 신겨져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두번째로 [[황남대총 북분 고구려식 금동못신]]처럼 바닥만 남아있는 식리는 금관총의 주인인 [[이사지왕]]이 직접 신고 있던 것은 아니며, 신발 바닥 아래에 [[꽃]] 문양을 한 스파이크를 박아넣었다. 이를 토대로 상기 논문에서는 이 신발이 [[고구려]] 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추측 단계에만 머무르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으로부터 1,600여년 전에 만들어진 [[한국]]의 금동신발 2쌍으로, 당시 [[신라]]의 금속공예술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분류:신라의 금제유물]] [[분류:국립경주박물관 소장품]] [[분류:경주시의 문화재]] [[분류:금관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