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국가(노래))] [include(틀:일본 관련 문서)] [목차] [clearfix] == 개요 == || {{{+1 '''{{{#fe0000 [ruby(君, ruby=きみ)]が[ruby(代, ruby=よ)](임금의 치세)}}}'''}}} ||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youtube(kZ49aHNLQS8)]}}} || '''기미가요([ruby(君, ruby=きみ)]が[ruby(代, ruby=よ)])'''는 [[일본]]의 [[국가(노래)|국가]]이다. 본래의 가사는 고대 [[일본]]에서 기원한 단가로, 제목은 임금의 치세, 군주의 치세 정도의 뜻이다. [[1880년]] [[독일]]의 작곡가인 [[프란츠 에케르트]][* 사실 한국과의 인연이 더 깊은 인물인데 [[대한제국]]의 [[대한제국 애국가|애국가]] 작곡을 담당했고 한국에서 활동하다가 사망하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다.]에 의해 기존의 단가 가사를 기반으로 작곡이 이루어져 [[1888년]]부터 [[일본 제국]] 시기 [[국가(노래)|국가]]로 쓰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공식적인 국가의 지위를 잃었으나 사실상의 국가 역할을 유지하였고, [[1999년]]에 제정된 「국기 및 국가에 관한 법률」에 의해 법적인 국가로 재지정되었다. == 역사 == ===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 기미가요는 가사가 먼저 만들어졌고 곡은 나중에 붙었다. 912년 편찬된 '고금 화가집(古今和歌集)'[* 화가는 일본 고유 시가 형식의 하나로 한국으로 치면 향가나 시조에 해당한다. 기미가요는 이러한 화가 1천111수를 모은 고금 화가집에서의 343번째 노래이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4462618|#]]]에 익명의 단가로 처음 등장하였는데, 이후 여러 문헌에 수록되며 장수를 기원하는 노래로서 신분에 관계없이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사랑받았다. 처음 등장했을 때는 '[ruby(君, ruby=きみ)]が[ruby(代, ruby=よ)]は(기미가요와)'로 시작되는 현재의 형태와 달리 '我が君は(와가기미와)'라는 가사로 시작했다.[* [[https://books.google.co.kr/books?id=73sE6NkXPbAC&q=Japanese+flag+homes&pg=PA81&redir_esc=y#v=onepage&q=Japanese%20flag%20homes&f=false|Case Studies on Human Rights in Japan(1996), 78쪽]]] 이 첫 가사는 [[가마쿠라 시대]]에 변경되었으며, 나머지 가사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기미가요는 [[생일]]과 같은 공적인 행사에 불려졌기 때문에 [[19세기]]까지 악보가 없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Kimigayo#History|"The first lyrics were changed during the Kamakura period, while the rest of the lyrics stayed the same. Because the lyrics were sung on formal occasions, such as birthdays, there was no sheet music for it until the 19th century."]]] 기미가요는 [[가마쿠라 시대]] [[사무라이]]들 사이에서 축제곡으로 쓰이다가 [[에도 시대]]에 큰 인기를 끌었다. [[에도 시대]] 후기에는 오오쿠[* [[에도 성]]의 혼마루 구역에서 [[쇼군]]의 처첩, 생모, 자녀 및 시녀들이 거처하던 곳이다.]와 사쓰마번[* 지금의 [[가고시마현]].]에서 평범한 명절 노래로 사용되었으며, 그런 맥락에서 당시 '기미'는 [[천황]]이 아니라 [[에도 막부]]의 지배층인 도쿠가와 쇼군, 사쓰마 한의 지배층로서의 시마즈 가문, 귀빈 또는 축제 참여자들을 의미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기미가요가 일본 제국의 국가로 채택된 후부터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 제국이 패전할 때까지 기미가요는 일본의 주권자인 천황의 긴 재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지만, [[1947년]] [[일본국 헌법]]이 시행되면서 천황은 더 이상 신의 권리로 나라를 통치하는 주권자가 아니라 국가와 국민 통합의 상징인 인간이 되었다.[* [[https://books.google.co.kr/books?id=FrwMHKDPUzQC&q=kimigayo&pg=PA126&redir_esc=y#v=snippet&q=kimigayo&f=false|Citizenship Education and Lifelong Learning: Power and Place, 126쪽]]]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youtube(wZHsKd8HX8o)]}}} || || '''존 윌리엄 펜튼의 기미가요''' || [[메이지 유신]] 이전의 일본에는 여느 동양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국가(노래)|국가]](國歌)라는 개념이 없었다. 같은 해 [[요코하마시|요코하마]]에서 근무했던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 영국군 군악대 지휘자인 존 윌리엄 펜튼은 이렇듯 일본에 국가가 없다는 것을 알고 가사만 제공한다면 자신이 음악을 작곡하겠다고 제안했다. 이후 일본, 중국 역사와 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가고시마현]]의 포병 대위인 오야마 이와오에게 국가를 위한 적절한 가사를 선택해 달라고 요청해 가사를 붙였고 작곡에 2~3주, 리허설에 불과 며칠의 시간이 주어진 펜튼은 [[1870년]] [[메이지 덴노]] 앞에 국가를 선보였다. 이것이 첫 번째 '기미가요'였다. 하지만, 촉박한 시간 내에 작곡된 이 첫 번째 기미가요는 장엄함이 부족함과 동시에 일본어를 하지 못했던 작곡가의 한계로 부르기가 어려워 이후 수정하였다.[* [[https://www.mk.co.kr/premium/behind-story/view/2014/01/4421/|우리가 몰랐던 각국 國歌에 숨은 얘기]] [[https://www.japantimes.co.jp/news/1999/08/05/national/identity-of-kimigayo-composer-remains-mystery/|hIdentity of 'Kimigayo' composer remains mystery]]] 위 영상에서 연주되는 펜튼이 작곡한 버전은 현재도 여전히 매년 펜튼이 군악대장으로 활동했던 요코하마의 묘코지 사원에서 공연된다. 이후 [[1876년]] 해군 군악대 지휘자 나카무라 수케츠네는 해군에 음악을 바꾸기 위한 제안서를 제출했고, 그의 제안에 따라 새로운 멜로디는 황실 정원에서 연주되던 곡에서 사용되었던 형식을 반영하기로 했다. 이후 제안서를 제출했던 나카무라 수케츠네와 육군 군악대 지휘자였던 오츠모토 오시토요 등이 주도해 [[독일]]의 작곡가인 [[프란츠 에케르트]][* [[대한제국]]의 국가인 [[대한제국 애국가]]의 작곡도 담당했다.]에게 국가를 만들어 달라는 의뢰를 하게 된다. 프란츠 에게르트는 당시 일본 궁내성(현 궁내청) 아악과 직원인 하야시 히로모리(林廣守)가 붙인 선율을 완성하여 기미가요를 작곡하였고, 이 기미가요는 [[1880년]] [[11월 3일]] 메이지 덴노의 생일에 황궁에서 처음으로 연주되었으며, 이것이 오늘날 '기미가요'의 시초이다.[*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295100021&ctcd=C09|일본서 버려진 기미가요 작곡가 서울 양화진에 묻혀 있다]] [[https://www.mk.co.kr/premium/behind-story/view/2014/01/4421/|우리가 몰랐던 각국 國歌에 숨은 얘기]]] 일본 제국 정부는 [[1888년]] 에케르트의 기미가요를 공식적으로 국가로 채택했다. [[20세기]] 들어 기미가요는 [[천황]]을 기리는 사상과 밀접하게 연관되기 시작했다. [[1904년]] 오사카 신문에서는 기미가요가 일본 국가 전체가 아닌 일본 황실을 위한 노래라는 의견이 등장했고,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인 우치무라 칸조는 20세기 초 '기미가요는 천황을 찬양하는 데 목적이 있다'며 일본의 국가가 아니라고 밝혔다. 칸조는 나라의 국가는 신성한 천황의 감정이 아니라 민중의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막상 당시 일본인들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축하 행사가 급증하기 전까지 기미가요라는 국가에 친숙하지 못했는데, 신문들은 기미가요를 해외에서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다른 일본인들을 비판했다.[* [[https://books.google.co.kr/books?id=r8IDxzZ4SQIC&q=kimigayo&pg=PA36&redir_esc=y#v=snippet&q=kimigayo&f=false|State Making in Asia, 36쪽]] [[https://books.google.co.kr/books?id=73sE6NkXPbAC&q=Japanese+flag+homes&pg=PA81&redir_esc=y#v=onepage&q=Japanese%20flag%20homes&f=false|Case Studies on Human Rights in Japan(1996), 79쪽]]]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은 일본 본국과 식민지의 학생들이 매일 아침 기미가요를 부르며 [[쇼와 덴노]]에게 경례를 하도록 하였는데, 동시기 [[일제강점기]]였던 조선 또한 이러한 기미가요 제창이 강요되었기 때문에 이 시대에 학교를 다녔던 노인들 중 일부가 지금까지도 기미가요를 쉽게 부를 수 있다.[* [[https://www.newstof.com/news/articleView.html?idxno=12060|도쿄올림픽에서 일본 국가 '기미가요' 부르면 논란거리?]]]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youtube(vblF1jEeH0U,start=33)]}}} || || '''쇼와 덴노의 무조건 항복 선언 중 기미가요''' ||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본방송협회|NHK]] 라디오에서 아나운서가 '천황 폐하께서 말씀하십니다.'라고 발언한 뒤 기미가요가 흘러나왔고, 이후 [[쇼와 덴노]]가 전 세계를 향해 [[옥음방송]]을 통해 [[일본의 항복|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2차 대전과 더불어 일본 제국 시대의 종식을 알렸다. === 종전 이후 ===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패전한 후 [[연합군 점령하 일본|GHQ]]는 기미가요에 큰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지 않아 일본 정부에 사용을 제한하는 조치를 내리지 않았으며, 이는 같은 시기 사용이 통제된 [[일장기]]와는 다른 규정이었다. 오히려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학교에서 기미가요를 사용하도록 독려하면서 [[일본방송협회|NHK]]는 프로그램의 시작과 끝에 이 노래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https://books.google.co.kr/books?id=73sE6NkXPbAC&q=Japanese+flag+homes&pg=PA81&redir_esc=y#v=onepage&q=Japanese%20flag%20homes&f=false|Case Studies on Human Rights in Japan(1996), 81쪽~82쪽]]] 이후 기미가요는 [[일장기]]와 마찬가지로 법적 지위와는 관계없이 [[경로의존성|경로의존적]] 형태로 20세기 내내 공식적-비공식적인 일본의 상징으로서 사용되었다.[* [[https://www.earticle.net/Article/A102145|Performing Kimigayo : Japanese National Anthem and the Sonorous Undoing of the Collective Voice]]] 일본 [[문부성]]은 종전 이후 관할 학교에서 일장기와 기미가요의 사용을 독려하기 위한 성명과 규정을 발표했다. 이 중 첫 번째 조항은 일본이 아직 GHQ의 통제를 받던 [[1950년]]에 발표되었는데, 이는 일장기와 기미가요 두 개 모두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필수는 아니라는 것을 골자로 하는 권고 사항이었다. 이후 이 두 가지 상징들은 국경일 혹은 의례 행사 시 학생들에게 국경일 교육과 안보 교육에 도움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모두 포함하도록 확대되었으며, 당시 문부성은 두 상징들이 모두 정식적인 법으로 제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큰 조치를 취했을 뿐만 아니라, 기미가요를 단순 '노래'라고 지칭하며 [[국가(노래)|국가]](國歌)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1977년]]이 되어서야 문부성은 기미가요를 일본의 국가라고 부를 수 있었다.[* [[https://books.google.co.kr/books?id=73sE6NkXPbAC&q=Japanese+flag+homes&pg=PA81&redir_esc=y#v=onepage&q=Japanese%20flag%20homes&f=false|Case Studies on Human Rights in Japan(1996), 81쪽~83쪽]]] [[1989년]]에는 학습지도요령이 개정되면서 입학식과 졸업식에서 국기([[일장기]]) 게양과 국가(기미가요) 제창이 의무화되었는데, 이를 따르지 않는 학교 관계자들에 대한 징계 처분 또한 1989년 개정 당시 함께 제정되었다.[* [[https://www.yna.co.kr/view/AKR20190330045300073|ILO, 日교원 대상 국기 게양·국가 제창 강요에 시정 권고]] [[https://books.google.co.kr/books?id=73sE6NkXPbAC&q=Japanese+flag+homes&pg=PA81&redir_esc=y#v=onepage&q=Japanese%20flag%20homes&f=false|Case Studies on Human Rights in Japan(1996), 81쪽~83쪽]]] 한편, 2022년에 최고재판소가 기립 제창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재임용에서 탈락한 전직 교사가 제기한 소송에서 지방자치단체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https://www3.nhk.or.jp/news/html/20220617/k10013677091000.html|#]] == 음악적 특징 == 노래가 총 11마디로 굉장히 짧다. 또 [[장조]]로 작곡된 국가치곤 분위기가 상당히 어두운 것도 특징이다.[* 이러한 이유로 [[대한민국]], [[중국]] 등 [[반일]] 감정이 강한 국가에서는 [[장송곡]] 같다는 비하가 존재하며 일본 내에서도 기미가요의 음악적 특징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존재한다.] 아무래도 [[가가쿠|아악]]의 형태를 기본으로 만들다 보니 일본적인 느낌이 강하다. 실제로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나가노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는 [[궁내청]] 아악부가 아악으로 기미가요를 연주했다. 일본 민족주의자들은 일본의 전통 선율을 국가에 담았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참고로 [[혐한]] 세력이 [[애국가]]를 비하할 때 쓰는 주요 래퍼토리가 서양의 국가들을 어설프게 따라한 노래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애국가도 [[국악]] 연주 버전이 있는데 국제 대회에서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 및 폐막식에서 연주되었다.] 한편 요나누키 음계를 기반으로 만든 선율에 서양 화음을 끼워 넣은 것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며 음악적인 시각에서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실제로 <기미가요>를 들어보면 처음과 끝 2마디는 화음 없이 그냥 평범한 주선율의 유니즌(동음)으로만 처리했는데, 이에 대해서 일본 전통 음악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외국인 에케르트가 서양 화성법만으로는 해당 마디들에 코드를 끼워 넣을 수 없어서 썰렁하게 남겨 놓았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이러한 비판적 시각으로 유명한 이로는 작곡가 겸 지휘자 아쿠타가와 야스시가 있다. 한국에도 <나의 음악 이야기>로 번역본이 나온 음악 에세이집에서 2차례나 언급되며 이를 비판한다. == 가사 == {{{#!wiki style="word-break: keep-all"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radial-gradient(circle, #fe0000 16%, #FFF 16%)" '''{{{#fff 기미가요[br][ruby(君, ruby=きみ)]が[ruby(代, ruby=よ)]}}}'''}}} || || '''{{{#fe0000 [ruby(君, ruby=きみ)]が[ruby(代, ruby=よ)]は}}}''' || || '''{{{#fe0000 키미가요와}}}''' || || '''{{{#fe0000 임의 시대는}}}''' || || || || '''{{{#fe0000 [ruby(千代, ruby=ちよ)]に[ruby(八千代, ruby=やちよ)]に}}}''' || || '''{{{#fe0000 치요니 야치요니}}}''' || || '''{{{#fe0000 천 대에 팔천 대에}}}''' || || || || '''{{{#fe0000 さざれ[ruby(石, ruby=いし)]の}}}''' || || '''{{{#fe0000 사자레 이시노}}}''' || || '''{{{#fe0000 조약돌이}}}''' || || || || '''{{{#fe0000 いわおとなりて}}}''' || || '''{{{#fe0000 이와오토 나리테}}}''' || || '''{{{#fe0000 바위가 되어서}}}''' || || || || '''{{{#fe0000 [ruby(苔, ruby=こけ)]のむすまで}}}''' || || '''{{{#fe0000 코케노 무스마데}}}''' || || '''{{{#fe0000 이끼가 낄 때까지}}}''' ||}}} == 해석 == 작자가 미상인지라 일본 내에서도 해석이 분분하다. 특히 문제가 되는 해석은 '君が代' 라는 부분. '君(그대)'가 누구를 가리키느냐에 따라 노래의 성격 자체가 바뀌기에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또한 '작은 돌이 바위가 되어서' 이 구절은 작은 조약돌이 [[퇴적|뭉쳐져서]] 큰 바위를 이룰 시간만큼 오랜 기간을 뜻한다.[* 지질학적으로만 보았을 때, 퇴적으로 인해 암석이 유의미하게 커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수천 년 단위이기 때문에 저 시가의 내용이 허황된 것만은 아니다.] 신령한 돌은 자라날 수 있다는 [[애니미즘]]적 관념이 전재된 표현이라는 해석도 있다. 일단 본 항목의 번역에서는 '君'를 임금으로 해석했지만 사실 일본에서 君은 임금만 가리키지는 않았다. 천황을 가리키는 '大君(오키미)'라는 말이 있긴 했지만 천황의 권력이 약해지면서 이 말은 점차 사용빈도가 줄어들었고, 기미가요의 가사가 등장한 [[헤이안 시대]]에 君라는 단어가 단순히 경애하거나 친밀한 사람을 부르는 말로 바뀌어서 지금에 이른다. 예를 들어 한때 천황을 가리키는 大君라는 단어를 [[겐지모노가타리]]에서는 여자 꼬시는 말로 사용했다. 또한 '君が代'라는 가사도 고금화가집에 실렸던 원본의 가사인 '我が君'가 후대에 들어서 바뀐 것이다. 시대상을 감안하면 'Oh my baby'라는 기름진 해석도 가능하다. 이러한 이유로 연인에게 바치는 사모곡이라는 설, 어르신에게 바치는 장수기원곡이라는 설, 주군([[천황]] 혹은 [[쇼군]])에게 바치는 곡이라는 설, [[태평성대]]가 오래 가기를 기원하는 곡이라는 설, 심지어는 장례곡이었다는 설 등 온갖 추측이 있다. 현재로선 연장자를 축하한다는 설이 유력하고, 기미가요의 원곡이라 할 수 있는 10세기 헤이안 시대 고킨와카슈 또한 천황과 별로 연관이 없다. 그래서 고전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은 기미가요가 천황 찬가라는 말을 들으면 오히려 싫어하기도 한다. 이들은 전통적인 가사가 제국주의 시대에 변질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 관련 노래 == [[후쿠오카시|후쿠오카]] 지방에 바위의 신을 모시는 시카우미 신사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 기미가요와 가사가 거의 흡사한 데다 흔히 알려진 가사보다 훨씬 더 길다. 게다가 노래가 천여 년 전부터 전해져 내려왔으므로 원래 기미가요는 이곳의 제사의식용 노래였다는 설도 존재한다. {{{#!wiki style="word-break: keep-all" || '''{{{#fff 야마호메마쓰리, 가구라우타[br][ruby(山, ruby=やま)][ruby(誉, ruby=ほ)]め[ruby(祭, ruby=まつり)]、[ruby(神楽, ruby=かぐら)][ruby(歌, ruby=うた)]}}}''' || ||'''{{{#fe0000 君が[ruby(代, ruby=だい)]は 千代に八千代に さざれいしの いわおとなりて こけのむすまで}}}''' || ||'''{{{#fe0000 あれはや あれこそは 我君のみふねかや うつろうがせ[ruby(身, ruby=み)][ruby(骸, ruby=がい)]に[ruby(命, ruby=いのち)] [ruby(千, ruby=せん)][ruby(歳, ruby=ざい)]という}}}''' || ||'''{{{#fe0000 花こそ 咲いたる 沖の[ruby(御, ruby=おん)][ruby(津, ruby=づ)]の汐早にはえたらむ[ruby(釣, ruby=つる)][ruby(尾, ruby=お)]にくわざらむ 鯛は沖のむれんだいほや}}}''' || ||'''{{{#fe0000 志賀の浜 長きを見れば 幾世経らなむ 香椎路に向いたるあの吹上の浜 千代に八千代まで}}}''' || ||'''{{{#fe0000 今宵夜半につき給う 御船こそ たが御船ありけるよ あれはや あれこそは 阿曇の君のめし給う 御船になりけるよ}}}''' || ||'''{{{#fe0000 いるかよ いるか 汐早のいるか [ruby(磯, ruby=いそ)][ruby(良, ruby=ら)]が崎に 鯛釣るおきな}}}''' ||}}} === 기미가요 행진곡 === [include(틀:일본군)] [youtube(o-Y2KeYf0I4)] [[일본 제국]] 시대에 실제 [[군가]]로 편곡한 바 있다. 행진곡풍의 반주에 기미가요의 가사와 멜로디를 삽입했다. 일제가 불렀을 때에는 일본이 제국주의, 군국주의 사상에 물들었기에 가사의 君는 사실상 천황을 의미하는 것이 확실하다. 또한 2절의 곡은 '황국을 지키리(皇国の守り)'라는 군가이다. {{{#!wiki style="word-break: keep-all" ||<-2> '''{{{#fff 기미가요 행진곡[br]君が代行進曲}}}''' || ||'''{{{#fe0000 君が代は}}}''' ||'''{{{#fe0000 임의 대는}}}''' || ||'''{{{#fe0000 千代に八千代に}}}''' ||'''{{{#fe0000 천년 만년}}}''' || ||'''{{{#fe0000 細れ石の}}}''' ||'''{{{#fe0000 작은 조약돌이}}}''' || ||'''{{{#fe0000 岩となりて}}}''' ||'''{{{#fe0000 큰 바위가 되어}}}''' || ||'''{{{#fe0000 苔の生す迄}}}''' ||'''{{{#fe0000 이끼가 낄 때까지}}}''' || ||<-2> || ||'''{{{#fe0000 来たれや来たれやいざ来たれ}}}''' ||'''{{{#fe0000 오거라 오거라 자아, 오거라}}}''' || ||'''{{{#fe0000 皇国を守れや諸共に}}}''' ||'''{{{#fe0000 모두 함께 황국을 지켜라}}}''' || ||'''{{{#fe0000 寄せ来る敵は多くとも}}}''' ||'''{{{#fe0000 몰려오는 적의 수가 많을지라도}}}''' || ||'''{{{#fe0000 恐るゝ勿れ怖るゝな}}}''' ||'''{{{#fe0000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워 마라}}}''' || ||'''{{{#fe0000 死すとも退く事勿れ}}}''' ||'''{{{#fe0000 죽더라도 물러서지 마라}}}''' || ||'''{{{#fe0000 皇国の為なり君の為}}}''' ||'''{{{#fe0000 황국을 위해서이자 임을 위해}}}''' || ||<-2> || ||'''{{{#fe0000 君が代は}}}''' ||'''{{{#fe0000 임의 대는}}}''' || ||'''{{{#fe0000 千尋の底の}}}''' ||'''{{{#fe0000 수많은 밑바닥}}}''' || ||'''{{{#fe0000 細れ石の}}}''' ||'''{{{#fe0000 작은 조약돌과}}}''' || ||'''{{{#fe0000 鵜のゐる磯と}}}''' ||'''{{{#fe0000 물가에서 가마우지가}}}''' || ||'''{{{#fe0000 現るゝ迄}}}''' ||'''{{{#fe0000 나타날 때까지}}}''' ||}}} == 정치적 논란 == 기미가요가 정치적으로 문제시 되는 이유는 [[일본 제국]]의 상징이라는 것과 [[천황]]에 대한 예찬가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욱일기]]가 문제시되는 이유와도 일맥상통한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는 [[조선인]]들을 일본의 신민으로 만들기 위한 정책을 위해 하루에 1번 이상, 또 각종 모임이나 학교 조회시간 때 [[일장기]] 게양과 경례 뒤에 반드시 이 노래를 부르게 했다. 일본의 가사인 기미가요를 당당히 불러야 한다는 것으로 일본에서는 학교 등에서 <기미가요>를 부르도록 강요했다. 그래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국가 제창이 없었다. 그런데 정작 일본 극우들도 이 노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노래에 힘이 없고 가사가 짧다는 것[* 실제로 기미가요는 세계에서 가장 짧은 국가이다.]이 그 이유이다. 오히려 일본 극우들은 [[대동아결전의 노래]]를 국가로 바꾸길 희망한다. 물론 실제로 일본이 이 음악을 국가로 변경할 가능성은 없는데, 여러 가설이 분분한 기미가요와 달리 이 음악은 완전한 군국주의 찬양곡이기 때문이다. 전후 일본에서 <기미가요>의 국가화와 제창은 [[자민당(일본)|자민당]]이 『국기 및 국가에 관한 법률』을 [[1999년]]에 통과시키면서 기미가요 일본의 공식 국가로 재지정된 이후이다. 그 전까지는 [[학교]] 등에서의 제창이 필수적이지 않았고 이 노래를 잘 모르는 일본인들도 많았다. 참고로 이 법령의 제정은 일본 안에서도 반대세력과 많은 대립이 있었다. 특히 행사에서 [[일장기]]와 <기미가요> 제창을 의무화하는 교육현장에서 일이 터지는 경우가 잦았다. <기미가요>의 국가 제정 초기에는 역사적 배경이나 [[좌익]] 계열 정치인들의 반대 등으로 일본 내에서도 '이걸 국가로 해도 좋은가.' 하는 의견들이 있었으나, [[도쿄도]] 교육위원회는 2003년 10월부터 학교행사 때 국기게양과 기미가요 제창을 의무화하고, 이를 어기는 교사에게는 [[징계]]를 내리기로 하였다. 2011년 6월에는 [[오사카]] 의회가 '기미가요' 제창시 교직원의 기립을 의무화하는 내용의 조례를 통과시켰다. 이렇게 기미가요를 [[학교]] 등에서 강제하기 시작한 기간이 오래 지나고 자연스럽게 해당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한 세대들이 늘어나면서 이제는 정치적인 이유로 노래 부르기를 꺼린다든가 가사를 모른다든가 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국가로 자리를 잡아 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오키나와현]]의 민족단체라든가 [[재일 한국-조선인]] 단체라든가 일본 내 일부 좌파라든가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연예인들이 [[일본프로야구|프로야구]] 개막식 등에서 <기미가요>를 노래하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기미가요>를 국가로 제창하는 [[교육]]을 강제로 받기 시작한 세대가 20대, 30대로 접어들면서 굳이 제창은 하지 않더라도 일본 국민 중에서 <기미가요>의 가사를 모른다는 소리를 했다가는 되레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정도로 2000년도 후반 무렵부터 <기미가요>는 일본 내에서 국가로 자리잡아 버렸다. 일본에서 <기미가요>에 거부감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되어 버렸다. 기미가요를 정착시키기 위해 법률을 제정하고 학교에서의 교육을 의무화한 [[자민당(일본)|자민당]]의 전략이 성공한 셈이다. <기미가요>를 국가로 사용하는 것을 두고 당시 일본 국내에서도 갑론을박 하던 주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긍정적인 의견 * 국가(国歌)로서 불려져 왔던 [[메이지 시대]]부터의 전통을 중시해야 한다. * 정치적 배경과는 상관이 없는 일본 풍의 곡이기에 국가로서 적합하다. * 국민은 애국심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기미가요>를 부름으로써 그 의식을 갖춘다. * 부정적인 의견 * 구 일본 제국의 국가였다. * 가사가 천황 숭배로 해석될 여지가 있어 시대상과 맞지 않다. 또한, <기미가요>에 대한 대표적인 일본 정치계 인사들의 의견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간 나오토]] 전 [[일본국 내각총리대신|내각총리대신]]이 [[후생노동성|후생대신]](한국의 [[보건복지부장관]])을 맡던 시절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기미가요에 대해서 '좀 더 밝은 노래여도 좋을 것 같다. 가사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한 번 논의를 해보는 게 좋겠다'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또한 2004년 도쿄에서 행해진 [[아키히토]] 천황과의 가든파티에 참석, 천황과 담화 중 학교 현장에서의 [[일장기]] 게양과 <기미가요> 제창에 대해서 '강제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습니다'라고 발언했다.[* 정치적 발언이 극도로 제한된 천황의 입장에서는 이 정도도 상당히 수위 높은 발언이다.] [[2016 리우 올림픽]] 폐막식 때, 차기 하계올림픽 개최국인 [[https://youtu.be/ssc5eLjLoMQ?t=6500|일본의 홍보공연]]에서 오프닝 음악으로 기미가요를 사용하였다. 마찬가지로 [[2020 도쿄 올림픽]] 개막식에서도 국기 게양과 동시에 연주되었다.[* 이전에도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폐막식과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 때도 기미가요가 사용되었다.] 지난 20년간 졸업·입학식 등에서 일장기에 대한 기미가요 제창을 거부해 징계받은 교직원이 484명에 달한다.[[https://m.yna.co.kr/view/AKR20231024086100073?section=international/all|#]] === 한국에서의 인식 === 한국에는 기미가요 자체가 일제의 잔재라는 시각이 있으며 이에 따라 국가를 부른 이력이 있는 인물에 대해 대개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이런 대중적인 인식과 별개로 노년층 중에는 기미가요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존재한다. 2014년 10월 27일 [[JTBC]] 예능 [[비정상회담]]에서 일본인 패널의 입장 장면에 기미가요를 [[BGM]]으로 내보내어 크게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비정상회담 기미가요 삽입 사건]] 문서 참고. [[2023년]] [[2월 16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16일 밤 [[나루히토]] 천황 생일 축하 리셉션이 주한 일본대사관 주최로 열렸고 이 리셉션에서 '''한국 내 공식석상에선 최초로 기미가요가 연주됐다.''' 일본 대사관 관계자는 신문에 "(그간) 참석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도록 배려해왔지만 과도한 측면이 있었다"면서 대사관 주최 행사에서 국가 연주는 자연스러운 일이며, 한일 관계 개선의 흐름 속에서 이번에는 국가를 연주하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일본 [[산케이 신문]]은 [[윤석열 정부]]의 지향점이 이번 기미가요 연주에 반영됐다고 분석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32/0003205609|#]] === 일본의 연예계의 기미가요 논란 === [youtube(dls0CZUICM8)] 역사 쪽으로 일본에 부정적인 배경에서 태어난 연예인들(특히 [[오키나와]] 출신)은 <기미가요> 제창을 잘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2005년 가수 [[하마사키 아유미]]가 아이치 엑스포 개회식에서 <기미가요> 제창을 거부하고, 자신의 평화곡인 'a song is born'을 제창해서 일본 내에서 대차게 비판받았다. 2008년에는 가수 [[각트]]와 [[아무로 나미에]]가 이 <기미가요> 제창 문제로 화제가 되었는데 둘 다 [[오키나와]] 출신이지만 각트는 사랑의 노래라며 불렀고 아무로 나미에는 부르지 않았다. 특히나 각트의 고향인 오키나와가 역사적인 이유로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반감이 크기 때문에 더욱 논란이 되었다. 다만 일본 내에서는 [[각트]]가 기미가요를 부른 것이 오히려 한국 우호 발언을 자주 한 자신의 행적을 겨냥한 극우세력과 황색언론과 마찰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한 행동일 수도 있다고 분석도 있었다. 결정적으로 각트의 조부모는 류큐의 귀족이었고, 각트 또한 자신의 이런 정체성을 강하게 표출했다. 그렇기에 각트가 아무 생각없이 기미가요를 불렀을 리는 만무하다. ~~그런데 일단은 '국가'인 것을 사랑의 노래라며 부른게 더 먹이는 행동 아닌가?~~ 대표적으로 [[쿠라키 마이]]가 있는데, 쿠라키 마이는 2007년 기미가요 제창을 한 번 거절한 후 [[극우]] 단체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2009년 기마가요 제창을 승인했다. 이 때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았다면 한국에서만 활동하는 쿠라키 마이를 보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즉, 일본에서 활동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과거 [[쿠라키 마이]]는 팬이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냐?''' 질문에 대해 '''옛날에 일본이 한국에 무서운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일본의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 사실을 죄송스럽고,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며 올바른 역사관을 보여주었다. 2020년대 현재는 기미가요에 대한 역사적 문제를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그냥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아무 생각없이 부르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심지어 한국에 대한 애정을 공공연히 표현한 가수들조차 공적인 무대에서는 행사상의 이유로 그냥 부르기도 한다. 당장 상기된 [[아무로 나미에]] 역시 본인이 정말로 투철한 역사관을 가져서 안 불렀다기 보다는 그냥 학교에서 교육받지 못했기에 '못 부른 것' 이라는 쪽이 더 정확한 해석이다. 애초에 본인도 그렇게 해명했다. 앞서 서술했듯이 2000년대 이후 [[학교]]에서 기미가요에 대한 [[교육]]이 보편화되면서 2020년대 현재에는 일본 사회 전반적으로 기미가요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들었고 그런 [[교육]]을 받으며 자라난 현 일본 세대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미가요를 평범한 국가로 인식하기 때문에 이 노래를 부른다고 우익으로 판단하기는 곤란하다. 올림픽이나 월드컵과 같은 국제적인 행사에서도 일본의 국가로 사용된다. == 창작물 == * [[니코니코 조곡]]도 이러한 정치적 문제 때문에 문제가 된다. [[드래곤 퀘스트]] 서곡과 [[파이널 판타지]] 주제가가 나오는 부분, <니코니코 동화 중독자들에게 바치는 한 곡>. 15인 버전 기준으로 9:08~9:29에 이 노래의 가사를 붙여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 일본 이외의 나라에서는 여러 가지 절묘한 테크닉으로 이를 피해 나간다. 주로 맨 앞의 '君(きみ)'를 생략하거나 다른 언어로 번역하면서 그 언어를 쓰는 나라의 국가를 넣는다(예 : [[영어]]→[[The Star-Spangled Banner]] or [[God Save the Queen]]). [[하츠네 미쿠]]를 이용한 [[한국어]] 버전 니코니코 조곡의 경우는 [[안익태]]의 [[애국가]] 가사와 이 노래의 가사를 번역한 가사를 반씩 넣었다. [[이내]]의 한국어판은 아예 이 부분 가사를 도려냈다. * [[맨발의 겐]]에서는 작중 [[나카오카 겐]]이 "[[태평양 전쟁|전쟁]]의 책임이 있는 천황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를 수 없다"며 이 곡을 까는 장면이 나온다. * [[히어로즈 인 더 스카이]]에서는 [[애국가]]와 섞어서 한일전 버전의 음악을 만들었다. 감상평은... 딱 한 번 사흘 정도 한 뒤 역사 속으로. * 개그우먼 [[조혜련]]이 이 노래에다 박수를 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 올림픽에서는 일본이 강세인 [[유도]] 등의 종목에서 이 노래가 자주 연주된다. == 영상 == || [youtube(S2Vanclvh3Q)] || || [youtube(7I9fp9w52bs)] || || NHK 버전 || || [youtube(WBxuVC1D1po)] || || 메이지 시대 초기에 나온 초대 기미가요 || || [youtube(5zO4PnGtldc)] || || 기미가요의 하츠네 미쿠 커버. 하츠네 미쿠판 기미가요는 유튜브와 니코동에서 [br] '初音ミク 君が代' 라고 검색하면 여기에 올려져 있는 것 말고도 다양한 버전을 찾을 수 있다. || || [youtube(ymo4L2BUyX0)] || || 메이지시대 초기 기미가요의 하츠네 미쿠 커버 || || [youtube(b1bpw8pK160)] || || [[가가쿠]] 버전 || || [youtube(iXuEhMxRQrE)] || || 일본의 아이돌 [[마츠우라 아야]]가 부른 <기미가요> 동영상 [br] [[일본프로야구]] 다이에와 오릭스의 [[대만]] 원정경기에서 부른 것 || || [youtube(XIy0c7FV-6k,start=22)] || || [[1964 도쿄 올림픽]] 개막식 영상으로, 국가 연주은 22초부터 시작한다. 10분 45초부턴 제창 버전도 나온다.|| || [youtube(ZJW3gyENF5A)] || ||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 개막식 영상으로, 위에서 언급한 아악판 기미가요이다. || || [youtube(nJNoBEiK_X0)] || || 여성 가수 후쿠이 마이의 기미가요 가창. 시작 부분에서 실수를 했는데 이로 인해 당시 블로그에 [[https://www.j-cast.com/tv/2012/01/03117979.html|500건이 넘는 비난 댓글]]을 받았다. || || [youtube(jpxyGnZGwC0)] || || 2011년 11월 15일 북한, 평양 [[김일성경기장]] || || [[2014 브라질 월드컵]] 아시아 3차예선 [[평양시|평양]] 홈에서 열린 경기 당시 경기전에 기미가요가 연주된 영상. 일본은 [[TBS 테레비|TBS]]에서 평양 현지, 한국은 [[SBS]] 방송국에서 생중계했으며 최기환 캐스터와 [[박문성]] 해설위원이 중계했다. 북한은 지금도 그렇듯 생중계 하지 않고 녹화중계로 보냈다. 그러나 북한인들의[* 일본 매체에서는 서포터즈로 칭했다.] 야유로 소리가 묻혔을 정도로 분위기가 굉장히 살벌했다. 그리고 영상엔 짤렸지만 국가 연주 이후 아나운서가 '''"이것이 현실이었습니다. 국가가 거의 들리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여담으로 이 당시 일본 대표는 최종예선을 확정지었고 북한 대표는 나머지 경기를 다 이겨도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기에는 승점이 모자란 상황이었기에 그렇게 중요한 경기는 아니었다.[* 당시 일본은 승점 10점으로 확정되었고 북한은 1승만 한 3점 상태로 일본전 포함을 전부 이겨도 9점이 되므로 최종 예선 진출과는 관련이 없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일본에 졌다면 북한 선수들이 안 좋은 일을 당할 것이 뻔했다.[* [[2006 독일 월드컵]] 예선 당시 원정에 온 이란 대표팀이 북한 응원단으로 봉변을 당할 뻔한 기록이 있다.] 경기는 후반 5분 박남철의 득점으로 1:0으로 이겼다. 이때 현지에 기자와 응원단이 150명 등 소수로 왔는데 보위부+서포터즈의 살벌한 응원과 감시로 응원 한 번 펼치지 못하고 그대로 침묵으로 봐야 했다. || [[분류:일본의 음악]][[분류:일본의 상징]][[분류:국가(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