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길양수}}}'''[br]'''吉梁洙[* 처음에는 이름의 한자를 吉'''{{{+1 洋秀}}}'''로 썼다고 한다.]'''}}}}}}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길양수.jpg|width=100%]]}}} || || '''이명''' ||길재수(吉滓秀)·길양근(吉梁根)·길설근(吉楔根) || || '''본관''' ||[[해평 길씨]][* 영암·장흥파 22세 근(根) 항렬. 족보명은 길양근(吉亮根).] || ||<|2> '''출생''' ||[[1914년]] [[1월 13일]][* 음력 1913년 12월 18일.] || ||[[전라남도]] [[장흥군]] 장서면 등촌리[br](現 [[전라남도]] [[장흥군]] [[장평면]] 등촌리 90번지)[* 이 지번은 [[https://theme.archives.go.kr/next/acreage/viewCadastreDetail.do?packid=0000202811&docid=0007327183&mngno=BJCA493871&type=12&want=1&arch_tp_id=12&formType=old&rtURL=%2facreage%2flistOldnameSearch.do%3fdepth1%3d%25EC%25A0%2584%25EB%259D%25BC%25EB%2582%25A8%25EB%258F%2584%5edepth2%3d%25EC%259E%25A5%25ED%259D%25A5%25EA%25B5%25B0%5edepth3%3d%25EC%259E%25A5%25ED%258F%2589%25EB%25A9%25B4%5earch_tp_id%3d12%5edepth4%3d%25EB%2593%25B1%25EC%25B4%258C%25EB%25A6%25AC%5eserviceCode%3d1-1-3%5eformType%3dold|1915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1915년 당시 길두전(吉斗銓)의 소유였다. 길두전이 누군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다만 길양수의 셋째 작은아버지 길영구(吉永九)의 초명이 길두현(吉斗鉉)인 것으로 보아 길양수의 둘째 작은아버지 길영순(吉永淳, 1881. 9. 27 ~ 1949. 9. 11) 또는 다른 가까운 아버지 항렬인 사람의 초명으로 보인다. 1981년 8월 31일을 전후해 장조카 길종일(吉鍾壹, 1961. 5. 5 ~ )의 소유가 되었다가 현재는 문중 소유가 되었다. 한편, 이 지번에는 [[https://m.blog.naver.com/jdmose16/145820411|포은선생영정]]을 봉안한 양강영당(陽岡影堂)과 [[https://naver.me/FfWzBqnh|이웃사랑]]이라는 음식점이 들어서 있다.] || ||<|2> '''사망''' ||[[1986년]] [[3월 18일]][*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3월 22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 ||[[전라남도]] [[보성군]]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944호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길덕동]]은 그의 4촌 동생이고[* 길양수의 아버지 길영전(吉永銓, 1879. 5. 23 ~ 1949. 4. 21)은 [[길덕동]]의 아버지 길영순(吉永淳, 1881. 9. 27 ~ 1949. 9. 11)의 맏형이다.], 독립유공자 [[길인주]]는 그의 6촌 재종형(再從兄), 5선 국회의원을 지낸 [[길전식]]은 6촌 재종제(再從弟)이다.[* 길양수와 길덕동의 조부 길성진(吉聖鎭, 초명 길성돈吉聖敦, 1857. 10. 30 ~ 1916. 9. 22)은 [[길인주]]와 [[길전식]]의 조부 길봉진(吉琫鎭, 초명 길봉택吉琫宅, 1865. 7. 8 ~ 1923. 4. 26)의 셋째 형이다.] == 생애 == 길양수는 1914년 1월 13일 전라남도 장흥군 장서면 등촌리(현 장흥군 장평면 등촌리)에서 아버지 길영전(吉永銓, 1879. 5. 23 ~ 1949. 4. 21)과 어머니 [[경주 정씨]] 사이의 4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선린상업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9년 12월 [[광주학생항일운동]]에 호응하여 동조시위를 펼 것을 결심하고 조회를 할 때 단상에 뛰어올라 만세를 외친 뒤 시위를 선동하다가 학교 당국으로부터 퇴학처분을 당했다. 1931년 6월에는 [[사회주의]] 비밀결사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에 가입한 뒤 장흥군 조직부 및 장평면 책임자로 선출되어 농민조직의 확대 강화와 일본인 지주 및 친일 지주에 대한 소작쟁의의 활동을 펴는 한편, 마을에 야학을 개설하여 조직강화에 힘썼다. 이후 1934년 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된 그는 당초 1934년 9월 15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기소유예]]로 [[불기소처분]]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7070&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47783&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받았으나]], 검사 측의 공소로 1936년 1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형사부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미결 구류일수 중 545일 본형에 산입)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441&evntId=0034992644&evntdowngbn=Y&indpnId=0000023623&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보성군으로 이주해 은거하다가 1986년 3월 18일에 병환으로 별세했다. 198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고, 사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01년 10월 19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장흥군 출신 인물]][[분류:해평 길씨]][[분류:1914년 출생]][[분류:1986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