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동학농민혁명)] ||<-2> {{{+1 '''김개남'''}}}[br]'''金開南'''[* 원래 이름은 김영주(金永疇)였으나 [[동학농민운동]] 당시 '''조선의 남쪽을 새로 열자'''는 의미에서 '개남(開南)'으로 고쳤다고 한다.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金'''{{{+1 介男}}}'''으로 각각 5차례 등장한다. 《[[매천야록]]》에는 '''{{{+1 介}}}'''南으로도 [[http://db.history.go.kr/id/sa_001r_0020_0060_0020|소개되었다]].]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김개남장군.jpg|width=100%]]}}} || ||<-2> [* 원래 있던 사진은 실제와는 많이 다른 얼굴로 알려져있다. 김개남 장군의 사진인지에 대한 고증을 거쳐야 하기에 초상화로 대체한다.] || || '''아명''' ||김기선(金琪先) || || '''본명''' ||김기범(金箕範) || || '''자''' ||기선(箕先) || || '''본관''' ||[[도강 김씨]][* 28세 영(永) 항렬. 족보명은 김영주(金永疇).] || ||<|2> '''출생''' ||[[1853년]] [[9월 15일]] || ||[[전라도]] [[태인군|태인현]] 산외이변면 정량동[br](現 [[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 정량리 원정마을 988-1번지)[* [[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51022|#]]. 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713번지 지금실마을에도 [[https://terms.naver.com/entry.nhn?cid=40942&docId=1252808&categoryId=38813|김개남 장군 고택터]]가 있는데 어린 시절 이주하여 살아온 곳이라 한다.] || ||<|2> '''사망''' ||[[1894년]] [[12월 3일]] (향년 41세) || ||[[전라도]] [[전주시|전주부]] 부북면 검암리 숲정이[br](現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진북동]] [[https://naver.me/GPrJ9jO1|숲정이성지]])[* [[http://m.sisajb.com/view.php?idx=36283|#]]] || || '''국적''' ||[[조선]] || || '''신장''' ||161cm 미만[* 김개남의 키가 작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조선 남성 평균키가 161cm니까 김개남의 키는 161cm보다 작은 키를 추측할 수 있다.] || || '''종교''' ||[[동학]] || || '''별칭''' ||김개남대접주[br]개남장(開南丈) 또는 개남장군(開南將軍)[* [[동학농민운동]] 시기.]|| [목차] [clearfix] == 개요 ==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수천 군사 어디다 두고 짚둥우리에 묶여 가다니 그게 웬 말이냐."'''' >'''"개남아 개남아 진개남아 수많은 군사 어데 두고 전주야 숲에 유시(遺屍) 했노."''' >---- >그가 잡혀갔을 때 백성들이 부른 노래 [[조선]] 말기의 인물로서 [[동학농민운동]]에서 [[전봉준]]과 더불어 대표적인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본관은 [[도강 김씨|도강]](道康), 자는 기선(箕先). == 생애 == 1853년 9월 15일 전라도 태인현 산외이변면 정량동(現 [[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 정량리 원정마을 988-1번지)에서 아버지 김대흠(金大欽)과 어머니 [[익산 이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농 가정으로 [[선비]] 대우를 받던 집안에서 태어났으므로 김개남은 어릴 적부터 학문도 어느 정도 배우며 자랐다. 어린 나이에 비하여 친화력과 담력도 큰 편이라서 [[개구쟁이]]로도 유명했다고 한다.[* [[소문]]에 따르면 학문 분야에서는 [[병서]]와 [[경세유표]]를 즐겨 읽었고 장난 분야에서는 [[돼지]]를 놓고 [[서리(범죄)|서리]]질을 했다고 하니 정말 범상치 않았던 같다.] 성인이 된 김개남은 키가 작지만 총명하였다고 한다. 20대 후반이 되어서 김개남은 전봉준을 처음으로 만났고 30대가 되어서는 [[동학]]을 접한다. 이 시기 김개남은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다양한 경험을 했고 동학의 2대 교주였던 [[최시형]]과도 인연을 맺었다. 그리하여 자신도 동학에 입교했으며 동학의 포교 활동이나 교조 신원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김개남은 지도력이 뛰어나서 [[전라도]] 지역의 다른 접주들과 함께 많은 군중을 동원하는데 앞장섰고 전라도 지역의 동학 집단에서 전봉준, [[손화중]] 등의 인물처럼 영향력있는 [[지도자]]가 된다. 전봉준이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자 김개남은 13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부안군|백산]]에서 동학 농민군과 합류했으며 봉기 당시 손화중과 함께 부지도자 격의 위치에서 동학 농민군을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김개남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천민]]들로 이루어진 부대였는데 핍박받는 자들이 모인 부대답게 [[양반]] 같은 기득권층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곤욕을 치른 양반들이 많았다.][* 김개남의 부대는 가는 곳마다 양반들이 사는 집을 발견하면 몰려가서 양반들을 [[구타]]하고 양반들의 딸들을 끌고 와서 김개남의 부대원들과 강제로 [[결혼]]을 시키기까지 했다. 그래서 양반들이나 지주들은 김개남의 부대를 증오했으며 김개남의 부대를 제압하기 위해 '민보군'이라는 민병대를 만들어 싸우기까지 했다.] 이후 [[전주시|전주]]성을 점령하고 [[전주 화약]]이 체결되면서 농민군은 일시 해산되었지만 [[집강소]]에서 활동을 계속하며 [[남원시|남원]]을 중심으로 [[임실군|임실]], [[장수군|장수]], [[무주군|무주]] 등에서 농민 자치 행정을 펼쳤다. 하지만 동학 농민군 중에서도 강경파였으며 반(反)[[봉건주의]] 성향이 강했기에 다른 곳의 집강소에 비해 급진적인 모습을 넘어 과격했었다.[* 김개남은 지역의 [[수령]]들과 협조하는 것을 거부했다. 심지어 전봉준에게 협조하는 태도를 보였던 전라감사 [[김학진]]과도 상종을 안 할 정도였다. 게다가 전라도에서만 설치되어 있던 집강소를 [[경상도]]에도 설치하려고 동학 농민군을 보내기도 했다.] 동학 농민군을 조직해 양반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여 2차 봉기 때 [[흥선대원군]]의 지시에도 양반들의 민보군은 [[청나라]]군이나 동학 농민군보다는 관군이나 [[일본]]군에게 협력하게 된다. 실제로 민보군은 [[경복궁]]을 습격한 일본군을 경계하는 [[사림]]이 다수였지만 김개남의 과격함+명분론에 입각한 반청주의+깍뜻한 일본군의 대접으로 관군이나 일본군보다 적극적으로 [[토벌]]에 나서게 된다.[* 실제로 일본군은 겨우 1개 대대였고 관군의 전투 의지는 매우 낮은 상태였기에 주력은 양반들의 민보군이였고 일본군도 이들을 높게 대우하며 작전권도 일부 양도하는 등 극진히 대접했다.] 전봉준이 2차 봉기를 일으켰을 때 김개남은 여기에 합류하지 않았다. 그래서 [[공주시|공주목]] [[우금치 전투]] 때도 김개남 부대는 참전하지 않았고 10월 경에야 움직였다. 김개남은 1만여 명의 동학 농민군을 인솔하여 여러 수령들을 [[가렴주구]]의 혐의로 처형하고 북진하여 [[청주시|청주목]] 방면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전술적으로 공격은 실패했고 일본군과의 전투에서도 패배하면서 김개남의 [[군대]]도 와해되기에 이른다. 이에 [[태인군|태인현]] 산내일변면 사승리(現 정읍시 산내면 장금리 사승마을)에 있던 매부 서영기(徐永基)의 집으로 피신했지만 [[임병찬]]의 고발로 인해 강화 진무영 소속 병사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김개남의 친손자인 김환옥의 증언에 따르면 김개남의 힘이 세서 전라감사가 손발에 대못을 박아서 가둬놓았다고 한다. 이 말은 자신의 할머니인 김개남의 부인으로부터 직접 들은 것이라 한다.] 결국 붙잡힌 김개남은 전주부로 압송된 뒤 이튿날인 1894년 12월 3일 전라감사 [[이도재]]에 의해 전주부 부북면 검암리 숲정이(現 [[전주시]] [[덕진구]] [[진북동]] [[https://naver.me/GPrJ9jO1|숲정이성지]])에서 즉결 처형당해 [[효수]]되었고, 머리는 [[한성부]]로 보내져 3일간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https://sillok.history.go.kr/id/kza_13112025_001|조리돌려졌다]].[* 하지만 이 사형은 전라감사 이도재의 독단으로 이루어진 [[즉결처분]]이었는데, 동학농민운동 이전인 [[갑오개혁]]에서 그런 식의 사형을 금지했기 때문이었다. 이 판결은 조선과 일본 간의 갈등으로 이어졌는데 일본이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한 이도재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조선 정부가 경위를 해명하고 노력한 후에야 마무리되었다.][* 김개남이 처형된 이후 원수진 사람들이 김개남의 [[고기]]와 [[내장]]을 빼앗아 씹기도 했고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고 [[황현]]의 [[매천야록]]은 전하고 있다.] == 여담 == * [[전봉준]]과는 같은 동학 농민군 지도자로서의 친분과 단결력도 있었지만 충돌하는 것도 있었는데 급진파였던 김개남은 전봉준이 근왕주의적 태도를 보이는 것을 껄끄럽게 여겼다. 전봉준이 '''"[[탐관오리]]를 족치자"''' 는 입장이었다면 김개남은 '''"[[봉건주의]] 전부를 족치자"''' 는 입장이었다. 물론 이들이 반봉건과 반외세를 외쳤다는 점에서 동지 입장이었지만 그들의 현실 대처 방법과 속도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 죽기 전에 남긴 말에 따르면 [[흥선대원군]]과 접촉이 있었다고 한다. 2차 봉기와 관련되는 것인데 흥선대원군이 밀사를 보내 재봉기를 부추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봉준은 이를 부정했다. * 김개남이 스스로 '개남국왕(開南國王)'이라 칭하고 [[조선]]을 타도하려 했다는 의혹도 있다. * 김개남의 [[후손]]들은 힘들게 살았다고 하는데 김개남이 소장하고 있던 책들을 불태워야 했고 [[역적]]의 핏줄이라며 다른 이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동학농민운동의 [[재평가]]와 함께 김개남 또한 재평가되면서 후손들도 이제는 당당하게 살 수 있다고 한다.[* 이건 다른 동학군 지도자인 전봉준 또한 마찬가지.] 동학농민운동이 실패한지 거의 60년 넘게 동학군은 역적으로 취급받다가 [[박정희]] 정부가 출범하고 나서야 비로소 '위대한 민중 [[혁명]]' 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지방에서는 동학군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많은데 동학농민운동을 취재하러 갔던 [[언론인]]들이나 [[지식인]]들이 지방에서 동학군을 토벌했던 관군의 후손들과 만나 [[인터뷰]]를 하면 "동학군은 역적이다!" 라는 반응을 접하고 놀라는 일도 많다고 한다[* 지금은 없어진 사이트인 한토마에서 어느 해외 거주 노인이 조선이 망한 것은 동학난 때문이다 라는 글을 올려서 많은 네티즌들의 논란을 산 일도 있었다.]. * 김개남의 잘려진 목을 두고 전봉준의 목이라고 엉터리로 표기된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1990년대 초반만 해도 동학농민운동 기념관에서 김개남의 [[사진]]을 가지고 전봉준의 목이라고 엉터리 설명을 달았다가 비난을 받고 고치던 적도 있다. * 김개남의 고택터는 그동안 밭으로 사용되어 왔는데 2017년 발굴 조사를 통해 [[유물]]이 발굴되면서 현재 [[정읍시]]가 [[복원]] 사업을 추진 중이다. [[파일:김개남.jpg]] * 김개남이라고 알려져 있는 이 사진은 도강 김씨 [[족보]]에 나와있는 얼굴과 [[초상화]]로 그려진 얼굴과 아예 다르며 족보에 나와있는 얼굴과 초상화 그림이 흡사한걸로 보아 저 사진은 김개남이 아닐 [[확률]]이 매우 높다.[* 이 사진은 2001년 [[KBS]] 드라마 <[[명성황후(드라마)|명성황후]]>에서 [[김옥균]] 사망 직후의 해설 장면에서 쓰였다.] [[https://ncache.ilbe.com/files/attach/new/20170225/3740218/530017885/9494070450/08ed2615bf1af60a3dce9697d9fe1736.jpg|김개남의 목이 매달려있는 사진이므로 혐짤주의]] 링크에 있는 사진은 김개남의 효수 사진인데 자세히 보면 옆 모습이 도강 김씨의 족보에 나오는 얼굴과 프로필에 있는 초상화와 굉장히 흡사해서 진짜 김개남의 모습을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 대중매체에서 == *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소설)|토지]]>에 나오는 '김개주'라는 인물이 김개남을 본뜬 것으로 알려져 있다. * 1991년 영화 <[[개벽(영화)|개벽]]>에서는 배우 [[손호균]]이 연기했다. * 2019년 [[SBS]] 드라마 <[[녹두꽃]]>에서는 연극배우 김정호가 연기했다. 최후가 매우 다르게 그려졌는데 실제 [[역사]]에서는 처형되지만 제22회에서 술을 거하게 들이키고 "밥도 배불리 먹었으니 북망산 구경이나 한 번 가볼까나?"라는 외침과 함께 김개남의 저택에 습격한 관군들과 혼자서 싸운다. 전투 도중 총에 먼저 맞으면서 분전하다가 끝내 중과부적으로 전사하고 만다. [[분류:조선의 인물]][[분류:정읍시 출신 인물]][[분류:도강 김씨]][[분류:1853년 출생]][[분류:1894년 사망]][[분류:참수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