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6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1 김근배}}}[br]金根培'''}}} || ||<|2> '''출생''' ||[[1919년]] [[12월 16일]] || ||[[경기도]] 인천부 부내면 외리[br](현 [[인천광역시]] [[중구(인천)|중구]] [[동인천동#경동|경동]]) || || '''복무''' ||대한민국 육군 || || '''복무기간''' ||1948년 ~ 1959년 || || '''임관''' ||[[육군사관학교]][* 7기 특별반] || || '''최종계급''' ||[[준장]] || || '''사망'''' ||[[1967년]] [[9월 14일]] || || '''서훈'''' ||대통령표창 추서[br][[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자 [[군인]]. 평양 학병의거의 공로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 생애 == 1919년 12월 16일 경기도 인천부 부내면 외리(현 인천광역시 중구 경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메이지대학]] 법학과에 재학 중이던 1944년 1월, 소위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에 의해 [[일본 제국 육군]] 평양사단 예하 '[[오카노]](岡野)' 47포병부대에 강제 징병되었다. 당시 일본 제국 육군 평양사단은 42·43·44보병부대 및 47포병부대와 48공병부대, 50[[치중병]]부대 등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들 부대에 각기 배속되었던 학병들은 그해 7월에 초년 훈련병의 과정을 마치고 어느 정도 병영생활에 익숙하게 되자 42보병부대를 중심으로 집단 항거를 계획하였다. 이에 [[김완룡]]이 총책, [[박성화]]가 참모장에 선임되고. 참모로는 [[전상엽]], [[최홍희]], [[이도수]], 부대 조직책에 [[최정수(1922)|최정수]]가 담당하였다. 그해 8월부터는 동지를 포섭하면서 본격적으로 계획을 추진하였고, 평양사단 내 각 부대 학병들은 긴밀한 연락망을 구축하였다. 이때 평양사단 학병들의 항거계획으로는 평양사단 내 병영 폭파 등이 제의되었으나, 폭약과 탄약의 입수가 어려웠으므로 일단 부대를 탈출한 후 조선-[[만주]] 국경지대와 부전고원 등 산악지대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때를 기다려 평양사단을 폭파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44년 10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준비를 진행했는데 날짜가 임박해지면서 각 부대간의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아 부득이 거사일을 한달 뒤인 11월 1일로 연기하였다. 그러던 중 이러한 동정을 탐지한 조선인 헌병보조원이 그 사실을 일본군 헌병대에 밀고하였고, 또 학병 동지인 김완룡(金完龍)[* 육군 법무감, 예비역 육군 소장]이 일본군 상관을 구타한 일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평양사단의 집단항쟁계획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써 47보병부대 소속으로 이 계획에 가담했던 그도 1944년 9월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었고, 그후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군법회의]]에서 징역 4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아 곧 출옥하였다. 출옥 후 귀국하여 그해 9월 서울에서 학병동맹 결성에 참여, 경리부위원에 취임했다.[[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09_19_0060|#]] 12월 학병단이 학병군으로 개편될 때, 참모장에 취임했다.[[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12_16_0130|#]] 육군사관학교 7기 후기반에 임관했다. 1949년 [[여수·순천 10.19 사건|여순사건]] 검찰관으로 김지회 등 피고에게 사형을 구형했고, 1955년 [[박시창]], [[조재미]] 등과 함께 준장에 진급했다. 1956년 [[제5관구사령부]] 부사령관, 1957년 육군 휼병감을 역임하였고 1959년 군수품횡령사건으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예편하였다. 그후 1967년 9월 14일 별세하였으며, 사후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1919년 출생]][[분류:인천 중구 원도심 출신 인물]][[분류:1967년 사망]][[분류:메이지대학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