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김기도}}}[br]金基燾[*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3081400239102004&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63-08-14&officeId=00023&pageNo=2&printNo=13010&publishType=00010|1963년 8월 14일 조선일보 기사]]와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3081400209206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3-08-14&officeId=00020&pageNo=6&printNo=12860&publishType=00020|1963년 8월 14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金基'''{{{+1 道}}}'''로 기재되어 있다.]'''}}}}}}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김기도.jpg|width=100%]]}}} || ||<|2> '''출생''' ||[[1922년]] [[8월 8일]] || ||[[경상북도]] [[경주시|경주군]] (현 [[경주시]]) || ||<|2> '''사망''' ||[[1989년]] [[8월 16일]] || ||[[서울특별시]]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118호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경찰공무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922년 8월 8일 경상북도 경주군(현 경주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1944년경 [[학도병]]으로 [[일본제국 육군]]에 징집되어 [[중국]] 전선으로 보내졌다가, 그해 12월 [[하남성]] [[카이펑시|개봉시]](開封市)에서 [[홍구표]]·최일룡과 함께 탈영한 뒤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해 항일투쟁에 종사했다. [[8.15 광복]] 후 귀국하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3가]] 65번지에 본적을 두었으며, 1946년 [[경찰공무원]]에 입직하였다. 1949년 5월 10일부터 1950년 7월 31일까지 [[https://www.ggpolice.go.kr/yidb/html.do?menu=HC131|제5대 용인경찰서장]]으로 재직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에서 [[국민보도연맹]]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아 당시 [[용인시|용인군]] 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을 체포했으나 연맹원들에게 '지금 [[조선인민군]]이 내려오고 있는데, (당신들을) 체포 명령이 내려와서 데리고는 왔는데, 내가 다 보내 줄 테니까 가서 [[경거망동]]하지 말고 안녕될 때까지 조용히 잘 있으라'고 부탁을 하며 모두 석방해주어 당시 용인군에는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피해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용인 근·현대사 증언 구술생애 자료집 IV 용인사람 용인이야기(용인문화원 부설 용인학연구소, 2020), 384쪽 정찬섭씨의 증언.] 이후 [[경감]]으로 [[경기지방경찰청|경기도경찰국]]에 전보되었다가 [[미국 육군]] 제1기병단 포병사단 임시 호위중대장으로 편입된 뒤 [[낙동강 방어선]]에서 승리를 거두고 북진하는 데에 전공을 세웠다하여 1950년 12월 13일 미국 육군 제1기병단 포병사단 총사령관 찰스 D. 팔머 [[준장]]으로부터 성훈장(星勳章)과 포병사단기, 감사장 등을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5012160020910200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0-12-16&officeId=00020&pageNo=2&printNo=8383&publishType=00010|수여받았다]]. 1952년 [[https://db.history.go.kr/item/imageViewer.do?levelId=jw_1952_0069_0010|부산철도경찰대장]]([[총경]]), 1952년 10월 12일부터 1953년 2월 28일까지 [[https://www.smpa.go.kr/user/nd60475.do|제3대 국회경비대장]], 1953년 3월 1일부터 1953년 10월 30일까지 [[https://www.gnpolice.go.kr/gnpsub/page.do?MENU_ID=it0104&go=jh|제7대 진해경찰서장]] 등을 역임하고 1953년 10월 31일 경남경찰학교장으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53110200239102020&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3-11-02&officeId=00023&pageNo=2&printNo=9495&publishType=00010|영전되었고]], 1953년 12월 24일 [[대한민국 경찰청|내무부 치안국]]에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5312240023910101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3-12-24&officeId=00023&pageNo=1&printNo=9547&publishType=00010|전보되었다]]. 그 뒤 1954년 4월 10일 같은 한국광복군 출신인 [[전호인]], 이세경(李世鏡)과 함께 근무형편을 이유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5404120023910302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4-04-12&officeId=00023&pageNo=3&printNo=9655&publishType=00010|면직했다]]. 경찰공무원 퇴직 후 1956년부터 1958년 사이에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시]] [[원대동]](現 [[대구광역시]] [[서구(대구)|서구]] [[원대동3가]]) 1145번지 및 1150번지에서 [[http://db.history.go.kr/id/hs_003_1956_01_18_8590|대흥직물공장]](大興織物工場) 및 [[http://db.history.go.kr/id/hs_003_1957_12_18_9800|천광직물공장]](天光織物工場)의 대표로서 [[인견]] 등의 직물을 생산하는 섬유공업을 경영하기도 했다. 이후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고, 1989년 8월 16일 서울특별시에서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1989년 8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안장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한국광복군/군인]][[분류:대한민국의 경찰공무원]][[분류:경주시 출신 인물]][[분류:1922년 출생]][[분류:1989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