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김낙헌}}}'''[br]'''金洛憲'''}}}}}} || || '''창씨명''' ||가네도쿠 에이켄(金德榮憲) || || '''이명''' ||김영헌(金榮憲) || || '''자 / 호''' ||치원(致元) / 일와(逸窩) || || '''본관''' ||[[경주 김씨]][* 문선공파(文宣公派)-노항공파(魯巷公派)-지사공(知事公) 36세 헌(憲) 항렬.] || ||<|2> '''출생''' ||[[1902년]] [[8월 26일]][* 경주김씨문선공파세보 권6 309쪽에는 1월 29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 ||[[경상북도]] [[영천시|영천군]] 환귀면 황강동[br](현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황강리)[* 인근의 양평리와 함께 [[경주 김씨]] 집성촌이다.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도 이 마을 출신이다.] || || '''사망''' ||[[1965년]][* 경주김씨문선공파세보 권6 309쪽에는 1950년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 [[7월 7일]] || || '''묘소'''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중리 || || '''상훈''' ||대통령표창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 생애 == 김낙헌은 1902년 8월 26일 경상북도 영천군 환귀면 황강동(현 영천시 임고면 황강리)에서 아버지 김규정(金奎鼎, 1876. 7. 18 ~ 1945. 12. 30)과 어머니 [[경주 손씨]](1874. 11. 6 ~ 1918. 11. 3)[* 손영기(孫永機)의 딸이다.] 사이의 1남 2녀 중 [[외아들]]로 [[http://yeongcheon.grandculture.net/yeongcheon/toc/GC05101406|태어났다]]. 이후 임고면 양평동 347번지으로 이주하여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597&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8209&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본적을 두었다]]. 그는 1919년 전국적으로 [[3.1 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4월 22일 영천면 창구동 시장으로 가서 붉은 [[목면]]을 구매했다. 나흘 뒤인 4월 26일, 고향 양평동의 서당에서 구매한 목면으로 [[태극기]]를 직접 제작해 한켠에는 '[[대한독립만세]]'의 문구를 쓰고, 또 다른 한켠에는 '영천군 임고면 양평동 김영헌'이라고 썼다. 이튿날인 27일, 태극기를 들고 창구동 시장에 갔고, 대나무 장대를 구입해 [[영천초등학교(경북)|영천공립보통학교]](현 [[영천초등학교(경북)|경북 영천초등학교]]) 내 수로에 가서 태극기를 장대에 묶어 두고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그날 저녁 6시 30분 [[일본인]] [[순사]] 보리 손토쿠(補李存得)가 그를 발견하고 수상히 여겼고, 김낙헌에게 다가가 신문하려 했다. 이때 김낙헌은 문득 가지고 있던 태극기를 꺼낸 뒤 수 차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곧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1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형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597&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8209&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선고받고]] 이에 공소하였으나, 그해 6월 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680&evntId=0034984243&evntdowngbn=Y&indpnId=0000015769&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공소가 기각되어]] 결국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6년 6월에는 [[순종황제]]가 붕어(崩御)하자 조선시대 전통 [[상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규탄하는 글을 보냈다가 일본 경찰에 재차 체포되어 수개월간 구금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뒤 일본인 관리들이 [[궁성요배]]를 강요하자 결사반대했고, 1938년에는 『삼일운동실록(三一運動實錄)』을 저술하고 '대한복수가(大韓復讐歌)'[* 『삼일운동실록(三一運動實錄)』과 '대한복수가(大韓復讐歌)'의 가사는 1950년 [[6.25 전쟁]] 중에 유실되었다.] 를 작사하여 지역민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기도 했다. 이후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65년 7월 7일 별세하였다. 사후 1992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경주 김씨]][[분류:영천시 출신 인물]][[분류:1902년 출생]][[분류:1965년 사망]][[분류:대통령표창(독립유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