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창성군 출신 인물]][[분류:생년 미상]][[분류:1920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운동가|{{{#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br] {{{#ffffff '''{{{+1 김덕신}}}[br]金德新'''}}}}}} || ||<|2> '''출생''' ||[[1901년]] || ||[[평안북도]] [[창성군]] || ||<|2> '''사망''' ||[[1920년]] [[5월]] || ||[[중국]] [[지린성]] 환인현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김덕신은 1901년생으로 추정되며, 평안북도 창성군 출신으로 알려졌다. 그는 향리에서 백삼규(白三圭)에게 수학했고, 1910년 이후 스승과 함께 남만주 관전현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4월 대한독립단이 조직되어 백삼규가 부총재로 활동했을 때 곁에서 보좌했다. 1920년 5월 백삼규와 함께 국내에 잠입하다 관전현 청산구에서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일경은 환인현 사첨자 수풀 속에서 백삼규를 사살하고, 김덕신에게는 돌아갈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에 불응하여 중상을 입고 주변의 중국인 집에 가서 백삼규의 피해 사실을 알리고 사망했다. 죽기 직전에 중국인에게 스승의 곁에 자신을 묻어 달라고 부탁하였다고 한다. 당시 그의 나이 20살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김덕신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