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운동가|{{{#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br] {{{#ffffff '''{{{+1 김도태}}}[br]金道泰'''}}}}}}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김도태.jpg|width=100%]]}}} || ||<|2> '''출생''' ||[[1891년]] [[9월 11일]] || ||[[평안도]] [[정주시|정주목]] 아이포통 대산리[* [[경주 김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김공집]]도 이 마을 출신이다.][br](現 평안북도 [[정주시]] 대산리) || ||<|2> '''사망''' ||[[1956년]] [[12월 26일]] || ||[[서울특별시]]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 '''본관''' ||[[경주 김씨]] || || '''학력''' ||[[오산고등학교(서울)|오산학교]] {{{-2 (졸업)}}}[br][[신흥무관학교]] {{{-2 (졸업)}}}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891년 9월 11일 [[평안북도]] [[정주시|정주군]] 아이포면 대산리(현 평안북도 [[정주시]] 대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0년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고등학교(서울)|오산학교]](五山學校)를 제1기로 졸업한 뒤 경기도 용인에 자리한 삼악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1912년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다시 오산학교로 돌아왔고, 1916년 일본 정칙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했다. 그 후 귀국하여 1918년 재령군의 명신중학교(明新中學校)에서 지리와 역사 교사로 재직하였다. 1919년 2월 7일, [[최남선]]은 기독교측 인물들과 교섭해 독립선언 계획에 동참시키기 위해 [[현상윤]]으로 하여금 [[이승훈(1864)|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 경영을 핑계로 상경하라도록 하라는 연락을 했다. 이에 현상윤은 정노식(鄭魯湜)의 집에 머무르고 있던 정주군 사람인 김도태에게 이 연락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김도태는 이에 따라 2월 8일 경성을 출발하여 이튿날 정주에 도착하여 이승훈의 집으로 갔다. 그러던 중 오산학교 교사 박현환(朴賢煥)을 만나 이승훈이 선천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그는 박현환에게 최남선의 연락사항을 알린 뒤 선천에 가서 이승훈에게 연락하게 했다. 이승훈은 연락을 받은 뒤 2월 11일에 급히 상경하여 최남선과 만나 기독교 측이 독립선언에 참가하는 데 동의했다. 이 일로 체포된 김도태는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나,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석방되었다. 이후 1921년 [[휘문고등학교|휘문중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25년간 재직했다. 1938년 일제의 해군기념일(5월 27일)을 맞아 [[러일전쟁]] 시기에 발발한 [[쓰시마 해전]]을 [[트라팔가 해전]], [[유틀란트 해전]]과 함께 세계 3대 해전으로 소개하는 글을 [[매일신보]] 1938년 5월 27일자 기사에 게재했다. 그리고 1942년 소년·소녀들에게 일본군이 점령한 지역의 기후와 지리를 설명하는 글을 게재했다. 이외에도 여러 건의 친일성 논설을 매일신보에 게재했다. [[8.15 광복]] 후, 1945년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경성여자상업학교]] 교장에 취임했으며, 조선지리학회(朝鮮地理學會) 회장을 지냈다. 1949년에는 [[공군사관학교]] 교수를 맡았다. 1956년 12월 26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김도태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1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는 김도태가 일제강점기 말기에 친일성 논설을 여러 건 매일신보에 게재한 일을 근거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그를 포함시켰다. 하지만 그가 친일을 목적으로 그런 논설을 게재한 것이 맞는지, 단순한 정보 제공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에 관한 논란이 일었고, 결국 친일인명사전 수록은 보류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경주 김씨]][[분류:정주시 출신 인물]][[분류:1891년 출생]][[분류:1956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분류:오산고등학교(서울) 출신]][[분류:경희대학교 출신/전신 학교]][[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