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밀양시 출신 인물]][[분류:1893년 출생]][[분류:1977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운동가|{{{#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br]{{{#ffffff {{{+1 김명규}}}[br]金明奎}}}'''}}} || ||<|2> '''출생''' ||[[1893년]] [[6월 3일]] || ||[[경상남도]] [[밀양시]] || ||<|2> '''사망''' ||[[1977년]] [[2월 10일]] || ||[[경상남도]] [[밀양시]] || || '''직업''' ||독립운동가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 개요 == 일제강점기 당시 3.1 운동에 참여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며 활동한 독립운동가.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생애 == 1893년 6월 3일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1912년 밀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1919년 4월 17일 동래고보에서 재작하던 중 [[3.1 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동래고보의 거의 모든 학생이 모여 시위를 벌이던 중 체포되어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는다. 1920년 12월 28일 서울에서 동료였던 황상규의 밀명을 받고 길림무관학교 설립기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신의주]]에서 파견된 또 다른 동료인 김노봉과 함께 창녕의 부호인 하경석의 집에 잠입하여 군자금 3천원을 요구하였고 일단은 150원을 모금하였다. 그 후 서울에서 황상규에게 전달 도중 붙잡혀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부산형무소에 수감된다. 1927년에는 창녕 유림지서 갑비 부장 살해사건에 연루되었고 그로 인해 수배되어 10년간 도피생활을 하게 되었다.[[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MeritList.do?goTocode=20002|독립유공자공훈록 8권]]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