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가야 국왕)]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2F3268, #3d428b 20%, #3d428b 80%, #2F3268)" '''{{{#fbe673 금관가야 구형왕의 아들[br]{{{+1 김무력 | 金武力}}}}}}'''}}} || || '''{{{#fbe673 이름}}}''' ||<-2>무력(武力) || || '''{{{#fbe673 생몰년}}}''' ||<-2>미상[* [[518년]] ~ [[579년]]이라는 생몰년도가 떠돌고 있는데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그의 출생과 사망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의해 추측으로 만든 생몰연대이다. 다만 532년 항복기사에서 언급된 점을 미뤄보아 최소 532년 이전에 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 || || '''{{{#fbe673 본관}}}''' ||<-2>[[김해 김씨]] || || '''{{{#fbe673 아버지}}}''' ||<-2>[[구형왕]] || || '''{{{#fbe673 어머니}}}''' ||<-2>계화부인(桂花夫人) || || '''{{{#fbe673 자녀}}}''' ||<-2>'''슬하 1남''' 아들 - [[김서현(신라)|김서현]] || || '''{{{#fbe673 관등}}}''' ||<-2>[[각간|각간(角干)]] || || '''{{{#fbe673 골품}}}''' ||<-2>[[진골]] || [목차] == 개요 ==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셋째(막내) 아들. 노리부([[김세종]])의 동생. [[김서현(신라)|김서현]]의 아버지이며, [[김유신]]의 할아버지이다. 사훼 무력지 잡간(沙喙另力智迊干)으로 칭하기도 한다. [[금관가야]]의 왕자였으나, [[금관가야]]가 [[신라]]에 복속된 후 신라의 장수가 되었다. [[골품제|골품]]은 아버지를 따라 [[진골]].[* 단 아무리 같은 진골이라도 일단 신라 입장에서 가야계 신김씨는 굴러들어온 돌이므로, [[태종 무열왕|김춘추]]를 비롯한 [[경주 김씨]] 진골들에 비해서 실질적인 대접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김무력 본인을 비롯해 세종, 아들인 [[김서현(신라)|김서현]], 손자인 [[김유신]] 등 가야계 신김씨들이 대대로 큰 공을 세우면서 조금씩 나아진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조에서는 둘째 아들 무력(茂力)[* 정확하게는 무도(茂刀)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무력(茂力)의 오기로 본다.]으로 돼 있는데 둘째와 셋째 순서에 착오가 있었던 듯. 삼국유사 김유신조에서는 호력(虎力)으로 써 있지만, 이건 [[삼국유사]]가 [[고려시대]]에 쓴 책이므로 2대 [[혜종(고려)|혜종 왕무]]의 이름을 [[피휘]]한 것으로 원래는 무력(武力)이 맞다.[* 같은 이유로 [[문무왕]]은 [[삼국사기]] 원문에서는 문호왕으로 표기하고 있다.] == 생애 == [[금관국|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3남으로 태어났다. 532년 금관가야가 [[신라]]에게 항복하면서 구형왕과 그의 형제들은 신라의 [[귀족]]으로 편입하게 된다. ~~이름 그대로 [[무력]]이 높았는지~~[* 참고로 이름의 [[한자]]도 [[닉값|흔히 생각하는 그 무력(힘)과 같다.]]] [[진흥왕]] 대 한창 신라가 세력을 넓히던 시기 신라의 [[장군]]이 되어 550년경 백전노장 [[이사부]]의 부관으로서 단양 적성 전투에 참여했고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 공략([[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에 참여해 군공을 세웠으며 <[[삼국사기]]>나 [[단양 신라 적성비]]에 김무력의 [[이름]]이 나온다. 이후 553년에 신라가 [[백제]]를 공격해 새로 신라가 차지한 한강 유역에 설치한 [[신주#s-9]](新州) 지역의 [[도지사]]격인 초대 [[군주]]가 되었고 [[나제동맹]] 결렬의 보복으로 백제의 [[성왕(백제)|성왕]]이 신라에 쳐들어갔을 때는 신주 [[국경]]의 병력을 이끌고 남하해[* 성왕은 한강의 신주 [[병력]]을 간과했던 듯 하다. 신주의 병력을 남쪽으로 보내면 한강 유역은 텅 비기 때문에 당연히 고구려가 신라를 빈집털이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신라가 고구려로 오지 말고 백제랑 니들끼리 싸우라고 신라와 불가침 밀약을 맺어둔 상태였으므로 한강이 빈 동안 북방 [[돌궐]] 전선에 집중했고 이는 성왕의 패착이 된다.]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을 전사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직접 성왕의 목을 벤 것은 휘하의 비장 [[도도(신라)|도도]]이다.] 이후 [[왕]]을 잃어 혼란에 빠진 백제군을 크게 무찔러 [[좌평]]급 귀족 4명과 군사 29,600여명의 목을 베는 대승리를 거뒀다. 이런 공을 세운 덕분인지 이후 초고속 [[승진]]을 한 정황을 여러 기록간의 내용을 비교해서 알 수 있다. 551년 단양 신라 적성비나 553년 7월 <삼국사기>의 신주 군주로 김무력을 임명할 때 김무력은 신라 17관등 가운데 여섯째 등급인 [[아찬]]이었는데 555년 세워진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나 561년 [[창녕 진흥왕 척경비]]에서는 3번째 등급인 [[잡찬]]으로 관등이 3등급 승진한 상태다. 거의 약 2년만에 3관등 승진인데 신라의 다른 기록을 봐도 이렇게 짧은 기간에 3단계 승진은 거의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초고속 승진이다. 관산성 전투에서 활약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 다만,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는 [[교과서]]나 각종 [[시험]] 문제에서는 555년 건립설이 정답이지만 [[학계]]에서는 555년설, 561년설, 568년설이 대립하고 있다. 당연히 교과서와 시험에서는 정답이 여러 개일 수는 없으니 어지간하면 정설 하나만 제시한다. 그리고 진짜로 애매한 사례면 그냥 그 주제로 시험 문제를 내지 않고 내서 [[논란]]을 만들면 그건 좋지 않은 출제 예시다. 한 [[공무원]] 시험에서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의 건립년도 문제가 나와 논란이 된 적이 있는데 [[국정교과서]]에 써 있는 555년이 정답으로 인정됐다. 그러니까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그냥 555년 건립으로 알고 있는 것이 좋다.] 아무튼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제외하고 보더라도 [[창녕 진흥왕 척경비]]의 561년에도 잡찬이므로 8년만에 3관등 승진이니 이렇게 쳐도 상당히 고속 승진한 것은 맞다. 그 후 신주성주(新州城主)와 신주도행군총관(新州道行軍摠管)을 지냈으며 이러한 발판으로 김무력의 한강 유역 쟁취와 관산성 전투의 승리는 신라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으며 김무력 역시 신흥 무장으로서의 발판을 확보하게 되어 신라 [[사회]]의 최고위 인물로 부상되었다. == 매체 == * [[초롱이의 옛날여행]]: [[성왕(백제)|성왕]] 편에서는 [[진흥왕]]이 [[도도(신라)|도도]][* 그것도 요괴의 모습으로 나온다.]를 시켜 성왕을 죽인 것으로 나온탓에 등장이 없다. == 기타 == * 한자를 단지 [[음차]]해 순수하게 신라 고유어식 이름을 짓거나[* 이 때문에 훗날이라면 웬만해선 이름에 안 넣었을 노(奴)(노예)나 독(毒)(독극물) 같은 글자가 음차를 위해 이름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즉 훈은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 불교적 이름을 짓던 당시 대부분의 신라인들과 달리, 그 본인과 아들 [[김서현(신라)|김서현]], 손자 [[김유신]]의 이름은 훈을 고려한 한문식 이름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닉값|이름이 사상적 지향성을 나타낸다는 해석]]에 따르면 김무력 가문은 일찍부터 유학을 중시하고 유교적 왕도정치를 추구하는 성향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 [[위서]]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에선 그의 첫째 아내가 [[법흥왕]]의 왕비 보도부인의 동생 '박씨'라고 하며 둘째 아내가 [[진흥왕]]과 사도부인의 딸 '아양공주'라고 나온다. 정사에선 김무력의 아내가 누구인지 나오지 않으나, [[김세종]]의 손녀가 그의 아내라는 설이 있다. [[삼국유사]]에서 [[문무왕]]이 [[문명왕후]]를 소개할 때 '''[[구형왕]]의 아들 [[김세종]]의 아들 [[김솔지]]의 아들 [[김서현(신라)|김서현]]의 딸'''이라고 했기 때문. 여기서 일반적으로 김무력의 아들로 여겨지는 [[김서현(신라)|김서현]]을 [[김솔지]]의 아들로 본 것이다. 직계가 아니라 이렇게 표시한 이유는 [[수로왕|김수로]]의 제사를 떠받들기 위해 명목상 왕계 기준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 김무력의 무덤으로 전하는 무덤이 [[통도사]][* 통도사 역시 신라 상대에 창건된 사찰이다.]가 있는 양산 영축산 경내에 위치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무덤의 이름값 때문인지(...) '''세 번이나''' 도굴을 당했다. 무덤의 위치는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에 속한다.[[http://www.usjournal.kr/News/86781|#]] [각주] [[분류:가야의 왕자]][[분류:김해 김씨]][[분류:진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