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신라 추존 국왕)]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A2646 0%, #4A2D5B 20%, #4A2D5B 80%, #3A2646); color: #fbe673" '''장안국 왕위 요구자[br]{{{+1 김범문 | 金梵文}}}'''}}} || || '''본관''' ||[[강릉 김씨]] || || '''성씨''' ||김(金) || || '''휘''' ||범문(梵文) || || '''부왕''' ||[[김헌창]] || ||<|2> '''재위''' ||'''{{{#fbe673 반란 지도자}}}''' || ||[[825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통일신라]]의 인물. [[태종 무열왕]]계 [[강릉 김씨]] [[김주원(신라)|김주원]]의 손자, [[김헌창]]의 아들이다. == 생애 == 본래 할아버지 김주원은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높았으나 [[원성왕]]이 되는 김경신의 계략에 밀려났고, 하서주([[명주]], 현 [[강릉시]])로 떠나게 된다. 아버지 김헌창은 [[822년]]([[헌덕왕]] 14년) [[김헌창의 난]]을 일으켜 [[장안국]]을 세워 신라를 몰아붙였으나 결국 패배해 자결한다. 이때 김범문은 김헌창의 난에서 도망쳐 살아남은 것으로 추정된다. 김범문은 이후 3년이 지난 [[825년]]([[헌덕왕]] 17년)에 다시 난을 일으켰다.[* 고달산의 산적 수신(壽神)이 이끄는 산적 100여명과 함께 반란을 모의했다고 한다. 특히 수신은 김헌창의 최측근이자 책사였다.] 수도를 남평양[* 북한산군의 별칭으로 후의 한양군. 현 [[서울특별시]] [[한강]] 이북.]에 두고 나라를 세우려 했지만 한산주도독 김총명에게 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이후 무열왕계 [[진골]]은 [[6두품]]으로 [[강등]]되어 버린다(족강일등). 그렇다고 모든 무열왕계가 족강된 것은 아니다. 김양 등은 진골로 신라에서 지배계층으로 남았다 김헌창, 김범문의 반란은 주류사회에서 배제된 귀족이 토착세력을 끌어들여 일으킨 반란의 시초격인 사건으로 이후 [[후삼국시대]]까지 이어지는 분열의 전조가 되었다. == 둘러보기 == ||<-5> [[장안국|장안국의 역대 국왕]] || || 초대 [[김헌창]] || {{{+1 ←}}} ||<#dcdcdc,#000000> 김범문 || {{{+1 →}}} || 멸망 || [[분류:신라 국왕]][[분류:신라의 왕족]][[분류:강릉 김씨]][[분류:아시아의 작위 요구자]][[분류:825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