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북한의 음악가)]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C001B, #BC0021 20%, #BC0021 80%, #9C001B)" {{{#ffffff '''{{{+1 김병화}}}[br]Kim Byong Hwa'''}}}}}}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김병화/kbh.jpg]]}}} || || {{{#ffffff '''출생'''}}} ||[[1936년]] [[5월 16일]] [br] [[일본]] [[효고현]] [[고베시]]|| || {{{#ffffff '''사망'''}}} ||[[2021년]] [[3월 21일]] (향년 84세)[br] [[평양시]]|| || {{{#ffffff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일본 제국)]→[include(틀:국기, 국명=일본)]→[include(틀:국기, 국명=북한)] || || {{{#ffffff '''학력'''}}} ||[[김원균명칭 음악종합대학|평양음원대학]]|| || {{{#ffffff '''정당'''}}} ||[include(틀:조선로동당)]|| [목차] [clearfix] == 개요 == 북한의 지휘자. == 생애 == 1936년 5월 16일에 태어났다. [[재일 한국-조선인]]으로, [[조선국립교향악단]]의 행정직인 창작 창조부장 겸 지휘자, 인민예술가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던 지휘자였다. 일본 [[효고현]] [[고베시]]에서 태어났고, 어릴적 부터 피아노와 바이올린, 작곡과 지휘를 배웠다. 1954년에는 일본 고베 청년 합창단 겸 지휘자로 활동했으며 1955년부터 도쿄 음악센터 예술국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했고, 1959년에는 버르토크의 피아노 작품을 연주해 주목받기도 했다. 1960년에 북한으로 이주하여 평양국립예술극장에서 피아니스트로 재직하면서 [[김원균명칭 음악종합대학|평양음악무용대학]][* 현 김원균 명칭 평양 음악대학.]에서 지휘를 배웠다. 1963년에 대학을 졸업한 뒤 국립예술극장 지휘자를 맡았고, 1970년에 조선국립교향악단 수석 지휘자로 임명되어 조선국립교향악단에서 수석 지휘자의 직책을 수행하였으며, 2000년도에 조선국립교향악단의 서울 공연에도 참가하였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고, 2005년에는 김일성상을 수여받아 김일성상 계관인이 되었다. 이후 [[장룡식]]에게 수석 지휘자 직책을 넘겨주고, 행정직인 창작 창조부장 직책을 수행하고 있었다가 현재는 고령으로 인해서 퇴직 했다. 이후 1만명 대공연에서 잠시 등장하여 노인들 합창을 1회 지휘했다. 이후 [[조선국립교향악단]] 창립 70주년 기념음악회에 출연해 [[조선국립교향악단]]을 지휘해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를 지휘 및 공연했다. 그리고 이 사람의 제자가 바로 [[수원대학교]] 교수 박태영이다. 국립교향악단 창작창조부 고문 자격으로 은퇴생활을 보내던 중 2021년 3월 21일에 8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김정은]]이 화환을 보내주었으며, [[조선중앙통신]]은 "절세위인들의 품속에서 예술적재능을 마음껏 꽃피우며 관록있는 예술창조집단의 수석지휘자로 성장한 김병화동지는 관현악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그네뛰는 처녀》,《아리랑》을 비롯한 수많은 작품들을 훌륭히 지휘형상함으로써 주체교향악발전에 이바지하였다."라고 그의 업적을 칭송했다. 9월 16일, [[애국렬사릉]]에 시신이 안장되었다. 조선중앙통신은 "주체교향악발전에 이바지한 국립교향악단 창작창조부 고문이였던 김병화동지"라고 좋게 말해주었다. == 수훈 == * [[김일성상]] * 인민예술가 칭호. [[분류:북한의 지휘자]][[분류:1936년 출생]][[분류:고베시 출신 인물]][[분류:2021년 사망]][[분류:애국렬사릉 안장자]]